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61화 (61/74)

7. 잘못 건드린 대가

내심 찔리는 것이 있던 김 전무는 책상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며 일어섰다.

"정말 듣던 대로 건방진 놈이로구나!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그게 무슨 헛소리냐!"

하지만 지원은 김 전무가 소리를 지르던 춤을 추던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사무실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를 발견하곤 거기 걸터앉았다. 아주 건방진 태도로 다리까지 척 꼬면서 말이다.

"제가 건방지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듯 하니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겠지요?"

김 전무는 기가 막혔다. 지원이 뭘 믿고 저리 시건방진 태도를 고수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징계를 약화시켜 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어야 정상이지 않은가? 그가 누명을 벗을 방법을 마련해 놨다는 것을 모르는 김 전무이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

막 말을 잇던 김 전무는 문득 느껴진 약간의 불안함에 말을 멈췄다. 지원이 이 소현의 이름을 말한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는 그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김 전무는 애써 화를 속으로 삭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소현이에 대해 주변에서 주워 들은 소문만으로 그렇게 당당한 거라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

"아, 그 소문은 저도 언뜻 들었습니다. 전무님의 아드님께 이 소현이라는 어린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었죠?"

"그래. 그 일이 그다지 좋은 소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게 흠이 되거나 할 소문도 아니다. 그 애의 나이면 법적으로도 결혼이 가능한 나이니까. 그런데 넌 소현이에 대해 뭘 알기에 그 애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거냐?"

피식 웃은 지원은 헌이 건네줬던 서류 가방을 열어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대현과 수련이 죽어라 버그 레포트를 쓰는 동안 헌이 김 전무에 대해 조사해낸 결과 보고서였다. 지원이 휴가 기간 동안 모자란 잠이나 보충하며 편히 보낼 때, 쉐자 돌림 파티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어라 일만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김 전무님의 비서 A.I는 상급이더군요. 그래서 조사하기도 힘들고, 또 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전무님의 자택을 관리하는 하급 A.I 데이터를 좀 뜯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것이 참 많더군요? 특히 아드님에 대한 것들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지원의 신조 중 하나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다. 하다 못해 그 자신도 좀 털면 별의별 범죄 사실이 다 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복수할 대상에 대해 뒷조사를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 약점을 잡고 그걸 이용해 먹는데 주저할 리가 없는 그다.

"뭐가 재미있단 말이냐?"

김 전무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멍청한 아들 녀석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어 불안해 미칠 지경인 그였다.

"뭐. 제가 유능한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훔쳐볼 수 있었던 것은 메일함과 메시지함 정도인데. 전무님의 자택 관리 A.I에겐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그냥 남아 있더군요. 데이터 포맷 좀 자주 하셔야할 것 같지만 이건 알아서 하실 테니 굳이 조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茱?본 것 중에서 사소한 탈세 같은 것들은 제쳐 두고......"

탈세가 사소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김 전무의 속을 벅벅 긁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지원이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중에서 이 소현양과 김 세진군이 주고받은 애절한 사연의 메일과 메시지 데이터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간혹 김 전무님이 이 소현양에게 보내신 메일도 있던데, 그 것도 참 재미있게 봤답니다."

흡혈귀에게 피를 몽땅 빨리기라도 한 걸까. 김 전무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지원의 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빼먹었군요. 김 전무님께서 후배라 불리는 몇 명에게 맡긴 이 소현양에 대한 처리가 완료됐다는 메일 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집의 아가씨가 아드님과 사귀는 것이 못마땅하다 해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17살밖에 안 된 低?아가씨였지 않습니까."

전의 말이 레이저 건이었다면 이번 말은 폭탄이다. 김 전무는 부들부들 떨며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 일은 치부 중의 치부. 절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비밀이기 때문이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시치미를 떼기로 하신 겁니까? 별로 현명한 대처 방법이 아니군요."

지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김 전무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전무의 책상 위에 던졌다.

"한번 보시죠. 그 메일들의 사본입니다."

종이 뭉치로 힐끔 시선을 던졌던 김 전무는 절망했다. 이 소현에 대한 처리를 의뢰할 때는 비밀 유지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었는데, 결과 보고에 대한 보안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작은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한 사고로 처리되었다는 것에 너무 안심한 탓이리라. 또 하필 지원을 건드렸을 때 그 결과 보고가 올라왔다는 것이 김 전무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라 할 수 있겠다.

"워. 원본은 어디 있느냐?"

