5. 휴가
이제는 익숙해진 짧은 아픔이 지나간 후 EM 휴게실에 접속된 다크. 마침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쓸 필요 없게 되었으니 참 다행한 일이랄까. 딘 코렐로 변환된 모습이 다른 EM의 눈에 띄었다면 호기심 어린 시선을 잔뜩 받아야 했을 테니 말이다.
다크는 차분히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마스크도 없고 황금빛 로브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윤기 흐르는 검붉은 가죽 갑옷과 이마에 질끈 동여매진 검은 띠. 그 누구도 이 모습에서 운영자를 상상하진 못하리라. 당연하던가?
그렇게 짧다면 짧았던 복장 점검을 모두 마친 다크는 하이딩 상태 그대로, 바티안 제국의 수도 자이렌으로 이동했다.
"야. 얘기 들었어? 저번에 그 가요 대상을 탔던 이 서훈이 에피소드를 한대."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그 쪽을 흘깃 쳐다본 다크는 두 명의 남성 유저가 벽에 기대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일부러 큰길에서 좀 벗어난 한적한 골목길을 골라온 것인데 사람이 있자 조금 놀라웠다.
"V.M.G 중에 연예인 하나 없는 게임이 어디 있냐. 홍보 차원에서 연예인에게는 평생 무료 계정을 준다잖아."
"그래? 이야~ 연예인도 할 만하네. 나도 해볼까?"
"아서라. 그 웃기게 생긴 얼굴로 뭘 하냐. 아! 개그맨 하게? 그건 좀 가능성 있겠다."
"뭐시라? 그러는 네 놈은 뭐 잘생긴 줄 아냐?"
티격태격하는 두 유저를 보며 피식 웃은 다크는 느릿하게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구려 펍 하나를 지나쳐 그 옆길로 들어서자, 그가 바랬던 인적 없는 작은 골목이 나왔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이딩을 풀어야 하기에 이런 곳을 원한 것이었다.
냉큼 그 골목 안으로 들어선 그는 하이딩을 풀었고, 곧 태연하게 골목 밖으로 걸어나왔다. 마치 원래 그 쪽에서 오던 길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크는 느긋하게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이 사냥을 갈 파티를 찾거나 퀘스트 해결을 위한 동료를 구할 때, 유저들이 애용하는 곳이 바로 중앙 광장이다. 지금 그는 유저 중 한 명을 특별히 선택해서 수동 이벤트라는 핑계로 같이 놀려는 것이니 당연히 광장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얼마 안 있어 광장에 도착한 다크는 예전에 서큐버스를 불러다 놓았던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아 광장 주변의 유저들을 둘러보았다.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선 채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호호 웃어가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 개중에는 자신이 낄 파티를 구하기 위해 다크처럼 주변을 살피는 이들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 40%는 장사꾼이라는 사실이다. 저마다 자신이 팔거나 살 물건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기에 굉장히 시끄러운 광장 소음의 주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사람 구경에 정신 없던 다크는 문득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님을 자각했다. 수동 이벤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 그 이벤트 내용과 목적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캐릭터 설정에만 너무 공을 들인 탓이다.
"흐음. 슬슬 생각을 좀......"
다크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사람 구경에 정신이 없을 때, 아까부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알토라는 이름의 그는 복장이 무척 희한한 21살 청년이었다.
