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잘못 건드린 대가
2178년 11월 8일 오전 10시.
전혀 반갑지 않았던 3일 간의 휴가가 끝난 날.
말끔한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지원은 (주)테이머 본사 건물 옆의 작은 공원에서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지난 이틀 간 그의 부탁의 탈을 쓴 명령에 따라 모종의 준비를 했을 쉐자 돌림 파티다.
"이 녀석들 때문에 나까지 지각하겠군. 뭐, 상관없나?"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긴 하지만, 오늘 같이 특별한 날은 지각 한번쯤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다. 근무를 위해서 출근하는 날이 아니라, 속 시원한 복수극을 벌이기 위한 날이자 그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는 날이니 말이다.
그렇게 20여분 정도가 흐른 후에야, 지원은 공원 입구 쪽에서 헐레벌떡 그를 향해 뛰어오는 네 남녀를 발견했다. 커플 룩이라도 맞춰 입은 듯 죄다 똑같은 가벼운 캐주얼 차림의 쉐자 돌림 파티와 지원이 처음 보는 회색 정장 차림의 20대 중반 남자 하나였다.
하지만 지원은 금방 그 회색 정장 남자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 여기에 쉐자 돌림 파티와 함께 올 사람은 단 하나. 지원이 쓴 누명의 실제 범인인 김 원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 헌이 가장 먼저 지원의 앞에 도착했고, 그 뒤를 이어 제갈 수련과 우 대현이, 가장 마지막으로 김 원기가 도착했다.
그런데 사과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없이 웃기만 하는 지원의 모습에 쉐자 돌림 파티는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그들이 아는 지원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아주 괴팍한 놈이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어제 밤을 꼬박 새우는 바람에 아침에 잠깐 잠들어 버려서......"
대표로 나선 수련이 조심스럽게 변명을 하며 다시 사과를 건넸지만 지원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행동을 했다. 성큼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다짜고짜 김 원기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것이다.
퍽!
"크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김 원기가 얼굴을 감싸며 뒤로 쓰러졌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직통으로 얻어맞은 것이다. 금새 벌겋게 된 그의 눈가. 시간이 좀 지나면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버리리라.
"왜. 왜 이러시는지?"
울상이 된 원기의 물음에 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냐?"
원기는 아픈 눈가를 문지르며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대략 짐작은 한다. 자신 때문에 그가 누명을 썼다는 얘기는 여기 오기 전에 쉐자 돌림 파티에게 이미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모종의 계약까지 체결한 사이인데 아무리 화가 난다해도 이렇게 다짜고짜 패다니.
"아. 압니다만. 이미 그 것에 대한 얘기는 끝난 것으로 아는데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피식 웃은 지원은 상의 안 주머니에서 신원 확인을 위한 특수 촬영 장치까지 달려있는 휴대용 넷 접속기를 꺼내들었다. 몇 번의 조작으로 미리 준비해두었던 계약서가 화면에 떠오르자, 그걸 원기에게 내밀며 말했다.
"넌 계약에 동의만 했을 뿐. 아직 인증을 안 받았잖아.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인증을 받아라."
지금 지원이 넷 접속기로 불러온 계약서는 정부의 공식 인증을 받는 계약서다. 계약서 자체가 암호화되어 정부 서버에 보관, 보호되는 것인데. 가장 믿을 수 있고 또 절대 어길 수 없는 계약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조항을 위반하는 즉시 법적 처벌이 가능하며, 처벌에 대한 조항?계약서에 명시했을 경우, 그대로 처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언젠가 오천 만원에 대한 차용증을 썼던 누군가는 제 날짜에 돈을 갚지 않을 경우 기꺼이 사형 당하겠다고 써둔 적이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돈을 갚지 못했고, 정부는 진짜 그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전례가 있다. 그래서 소심한 사람들은 절대 이 정부 인증 계약서로 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워낙 수수료가 비싸서 넉넉한 형편이 아니면 힘들기도 하다.
"이. 이건......"
원기는 정부 인증 계약서라는 것을 알자마자 재빨리 계약 위반시의 처벌 조항부터 살폈다. 그것을 눈치챈 지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계약 위반을 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특별히 신경을 써놨거든?"
