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휴가
여기서 잠시 숨어있기로 한 다크는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에 드러누웠다. 물론 건물들을 죄다 수색하고 있는 유저들로 인해 여기도 곧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 허나 잠깐 쉬어 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EM 다크님. 메시지가 하나 와 있습니다.]
난데없는 엠의 말에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다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엠. 내가 접속해 있을 때는 메시지 온 것 알리지 말라고 했잖아. 로그 아웃 하면 말해."
[네. 저도 그게 원칙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무척 긴급한 메시지라 바로 전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주 진영님입니다.]
다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영이 그에게 긴급하게 전할 말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엠. 메시지 열어."
곧 다크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 지원군! 당장 로그아웃해서 내 화상 연결 요청 받아 들여요. 정말 급한 일이니까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물어볼 것도 있고 확인할 것도 있고. 아무튼 지금 지원군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으니까 당장 나와요!
다크는 자기 때문에 난리날 일이 뭐가 있나 생각해 보았다. 이번 이벤트 때문일까?
"엠. 진영씨한테 메시지 보내."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이벤트가 있어서 로그 아웃을 할 수가 없습니다. 텍스트 메시지로 무슨 일인지 알려 주세요. 이상."
[전송하였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진영에게서 답장이 왔다. 엠은 물을 필요가 없다 판단되었는지 곧장 메시지를 열어서 다크에게 보여 주었다.
-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그러는 거예요? 지금 이벤트가 문제가 아니라고요! 엠은 뒀다 뭐에 쓸래요? 당장 맡기고 나와요!
진행 중인 이벤트까지 중단하고 나오라는 진영의 말에 다크는 약간 불안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스러워서다.
결국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잠깐 나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별 일 아니라면 곧 돌아와서 다시 남은 이벤트를 진행하면 되니까 말이다.
"엠. 딘 코렐 캐릭터를 네가 잠시 조종해라.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알지?"
[알겠습니다.]
엠의 대답을 들으며 다크는 바로 접속을 종료했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얼른 캡슐을 나온 지원은 곧장 책상 앞에 앉아 진영에게 화상 연결 요청을 넣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요청을 넣자마자 바로 진영의 얼굴이 책상 위에 떠올랐다.
"지원군! 대체 어쩌자고 그런 거예요!"
지원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진영에게 귀가 아프다는 듯한 포즈를 취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를 먼저 설명해줘야, 대체 어쩌자고 그런 건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태연한 지원의 대꾸에 진영은 평소와 다르게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말장난하지 마요. 지금 그런 것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타 회사에 에피소드의 정보를 팔았다는 것이 정말이에요?"
"에?"
지원은 자기도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돌려 말하는 것도 싫고. 거짓말도 싫어요. 제발 나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해줘요. 정말 지원군이 정보를 팔았나요?"
잔뜩 화가 난 듯한 진영의 표정에서 지원은 지금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아니, 왜 제가 정보를 팔았냐고 묻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냥 해본 말은 아닐 것이고. 뭔가 이유가 있겠죠?"
"난 지원군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지금 내 질문을 오해하지는 말아줘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지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자신의 말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진영은 알까? 믿고 있으면서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질문을 한다. 이건 믿고 있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 맞으니까. 이제 그만 묻고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시죠. 무슨 이유와 근거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시는 겁니까?"
진영은 지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 오픈 베타 테스트 첫날부터 버그를 일으키는 바람에 계속 주목을 받아왔던 해커들이 있어요. 그들의 목적이 에피소드의 이미지 추락이라 추측되어서 전부터 예의 주시해 왔답니다. 오픈 베타 때부터 갖가지 버그와 사고로 신용을 잃는다면 에피소드의 성공은 힘들 테니까요. 이건 경쟁사에서 새로 내놓은 신작 V.M.G를 망치기 위해 우리도 가끔 하는 짓이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에피소드의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정보를 파는 사람이 회사 내부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 왔었답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끊었던 진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 해커들과 지원군이 몰래 만나는 장면. 그게 찍힌 동영상이 오늘 증거로 제출됐어요."
쾅!
지원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 그게 무슨! 아, 젠장."
"진정해요. 지원군."
"...... 후우."
잠시 심호흡으로 북받치는 분노를 다스린 지원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정보를 팔았다는 누명을 썼다는 거로군요? 대체 어떤 녀석이 그런 거짓 증거를 제출한 겁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알아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동영상도 있고, 심증도 있어서......"
진영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히 징계를 받게 될 거예요'라는 말을 어떻게 지원에게 대놓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징계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지원군이 그런 것 아니에요?"
진영의 조심스런 질문에 지원은 화를 버럭 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아, 화내지 마요. 오해했나본데. 전 지원군이 안 그랬다고 믿어요. 하지만 몰래 만나는 동영상이 너무 확실해서......"
"그래서 진영씨마저 절 의심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녀요. 아녀요. 오해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 지원군을 믿어요. 믿는데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지원은 짜증이 팍 솟음을 느꼈다. 차라리 의심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 낫지. 억지로 아닌 척 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다.
"됐습니다. 그건 됐고. 몇 가지 부탁 좀 하지요. 그 증거라는 동영상 좀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그 증거를 제출했다는 인간이 누구인지도 좀 알아봐 주세요."
