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휴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아직 지원이 별다른 해결책을 생각해 내지 못한 그 때에 서 승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당장 부사장실로 올라오라는 전갈이었다.
"지금 간다고 전해. 엠."
간단히 그렇게 명령한 지원은 곧장 부사장실로 향했다. 분명 그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이리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79층으로 올라선 그는 빠른 걸음으로 부사장실에 들어섰다. 물론 진영이 있는 비서실을 거치며 그녀에게 눈으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서 승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표정과 태도로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라."
그의 말대로 지원이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자 승익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네. 진영씨에게 들어서 대충은 압니다."
고개를 끄덕인 승익은 지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구나. 사실이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지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
승익은 말없이 지원을 쳐다보았다. 그 눈은 어서 사실을 말하라는 듯 했다.
"절 못 믿으십니까. 아버지?"
"......"
저 무언은 긍정인 걸까. 부정인 걸까. 지원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침묵을 지키던 승익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무척 느릿하면서도 힘있는 어조였다.
"널 믿어보마."
그러나 난데없이 뒤집어쓴 억울한 누명으로 인해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던 지원은 승익의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믿어 보시겠다니요. 그럼 그동안은 절 의심하고 계셨다는 거로군요?"
쏘듯이 그렇게 말해 버리고는 아차 싶었으나, 승익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냥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난 원래 너를 믿고 있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떠본 것뿐이지. 너처럼 영악한 녀석이 그런 바보짓을 할 리는 없지 않느냐. 만약 했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더 철저하게 했겠지."
지원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떠오름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아버지는 그를 믿는다. 그건 우울했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일이었다.
승익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 여의치 못하구나. 저쪽은 미흡하나마 증거를 들이댔는데 이 쪽에선 내밀 증거가 하나도 없다. 혹시 네게는 있느냐?"
곰곰이 생각하던 지원은 문득 엠을 떠올렸다. 엠은 항상 그와 함께 있었기에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혹시 엠의 증언도 증거가 됩니까?"
"엠? 그게 누구냐?"
"제 보조 A.I입니다."
승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보조 A.I는 자기 학습형 A.I이지 않느냐. 상황에 따라, 혹은 주인의 성격이나 지시에 따라, 거짓말이나 사기도 배우는 것들이라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그 A.I가 증언을 한다는 당장 비웃음을 사겠지."
그래도 약간이나마 기대를 했던 지원은 크게 실망했다. 그런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승익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것 같구나."
"네...... 아직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나중에는 생각난다는 거냐?"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 보면 하나쯤은 생각날 겁니다. 그 것이 증거든. 이 누명을 벗을 탁월한 방법이든. 아니면......"
잠시 말을 멈췄던 지원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복수든."
역시 이렇게 당하기만 하고 가만있을 지원이 아니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게 비열함과 사악의 극치를 달리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복수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그였다. 비록 그들에게 고의가 없었다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결심을 눈치챈 승익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말릴 생각은 없었다. 지원이 정말 누명을 쓴 것이라면, 그에 대한 복수는 정당하다 생각되었으니까. 게다가 말린다고 들을 그도 아니고 말이다.
그때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의문에 승익에게 시선을 돌린 지원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 처분에 대한 결정은...... 났습니까?"
승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원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물었다.
"해고입니까?"
하지만 승익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되려 질문을 던졌다.
"네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이번 일을 원만히 해결해낼 수 있겠느냐?"
조금 얼빠진 얼굴이 된 지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시간이라니요?"
"네 녀석이 아까 말했지 않느냐.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보면 해결책이나 증거가 나올 거라고. 그렇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아니냐."
그러고 보니 그런 뜻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익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잘됐구나. 안 그래도 네게 삼일간의 휴가를 주려고 했다. 휴가 기간 동안 잘 생각해 보고. 휴가가 끝나거든 증거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사직서를 가져오너라."
지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휴가를 주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게다가 사직서?
"어...... 제 처분은 조금 전 회의에서 이미 결정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휴가라니요?"
"결정은 났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할 시간을. 아니, 휴가를 주신다는 말씀이시죠?"
"네 녀석에게 자진해서 사표를 제출하게 하는 쪽으로 결정하면서 잠시 휴가를 주기로 했다. 네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는 거지. 그러니 휴가 기간동안 잘 생각해서 누명을 벗을 증거를 들고 오던지, 그렇지 못하게 되면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사퇴하거라."
지원은 순간 뒤통수가 짜릿해짐을 느꼈다. 자진해서 사표를? 그건 결국 해고라는 말이 아닌가. 사표를 안 내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바로 한직으로 좌천되리라. 그리고 차라리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무시와 푸대접을 받을 것이다.
"왜 자진해서 사표를 내게 하는 걸로 결정난 겁니까? 차라리 그냥 자를 것이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에게 사표까지 스스로 쓰라? 그거 대체 누가 낸 의견입니까?"
따지는 듯한 지원의 질문에 승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지원이 눈으로 재촉하자 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그냥 해고했다면 네 녀석이 가만히 있었겠느냐. 당장 넷홈에 글을 올리고 여론을 조종해서 시끄럽게 만들었겠지."
이때 지원은 자진 사표 제출 의견을 낸 것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낸 의견이냐는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는 의도적인 질문 회피, 그리고 전에 지원이 했던 저 협박을 알고 있는 것은 승익과 진영뿐이지 않은가. 다른 임원들이 저 이유를 대고 지원의 자진 사퇴를 요맨?리가 없는 것이다.
지원은 진한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십니까? 절 해고하라고 하신 것이? 그 것도 자진 사표 제출이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쫓겨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담담한 승익의 대답은 지원의 속을 더욱 벅벅 긁은 셈이 되었다. 그로 인해 지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그래서 부르신 거로군요. 믿는다고 하시면서 절 살살 달래놓고,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시면서 은근 슬쩍 도와주는 척 하고. 그래놓고 사표를 제출하라고 설득할 생각이셨던 거로군요? 그런 겁니까. 아버지?"
