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잘못 건드린 대가
승익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충분하냐고? 물론 충분하다. 지원이 말한 자료들은 에피소드의 서버와 시스템을 보다 완벽하게 보완해낼 수 있는 정말 귀중한 정보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쉐자 돌림 파티들을 경찰에 넘겨봐야 (주)테이머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음은 물론, 오히려 손해만 본다. 유저도 아닌 회사 서버가 해킹을 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유저들의 신뢰가 뚝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쪽이 보다 나은 선택인지는 뻔하다.
"보안 취약점이야 침입해 봤으니 당연히 알 테지만, 정말 그들이 에피소드의 시스템 오류와 버그를 분석했단 말이냐?"
"플레이하는 틈틈이, 그리고 서버에 침입해 시스템을 조작하면서 버그나 오류가 보이는 족족 메모해 두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런 묘한 버릇이 생겼나 봅니다. 그 메모의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 이 70여장의 버그 레포트죠."
"진짜 70장이란 말이냐? 아! 설마 200자 원고지 70장?"
"용지로 따지자면 A4로 70여장입니다. 정확하게는 72장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작성 시간이 부족해서 72장밖에 못 쓴 것뿐, 원래 지원이 요구했던 분량은 100장이었다. 좀 과할지는 몰라도 그래야만 결과가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약서'라는 족쇄로 인해 그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쉐자 돌림 파티. 지난 삼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던 그들에게 잠시 묵념을......
"으음. 네 말이 모두 사실이고, 그 자료들이 확실한 것이라면 분명 거래가 가능하구나."
"네. 그러니 잘 설득해서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료들은 거래가 성사되는 즉시 전송되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지원을 바라보는 승익의 눈빛은 따스했다. EM활동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역시 일 처리 방식은 독특해도 결과만큼은 언제나 훌륭한 그의 아들이라 생각해서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는지는 모르지만, 누명도 벗고 회사에도 이익을 가져다 주는 지극히 좋?결과가 아닌가. 물론 승익이 이번 일의 '진짜 과정'을 안다면 전혀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좋다. 이 거래와 네게 씌워진 누명에 대한 일은 내게 맡기거라. 아주 말끔히 처리해주마."
승익의 호언장담에 지원은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차츰 그 미소가 음흉해졌다.
"아버지. 누명은 몰라도 거래에 관련한 것은 최소 2시간쯤 후에 해주십시오. 그때쯤이면 아버지를 도울 사람이 생길 겁니다."
"뭘 돕는다는 게냐?"
"제 누명이야 당연히 벗겨지겠지만 거래는 혹시 모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혹시나 어느 머리 나쁜 임원 중 하나가 손익 계산을 못하고 반대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를 도와 거래를 성사시킬 사람을 하나 만들 예정입니다."
사실 이 것은 제 복수를 하면서 뒤따라오는 옵션이지요...... 라는 뒷말은 쏙 빼먹은 지원이었다.
"그게 누구냐?"
"후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승익은 지금 지원의 미소가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의 착각이려니 하며 무심코 넘겼다.
"나에게도 비밀로 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버지를 놀라게 해드리려는 귀여운 아들의 깜찍한 재롱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 뒤의 이상한 말은 그냥 잊겠다."
"이 착한 아들의 진실한 모습을 몰라주시다니. 정말 섭섭합니다. 아버지."
"미안하지만 아들아. 몰라주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외면하는 거란다."
"......"
재치 있는 대답을 떠올리려 노력하던 지원은 결국 대꾸를 포기했다. 전혀 생각이 안 나서다.
"제가 졌습니다."
지원은 손을 들어 항복을 선언했고 승익은 당당한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 재미있는 부자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잠시 후, 쉐자 돌림 파티와 김 원기를 승익에게 맡긴 지원은 홀로 부사장실을 나섰다. 그의 누명을 벗기는데 필요한 증인들이자 거래의 당사자이니, 그 대신 그 일들을 해줄 승익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했다.
"이제 난 내 할 일을 해야지~"
지원이 할 일. 이 것은 남이 대리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직접 해야 만족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바로 그에게 누명을 씌운데 대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복수 대상 목록은 이미 진영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뽑아 놓은 후이기에 우선 순위만 선택하면 되었다.
"자, 그럼 누구부터 찾아가 볼까."
고속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지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복수 대상 목록에 오른 이름은 총 7명. 그 중 4명은 쉐자 돌림 파티와 김 원기지만, 앞으로 두고두고 착취해 먹어야할 대상이기에 지금의 복수에선 제외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3명인데. 지원을 감시, 조사하고 또 증거 동영상을 촬영해서 보고한 제 1 이벤트 관리과의 김 진혁 과장이 그 첫 번째요. 지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증거로 허위보고를 올린 운영부의 임 동원 부장이 그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임원 회의에서 교묘한 화술로 지원을 범인으로 몰아간 김 도진 전무가 세 번째 복수 대상이었다.
"역시 위쪽에서부터 치고 내려가는 것이 낫겠지? 괜히 아래부터 치고 올라가다가는 위에서 알아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한 지원은 김 도진 전무의 사무실이 69층에 있음을 기억해 내며 바로 이동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지원이 비서실로 들어서자 김 전무의 비서인 상급 A.I 썬이 그를 인식하고 물었다.
"전무님께 제 2 이벤트 관리과 과장인 서 지원이 잠깐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시군요. 일단 말씀은 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거린 지원은 비서실 중앙의 소파에 기대섰다. 얼마 안 있어 썬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업무가 바쁘신 관계로 만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다음에 미리 약속을 정하시고 와주시기 바랍니다.]
김 전무로선 지원을 만나야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한 거절이다. 곧 퇴사할 사람이라 확신하기에, 또 징계를 취소하거나 변경해 달라고 조르면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미리 예상 못할 지원이 아니기에 그는 담담했다.
"이 소현양에 대한 이야기이니 꼭 만나봐야 할 것이라고 다시 전해봐."
[죄송합니다만 이미 거절......]
지원은 썬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말했다.
"당장 전해."
[하지만......]
"다시 거절하시면 그냥 가겠다. 그러니까 일단 전하기나 해봐."
[알겠습니다.]
상급 A.I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던 썬은 냉큼 지원의 말을 김 전무에게 전했다. 그러자 당장 김 전무의 명령이 번복되었다.
[지금 서 지원 과장님을 만나시겠답니다.]
씨익 웃은 지원은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전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전무실은 서 승익의 부사장실과 달리 무척 넓고 화려했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양탄자는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새하얀 벽과 대비되었고, 벽에는 원색 계열의 그림들이 군데군데 걸려 강렬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사무실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동양용 조각상은 완전한 순금이었다.
어찌 되었든 사무실을 보면 그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법. 지원은 김 도진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랄까. 고로 더욱 부담 없이 괴롭혀 주리라 다짐하는 지원이었다.
"처음 뵙는 걸까요?"
창가 쪽 책상 앞에 앉아있던 김 전무에게 성큼 다가선 지원은 전혀 정중하지 않은 태도로 그렇게 인사했다. 허나 김 전무는 인사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무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서 과장이 어떻게 소현이에 대해서 알지?"
지원은 지독히도 싸늘한 미소를 띄웠다.
"그런 사소한 것에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제가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니 말입니다."
--- 눈이 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