"아. 동영상은 지금 바로 전송할게요."
"그리고 이번 일이 지금 회사 전체에 다 퍼진 겁니까?"
"아뇨. 아직 일반 직원들에게까지 이 일이 알려지진 않았어요. 지금 부사장님이 넷으로 긴급 임원 회의에 참석하고 계신데. 저도 비서로서 참여했다가 지원군 얘기를 듣고 놀라서 얼른 빠져나온 거거든요."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좀 자세히 말해 주세요."
진영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이번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한 것은 김 도진 전무님이세요. 시작하자마자 그 분이 몇 가지 보고서들을 보여주며 해커들에 대해 설명했죠. 이건 임원들 대부분이 아는 이야기라 그리 설명이 길진 않았어요. 전부터 계속 주시해 왔으니까요. 그 해커들은......"
쉐자 돌림 파티가 저지른 갖가지 사건, 사고들부터 간략히 말해준 진영은 이어서 그들을 특별 감시했던 내용까지 설명을 마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 그리고 김 전무님은 그들과 내통한 직원이 있을 거라는 말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증거들을 꺼내놨답니다. 내부 인물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들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들이죠. 그 후 몇몇 임원들이 그 내통자에 대해서 묻자, 김 전무님은 회심의 미소를 痔맑潔楮? 전 조금 불안해졌죠. 전무님은 부사장님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진영은 김 전무가 말한 내통자와 해커들의 은밀한 만남에 대해서, 들은 그대로 지원에게 말해줬다. 이때 김 전무는 지원의 이름을 전혀 말하지 않은 채 '어느 EM'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전부터 약간의 혐의점이 보여서 감시했었다는 말을 덧붙였었다고 한다.
"...... 했는데, 김 전무님은 말끝을 슬쩍 흐리는 식으로 증거의 빈약함을 두루뭉실하게 넘겼어요. 그때 그게 지원군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다면 부사장님이야 어쨌든 저라도 나서서 그 두루뭉실함을 지적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그때는 그걸 전혀 몰랐거든요. 전무님이 지원군?이름을 말씀 안 하셨기 때문이죠.
어쨌든 그 해커들과 EM이 몰래 만나는 순간.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엔 접속되어 있지 않다고 표시되었다는 점을 전무님이 거듭 강조하셨답니다. 그건 분명 일종의 해킹일 텐데 EM마저 그렇게 된 것으로 봐서는 둘이 한 패가 분명하다는 뜻이죠. 그렇게 모?설명이 끝난 후. 김 전무님의 말에 넘어간 임원들 모두가 그 EM에 대한 혐의를 확신하고 화를 낼 때, 그제야 그 EM의 이름을 밝히며 동영상 증거를 보여주셨어요."
잠시 말을 멈춘 진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지원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지원군의 이름과...... 모습이었던 거예요."
지원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대충 상황이 파악된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런 오해를 받은 건지 말이다.
어제 만났던 그 버그 플레이어들. 쉐자 돌림 파티. 바로 그들과의 만남이 이런 누명을 쓰게 된 이유였던 것이다.
"뭐 이런 개 같은 일이......"
이를 바드득 갈며 중얼거리던 지원은 문득 든 의문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내통자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진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부사장님은 무서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계셨을 뿐.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제가 지원군에게 이 일을 묻기...... 아니, 알리기 위해 회의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지는요."
"그래요? 그럼 그 회의에서 제 혐의와 처분에 대한 결정은 내려졌습니까?"
"일단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가 확신하는 것 같았어요. 처분은 잘 모르겠네요. 그걸 상의하던 와중에 빠져 나와서요. 아직도 회의는 진행중이랍니다."
"......"
지원은 분노로 마비되어 가는 이성을 억지로 붙들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구상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자, 일단 진영이 전송한 동영상부터 살펴보았다.
해커들이 있는 곳에 지원이 도착하자마자 끊어지는 절묘한 동영상. 그들과 지원이 함께 선 모습은 단 3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이 때 지원의 접속이 종료되었다고 표시됐다는데,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대체 왜 그의 접속이 끊어진 걸로 나온다는 말인가? 그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말이다.
"이 것만 알면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텐데."
허나 지금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지원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것. 동영상의 출처는 꼭 좀 알아내자마자 알려주시고요. 회의에서 제 처분이 결정 나도 바로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회의 끝나면 아버지께 제가 좀 뵙자고 한다고 전해...... 아니, 끝나자마자 제게 달려오실 가능성이 높겠군요. 이건 그냥 두세요."
"알았어요. 그럼 난 다시 회의장으로 접속해 볼게요. 그리고......"
진영은 짐짓 밝게 웃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너무 걱정 말아요. 이번 일이 정말 누명이라면 제가 그걸 꼭 벗겨줄게요."
지원은 '당신이 무슨 힘으로?'라고 되묻고 싶었다. 사실 부사장의 비서라는 것 때문에 회사 내의 각종 정보에는 밝은 그녀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괜히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죠. 이만."
간단히 인사한 지원은 곧 화상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은 채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억울한 누명을 어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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