일단 희한한 그의 복장을 좀 살펴보자. 알토는 플레이트 건틀렛(Plate Gauntlet:통짜 철판으로 된 긴 장갑)을 손에 끼고 몸에는 체인 튜닉(Chain Tunic:쇠사슬을 꼬아만든 갑옷 상의)을 걸쳤으며 그 밑엔 레더 레깅스(Leather Leggings:가죽 갑옷 하의)를 받쳐 입은데다가, 투구 대신 마법사들이나 사용할만한 빨간 보석이 박힌 써클렛(Circlet)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제각각인 장비들을 착용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야말로 심히 부조화적인 옷차림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사실 이렇게 착용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갑옷 세트를 살 돈이 없는 사람이 방어력만 생각하여 있는걸 대충 짜 맞춰 입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로브나 긴 망토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리기 때문에 겉으로는 전혀 표가 안 난다. 알토처럼 언발란스한 장비를 한 채 대놓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지금 입고 계신 갑옷의 이름이 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다크는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렇게 질문하는 알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곧장 그의 독특한 복장이 눈에 들어왔고,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너무도 시원스런 그 웃음소리에 알토는 순간 멍해진 듯 했지만, 곧 피식 웃었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이 보통인데, 보자마자 대놓고 웃어버리는 다크가 독특하다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좀 특이한 사람은 역시 특이한 사람을 좋아한다.
"제 방어구들의 조합이 이상하죠? 하지만 실용성만큼은 뛰어나답니다."
능청스런 알토의 말에 다크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대꾸했다.
"사람들 눈길이 많이 따가웠을 터인데 로브라도 하나 걸치지 그러셨습니까."
"저라는 놈이 원래 제 멋에 죽고 사는 놈이라서요. 개성적이지 않나요?"
"아~주 개성적입니다.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절대 안 잊어 먹겠습니다."
다크와 알토는 서로 마주본 채 웃었다. 그러다 자신이 다크를 찾아온 용건을 기억해낸 알토가 재차 물었다.
"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못 받았는데요. 그 갑옷 이름이 대체 뭐죠? 현재 에피소드 내에 존재하는 이런 저런 가죽 갑옷을 다 봤다고 자부하는 저지만, 그렇게 검은색에 붉은 기가 도는 갑옷은 처음 봐서요."
그 말에 다크는 자신의 갑옷에 시선을 주었다. 알토의 말대로 그의 갑옷은 특이한 것이 맞다. 바로 초 희귀 아이템 중 하나이자 엄청난 마법 방어력과 물리 방어력을 자랑하는 데몬 아머(Demon Armor)였으니 말이다. 데몬을 잡는데 성공한 유저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름만 떠돌 뿐 실제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이건 데몬 아머입니다."
알토의 눈이 당장 동그래졌다. 데몬 아머에 대한 것은 그도 언뜻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데몬 아머라고요? 맙소사! 그럼 데몬 슬레이어세요?"
"그럴 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아니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만 다크였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데몬 슬레이어쯤이야 쉬운 일이니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운영자가 뭘 못하겠는가. 갓 슬레이어(God Slayer)도 가능하지.
"정말 대단하시군요! 멋져요! 존경스러워요! 근데 그 데몬 아머의 정확한 방어력 수치 좀 알 수 있을까요? 마법 방어랑 물리 방어말고 또 어떤 기능이 있는지 도요. 그리고 어떻게 데몬을 잡으셨는지도 좀 알려주세요!"
거의 속사포와도 같은 속도로 알토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엄청난 반응에 다크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 같았다. 초 희귀 아이템 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데 어느 유저가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까. 더불어 욕심도 상당히 생기리라.
"글세요......"
이번에도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어가려던 다크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에 눈을 번뜩였다. 모든 유저가 욕심낼 만한 데몬 아머. 그리고 지금 그가 변신해 있는 딘 코렐의 엄청난 민첩성. 이 조합으로 인해 괜찮은 이벤트 아이디어가 떠올라 버린 것이다.
일명 '술래잡기 게임 이벤트'랄까. 대대적으로 이번 이벤트에 대해 알려버리고 불특정 다수의 유저들이 모두. 그리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게 한다. 다크가 술래가 되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면 그를 잡는 사람이 게임에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상품은 그가 입고 있는 데몬 아머! 이 정도 아이템이 걸린 이벤트 게임이라면 클리어 난이도가 무척 높아야만 하는데, 지금 다크의 민첩성은 거의 한계 수치까지 올라있다. 그런 그를 잡으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하고 약간의 운도 따라줘야만 한다는 말이다. 고로 당??난이도는 최상급이 된다.