"......"
하다 못해 '아니다.'라는 단 한마디 만했어도 지원은 그냥 믿었을 것이다. 괜히 울컥해서 비아냥거린 것에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승익의 침묵은 마치 긍정을 표하는 것 같았기에 지원은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가 밉다고 느꼈다.
"무언은 긍정이란 말이 있지요."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말한 지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섰다. 그러면서 계속 말하기를.
"일단 삼일간의 휴가에는 감사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그 휴가동안에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사표를 쓰라는 뜻에서 주신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전 그 휴가를 제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쓸 겁니다. 삼일 후에 뵙지요."
상당히 건방진 태도로 그렇게 말을 끝낸 지원은 곧장 몸을 돌려 부사장실 문을 향해 다가섰다. 그렇게 지원이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 뒤에서 승익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뜻은 아니다."
지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승익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담담한 말투. 그러나 승익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약간의 흔들림이랄까. 그런 것이 보이는 것이다.
"네......"
지원은 쓰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부사장실을 나섰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는 서 승익을 뒤에 남겨둔 채.
"지원군......"
문 앞에서 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진영은 말없이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가려던 지원의 팔을 붙잡았다.
"부사장님이 하신 말씀은 지원군이 오해하는 그런 뜻이 절대 아니에요. 사실 이번 휴가도. 지원군이 이 일을 해결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서 시간을 주려는 목적이니까요. 곧 퇴직시킬 직원에게 휴가 따위를 왜 주겠어요. 그게 다 부사장님이 다른 임원들을 막 닦달하셔서 겨우 받아내신 기회라고요. 그러니까...... 읍?"
지원은 쓰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으려던 진영의 입을 막았다.
"이제 됐어요. 진영씨가 대신 변명 안 해줘도 됩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 못 들으셨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아닐 겁니다."
"에?"
진영은 조금 황당했다. 겨우 그 말 한마디에 오해가 풀렸다? 왠지 둘의 싸움이 보기 안타까워서 해명해 주려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진영씨에게 부탁 하나만 하죠. 다른 것이 아니라 동영상 출처를 아시게 되면 제게 알려 주세요. 또 다른 정보나 변동사항이 생겨도 좀 알려 주시고요. 휴가 때문에 사무실에는 없을 테니 메일로 부탁합니다."
살짝 윙크를 해 보이며 그렇게 말한 지원은 빠른 걸음으로 비서실을 나섰다. 이번엔 멍한 표정의 진영을 뒤에 남겨둔 채.
이제 누명을 벗기 위해 바삐 뛰어야만 하는 삼일간의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_-; (내기에는 절대 질 수 없다. 우오오~)
작가의 중얼 중얼
감격스럽습니다. 이 얼마만에 쓰는 잡담인가요?
아, 물론 뒷잡담을 두 번인가 붙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다 중요 소식을 알렸던 거였으니 제외입니다 -_-;
여하튼.
간만에 이렇게 독자님들께
직접적인 제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네? 이런 것 쓰지 말고 본편이나 빨리 쓰라고요?
으음. 제가 그런 말 나올 줄 알았습니다 -_-
그래도!
오래간만인데 좀 봐주세요 -_-;
챕터도 끝났고 요즘 매일 연재하지 않습니까아 -0-
험험. 그러면 봐주시는 걸로 알고 잡담 들어갑니다~
우선 제가 했다는 내기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번에 뒷잡담 남겼듯이
'미스치프'라는 판타지를 쓰는 작가와 매일 연재 내기를 했습니다.
정해진 규칙이라면 뭐. 매일 연재를 할 것.
물론 2연참을 하든 3연참을 하든 그건 관계없고요.
그냥 매일 글이 올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또 다른 규칙은 한 편당 A4 3페이지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걸린 상품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상당한 거금'이 걸렸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원래 좀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인데
이런 내기 같은 것이 걸릴 때면 상당히 불타 오르는 묘한 성격이기도 합니다.
고로, 제가 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
미스치프 작가가 중도 포기하지 않는 한.
E.M의 매일 연재는 계속 됩니다. 주욱~~~
(그러니 미스치프 작가가 계속 매일 연재를 지속하길 빌어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E.M과 내기를 진행중인 미스치프가
얼마전부터 조아라에도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저도 -_-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한다는 믿을 수 있는 소식이 있지요.
실제 성격과 실제 말투가 그대로 나와서 보는 저도 가끔 놀란답니다.
그 미스치프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고 작가들이기도 해요.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제목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미스치프 - 장난꾸러기죠.
99% 마법 실패 확률을 자랑하는 와일드 메이지 디아노이아.
이상한 베개를 목숨보다 아끼는 꿈꾸는 예언자(?) 로이니아
뾰족머리에 찌르기밖에 모르는 천재 검사...... 사악한 고양이
(이 녀석은 제 철천지 원수라 이름을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음. 실제로 원수임)
장난꾸러기 주인공 셋이 펼치는
해괴망칙(?), 명랑발랄한(?) 모험과 사건, 사고들입니다.
궁극 실험 판타지라고 그 작가는 주장하지만 전 궁극 염장 판타지라고 부른답니다.
뭐. 내용 중에 염장을 지르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 작가가 평소에 제 염장을 많이 질러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어쨌든 상당히 독특한 판타지이니 한번씩 가서 보세요. 꼭!
작가명은 [淸狼]狂想哭
작품명은 미스치프 (Mischief) 랍니다.
에.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음.)
......
어쨌든 독자 여러분. 로또 대박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길.(말 돌리기-_-;)
그럼 본편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