지원의 말에 약간 겁을 먹은 원기는 계약서 하단의 계약 위반에 대한 조항을 보고는 파랗게 질렸다. 바로 최고 형벌인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사형도 아니다. '화형'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의 사형 제도는 약물 주사 한방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삶을 끝내 준다. 그런데 화형이라니. 그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사라져서 이제는 역사책에나 나오는 사형 제도다. 그런데 그걸?
"마. 말도 안 되는 조항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원기의 멱살을 틀어잡은 지원은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말했다.
"계약 위반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잖아? 아니면 상황 봐서 계약을 위반할 생각이신가?"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뭐? 그래도 네 친구들이 너까지 구해달라고 해서 계약하자는 거지. 너 빼고 재들만 챙겨도 난 아무 상관없어. 오히려 더 편하지."
거기까지 말하고 멱살을 놔준 지원은 계약서를 도로 받아가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난 너랑 계약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하든 말든 네 맘대로 해."
원기는 망설였다. 계약을 거부하고 그냥 돌려주느냐. 아니면 인증을 하고 돌려주느냐. 어떻게 하든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계약을 해야만 감옥에 안 가고 재취업 자리가 보장된다는 것. 게다가 그 재취업 자리는 고달프고 힘든 것이 확실하지만, 수입만큼은 상당히 안정적이고 크다.
원기의 망설임은 곧 끝났다. 그는 돈이 필요했고 또 감옥에는 가기 싫었다.
"계약하겠습니다."
지원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내민 손을 거뒀다. 별 필요도 없는 놈이라 내심 거부하길 바랬건만.
"계약 내용은 알지?"
"네. 헌에게 미리 얘기 들었습니다."
"그럼 계약서 살펴보고 인증 받아."
"네......"
원기는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살펴다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발견했어도 차마 지원에게 뭐라 말하진 못했다. 어쨌든 상황의 주도권이나 모든 결정 권한이 다 지원에게 가 있었으니까.
얼마 안 있어 읽기를 마친 원기는 계약서 하단의 빈 공간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눌렀다. 그러자 약간 금속성이 섞인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CO7530115번 계약서입니다. 모든 조항을 확인하셨습니까?]
원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계약에 동의하십니까?]
"응."
[지문으로 확인된 신원은 김 원기님입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상단의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대주십시오.]
인증은 순서대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얼굴 확인부터 망막 인식. 손등의 정맥 인식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본인 확인을 마친 후에야 계약 완료 메시지가 나왔다.
[서 지원님과 김 원기님의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계약서는 CO7530115번이며 본인 확인이 가능한 접속기면 어느 것에서나 열람이 가능합니다. 단, 사본 발급을 받으시려면 각 구역의 구청으로 본인이 직접 방문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내가 끝난 후 180초. 즉 3분 후부터는 이 계약서의 수정이나 무효화가 절대 불가능합니다. 수정하시거나 취소하시려면 그 안에 말씀해 주십시오. 카운트 시작합니다. 179. 178. 177. 176......]
지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원기에게서 단말기를 도로 거둬가며 말했다.
"이제 할 건 다 했으니 슬슬 들어가자. 헌. 내가 말한 것들은 다 준비됐지?"
헌은 말없이 들고 왔던 새까만 서류 가방을 지원에게 넘겼다.
"좋아. 가자."
지원이 앞장서서 (주)테이머 본사 건물로 향하자,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원기까지 계약서를 체결함으로써 그들 4명은 공식적인 지원의 수하가 된 것이다. 물론 지원의 수하라고 해서 테이머 사의 직원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맺은 계약은 지원 개인에 한한 것이니, 일종의 개인 고용인이라 할 수 있겠다. 보수는 주지만 그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워서 거의 노예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원과 그의 일당(?)은 당당하게 (주)테이머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서 지원님. 김 원기님.]
1층의 안내 A.I는 원래 테이머 사의 직원인 지원과 원기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 옆의 세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 분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 손님이다."
지원이 그렇게 말하자 A.I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쩝. 남의 회사에 다 들어와 볼 줄이야."
나직한 대현의 중얼거림에 지원은 그를 흘깃 돌아보고는 곧장 고속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다들 그의 뒤를 따랐고, 그들은 79층의 부사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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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거기 연재가 더 빠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