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쉐자 돌림 파티
2178년 11월 5일 오전 6시.
지원은 가정용 A.I의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말씀하신 6시 정각입니다. 지원님.]
"그래......"
간신히 대답하고 일어나 앉은 지원이지만, 그는 아직도 상당히 몽롱한 상태였다. 약간의 저혈압 증상이 있었기에 언제나 잠에서 깰 때면 한동안 멍한 상태가 지속되곤 했던 것이다. 차라리 밤을 꼬박 새우면 새웠지. 그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라 할 ?있다.
그래도 지원은 약간의 짜증을 애써 참으며 멍한 정신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그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것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야할 일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원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찬물."
과거에나 지금이나 차디찬 물만큼 잠을 깨우는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물론 난데없이 확 뒤집어쓰는 경우가 그렇지만, 간단한 찬물 세수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볼 수 있다. 지원은 어디선가 들은 그 얘길 기억해 내었고 그래서 찬물을 요구한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지원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인 A.I는 가정부 로봇을 움직여 지원의 앞에 찬물을 대령했다. 약간 문제점이 있다면 큰 대야에 담긴 세숫물이 아니라, 마실 물을 작은 컵에 담아 왔다는 것이다. 요즘은 물로 세수를 하는 사람이 없기에 벌어진 A.I의 오해라 할 수 있다.
"......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거냐?"
순간 황당해진 지원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A.I는 즉각 반응을 보여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피식 웃으며 명령을 정정하려던 지원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 느낀 강렬한 황당함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잠이 깼던 것이다.
"아냐. 그냥 혼잣말이다."
[네. 그냥 혼잣말이십니다.]
"......"
지원은 오묘한 언어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하급 A.I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정신이 또렷해지자 어제 잠들기 전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하나 떠올랐다.
어제 늦은 오후. 아버지와의 대화를 끝마친 지원은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었다. 그리고 진행 중이던 술래잡기 이벤트를 완전히 엠에게 맡기고, 자신의 모든 업무를 보류 처리해두었다. 엠은 그가 왜 그러나하며 의아해했으나 휴가라는 말을 듣고는 쉽게 수긍했다. 너무 갑작볜눼募?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의 주인이 그리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무실을 대충 정리한 후, 필요한 몇몇 자료들을 챙겨서 집으로 향했던 지원.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콕 틀어박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었다. 그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그가 해야할 일들을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지원이 긴 시간을 들여 생각한 결과. 누명을 벗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결국 생각해 내게 되었었다. 사실은 그렇게 오래 생각했다고 하기도 부끄러운 간단한 방법이다. 그냥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된 놈들을 잡아 족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바로 쉐나, 쉐인, 쉐반. 이들은 그들에게 정보를 판 진짜 범인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 잡아서 협박을 하든 협상을 하든지 해서 순순히 불게 만들면 끝나는 일인 것이다. 이 간단한 해결책이 처음부터 생각이 안 난 것은 지원이 누명 벗기보다 복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다.
"대충 준비해서 얼른 나가야겠군."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후닥닥 샤워실로 향했다. 쉐자 돌림 파티가 출근하기 전에 얼른 쳐들어가서 놈들을 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퇴근한 후에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단 삼일뿐인 휴가를 그렇게 느긋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이 범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지원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는 없겠지만. 세상에는 '혹시'라는 단어가 있다. 고로 이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다른 방법을 구상하고 실행할 시간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였다.
얼마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원은 자신의 커다란 옷장을 활짝 열어 젖혔다. 첫 만남도 아니고, 예의를 차리면서 만나야할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과 원활한 협상-협박일 가능성이 높다-을 이루기 위해선,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지원이었다. 큰 영향은 못 주더라도 신경 써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밀리터리 복장 같은 것을 좀 사둘걸."
지원의 옷장에는 상당히 얌전한(?) 옷들만이 가득했다. 그의 어머니 취향이자 지원의 취향이기도 한 깔끔한 캐주얼과 정장뿐이라는 얘기다.
"그나마 캐주얼보다는 정장이 낫겠지."
지원은 대충 살피다 차이나 스타일의 날렵해 보이는 검은색 정장을 선택해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선 그는 어머니가 자고 있을 안방을 신경 쓰며 조용히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는 단출했다. 양옆의 벽을 꽉 채우며 늘어선 책장에는 오래된 고서적들이 가득 꼽혀있고, 중앙에는 골동품인 커다란 목재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고풍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단아한 공간이랄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서 승익이 여기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기에, '아버지의 서재'라는 표현은 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주로 사용하느냐 하면 그 것도 아니다. 이 집안 사람들은 넷과 친하지. 책과는 절대 안 친한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 지원이 왜 여길 몰래 들어선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중앙에 놓인 책상의 뒤편, 문에서 보면 정면에 위치하는 벽에 있다. 그 벽에는 서 승익이 선물 받은 몇몇 장식품(?)들이 고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일본도들. 모두 다 유명 장인이 만든 진검들이다.