"이거 정말 재밌겠는데?"
난데없는 중얼거림에 알토가 자신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다크는 환한 미소를 띄웠다. 많은 유저들이 참가하여 즐길 수 있는 대규모 이벤트이자, 다크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흥미진진할만한 놀이 거리...... 결론은 금새 나왔다. 이런 재미있는 일을 어찌 안 할 수 있겠는가.
다크는 벌떡 일어나 서며 알토에게 물었다.
"이 데몬 아머가 갖고 싶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알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엄청난 아이템을 갖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크는 웃으며 알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 이벤트에 참가하세요."
"네? 무슨 이벤트......?"
알토의 얼빠진 되물음을 간단히 무시한 다크는 얼른 분수대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면서 광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실제 목소리가 그렇게 클 리는 없으니 당연히 EM의 능력을 사용했다.
"모두 여기 주목하세요!"
광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말에 반 이상의 유저가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을 살피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크는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모두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선 이유는 다름 아니라 멋진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갑옷이 보이십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전 처음 보는 것일 겁니다. 바로 '데몬 아머'이니까요."
적절한 효과를 위해 다크가 이쯤에서 잠시 말을 끊자, 순간 광장에 있던 수백 명의 유저가 각기 다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로 인해 엄청나게 소란스러워졌지만 다크가 손을 들자 곧 조용해졌다. '데몬 아머'와 '멋진 제안'이라는 말의 위력이다.
"데몬 아머의 엄청난 물리 방어력은 다들 아실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물리 방어력만이 아니라 받은 공격 마법을 20% 확률로 시전자에게 돌려보내는 기능도 있습니다. 공격력도 그대로 보존한 채 말입니다. 이 기능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엄청나지요. 아, 지금 자랑하는 거캅諮? 물론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 설명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제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분께 이 데몬 아머를 획득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 말이 진행되자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다크에게 집중되었다. 더불어 쥐죽은듯이 조용해지기도 했다.
"획득하실 수 있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전 '시작합니다'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이 자리에서 도망가서 이 도시 어딘가에 숨거나 돌아다닐 겁니다. 그러면 절 쫓아오시거나 찾아내셔서 제 몸 아무 곳에나 손을 대시고 '잡았다'라고 말해주십시오. 바로 술래잡기 내기를 하자는 거지요. 시간 제한은 12시간. 그 안에 저를 잡지 못하시면 제가 이기는 것이고 절 잡으신 분은 데몬 아머를 소장하게 되실 겁니다."
당장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주로 '정말이냐?'와 '어떻게 믿나?'였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했기에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허나 다크는 그들의 의문을 대충 짐작하여 대답했다.
"제 이름은 딘 코렐. 승자에겐 깨끗이 상품을 양도할 것이며 지금 제가 한 말은 모두 진실임을 맹세하겠습니다."
굳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데몬 아머'라는 거대한 상품을 걸고 이런 내기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다. 다크의 민첩성에 대해 모르기에 하는 의심이다.
"믿지 못하신다면 저를 잡으러 다니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 절 잡으신 분은 세상에 다시 없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시는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 발은 무척 빠릅니다. 그러니 몸보다는 머리를 써서 함정을 파시든지. 정히 몸을 쓰시겠다면 보자마자 공격을 퍼부어 절 죽이시든지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절 잡으실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저도 공격당하면 때때로 반격도 할 것이며 결단코 잡히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쓸 예정입니다. 이 점 유의해 주시길."
여기서 말을 멈춘 다크는 주변을 휙 둘러보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수동 이벤트를 온 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시......"
당연히 '작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져 나올 것이라 생각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당장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다크가 광장을 벗어나기 전에 냉큼 잡아버릴 생각에서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보자 다크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함을 느꼈다.
"......작을 언제 할까요?"
우당탕!
다크의 말장난에 한껏 긴장했던 사람들이 성급히 달려나오다 와르르 자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