"무기는 무기로 써야지. 왜 장식품으로 썩히는지 몰라. 도가 울겠다. 울어."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본도 중 하나를 끄집어 내렸다. 오늘 이 도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오랜만이라 조금 어색하지만 못 휘두를 것도 없겠군."
어렸을 적에 익힌 검도를 떠올리며 일본도를 뽑아 두어 번 휘둘러본 지원은 짙은 살기가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살인이라도 저지를 생각인지...... 워낙 독특한 성격이라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 할 것 같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두고 보면 알 일이고.
다시 일본도를 도집에 넣어 잘 챙겨든 지원은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막 책상 옆을 지나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10cm 정도쯤 열린 책상 서랍이었다.
물론 그냥 열려 있기만 한 것이라면 지원의 시선이 멈출 리 없다. 하지만 그 열린 책상 속에서 끄트머리만 빠끔히 보이는 물건. 그 것은 지원의 시선만이 아니라 발걸음마저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 이건 설마......"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 서랍 속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차가움과 묵직함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존재. 일명 리틀 머더러(Little Murderer:작은 살인자)라 불리는 소형 레이저 건이다. 손가락 끝에 스치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손 전섟?날아가 버리는 극악한 무기가 바로 이 놈인 것이다.
이 리틀 머더러로 말하자면, 군이나 경찰 특공대, 대형 조직 폭력단이 즐겨 사용하는 가장 흔한 대인 살상용 레이저 무기랄 수 있다. 넷에 가면 이 리틀 머더러의 사진이 널리고 널렸기에 지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무기다.
허나 흔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둠의 세계나 군, 경찰에서의 이야기, 일반 가정집에 존재하고 있을 물건은 절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판매와 제조가 금지된 물건이니 말이다.
만약 이 리틀 머더러를 가지고 있다가 검, 경찰에 걸릴 경우, 30년 이상의 징역이 아주 확실할 정도로 이에 대한 법률은 엄중하다. 게다가 이걸로 상해 사건이라도 일으키거나 일으키려는 시도를 할 경우에는 바로 사형이다.
"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것을 이런 데다 두시나. 게다가 이걸 어떻게 구하신 거지? 발 넓으신 것은 알지만 암거래상 하고도 아는 사이신가?"
지원은 이 리틀 머더러의 용도와 출처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머릿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양손의 두 무기를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갈등했다.
애초에 목적했던 일본도를 가져가느냐. 우연찮게 발견한 리틀 머더러를 가져가느냐.
협박성 용도로 사용하려면 역시 리틀 머더러쪽이 훨씬 유리하다. 들고 있는 그도 약간 질릴 정도인데 이 것에 겨누어 지면 어떤 느낌이겠는가. 또 아예 그들을 죽여버리고자 한다 해도 역시 이 리틀 머더러 쪽이 좋다. 잘만 겨눠서 발사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하고 죽일 수 있으니까. 또 시체도 안 남을 거다.
하지만 만약 일이 틀어지거나 꼬이면, 이 리틀 머더러는 당장 지원의 찬란한 미래를 막는 죽음의 사신이 되고 말리라.
그에 비해 일본도는 적당한 위협성과 공격력, 그리고 안정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상해 사건을 일으키더라도 검, 경찰과의 약간의 협상-여기서는 뇌물과 일맥상통하는 말-으로 풀려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리틀 머더러로 손가락을 녹여 버리든, 일본도로 손가락을 잘라 버리든, 똑같이 회생 가능한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뒤에 닥쳐올 결과는 전혀 다르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끄응......"
일본도와 리틀 머더러를 번갈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지원은 결국 결론을 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둘 다 가져가자. 안 들키면 장땡 아니겠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중립을 취한 지원. 하지만 리틀 머더러를 가져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상황에나 사용하지. 처음엔 그냥 일본도를 주인공으로 쓸 예정인 그였다.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사형'이라는 이름의 살해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간단히 갈등을 해소해 버린 지원은 리틀 머더러를 뒤쪽 허리춤에 찔러 넣고 상의로 잘 가렸다. 그리고 일본도를 손에 든 채 조용히 서재를 나와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