김 전무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장 먼저 그 것부터 물었다. 지원을 잘 구슬려서 원본을 얻어낸 뒤 삭제하고, 그까지 암중 처리해 버리려는 생각에서다. 가진 바 지위와 명성, 부까지 한꺼번에 잃을 수 있는 이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덮어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본 지원은 한심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행동 패턴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인지.

"그걸 제가 말하리라고 보십니까? 친구들에게 맡겨 두었으니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시죠.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친구들은 당장 그걸 들고 경찰을 찾아갈 겁니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 그러니까 원본을 내게 다오."

"하! 제 형편이 그렇게 쪼들려 보이십니까? 꼭 이 소현양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전 그녀와 다르게 돈이라면 쓸데가 없어서 걱정일 만큼 있습니다."

"그럼 EM으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 거냐? 내 당장 이번 버그 플레이 사건을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그리고 또. 아! 승진? 혹시 승진을 원하느냐?"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쯤은 제 능력으로도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요."

김 전무는 너무 초조해서 속이 새까맣게 탈 것 같았다. 이 것도 안 되고 저 것도 안 된다니. 앞에 서 있는 지원을 확 씹어 먹고만 싶어진다.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원본만 내게 준다면 뭐든지 해주겠다!"

"꼭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 말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도는 붙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마!"

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꽤나 영리해서 이리 저리 머리를 쓰는 것은 좋은데, 정작 필요한 행동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김 전무가 한심해서다.

"후, 정말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보군요. 지금 전무님이 뭘 당하고 계신지 모르시겠습니까? 전 지금 협박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협박을!"

누가 협박이라는 것을 모르나? 김 전무는 지원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평생 남의 위에 군림하며 명령만 해온 사람이라는 티가 역력하다.

지원은 더 이상 그가 알아서 하기를 바라지 않고, 직접 이런 상황에서의 행동 요령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다. 역시 너무나도 친절하고(?) 남을 위한 배려(?)가 철철 넘치는 그다.

"잠깐 좀 일어나 보시죠."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한 아주 약소한 우대로 반말은 하지 않는 지원이었다.

"어? 그. 그래."

김 전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섰다. 그러자 지원은 냉큼 그를 옆으로 밀치더니 자기가 떡 하니 그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척 하고 꼬며 전무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협박당하는 사람은 편안히 앉아 있고. 협박하는 나는 다리 아프게 서 있고. 뭔가 이상한 구도였다는 생각 못하셨습니까?"

그제야 김 전무는 지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치부가 공개되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기라는 거다. 하긴 이 상황에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 미안하네. 미처 생각을 못했군."

사과하면서도 속으론 이를 북북 가는 김 전무. 자존심을 버리고자 마음먹었다 해도 한참 어린데다 부하 직원이기까지 한 지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던 말던. 아니, 아예 그 속을 더욱 벅벅 긁어 놓으려는 지원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이제야 뭔가 깨달으신 모양이군요. 바로 그런 것이 현명한 대처 방법이죠. 지금까지는 너무 멍청하셨어요."

멍청했다니?! 당장 지원의 밉살스런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김 전무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지원에게 잘 보여서 메일의 원본을 얻어야 하는 이상 별 수 없다.

"그. 그런가? 허허."

하지만 지원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네. 더불어 제 앞에 무릎 정도는 꿇으셔야, 상황이 더욱 좋게 이어져 나갈 수 있답니다."

김 전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게 무슨?"

"음? 설마 거부하시지는 않겠지요? 뭐. 거부하셔도 전 상관없습니다. 이 메일 내용들을 공개해서 제가 손해볼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

말없이 얼굴만 붉히고 있는 김 전무를 보며 지원은 웃었다. 아주 싸늘하게.

"잘도 제게 누명을 씌우셨으니 그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하셔야지요. 웬만한 것으론 만족 못하니 어서 무릎 꿇고 비시죠?"

"......"

자존심과 치부에 대한 무게를 굳이 재보지 않더라도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지는 뻔하다. 김 전무는 입술을 깨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하다."

"음. 안 들리는데요?"

"미. 미안하다고!"

지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런. 아직도 현명하지를 못하시군요. 굳이 제가 말 예쁘게 하라고 말씀드려야만 합니까?"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남을 느끼며 김 전무는 작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는지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 전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죄. 죄송합니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지원은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말도 더듬고 꼬리도 질질 끌긴 하셨지만, 저야 워낙 마음씨가 넓으니 그냥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면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아아, 이 얼마나 통쾌하고 속 시원한가. 지원은 지극히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 메일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몇 가지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그 자세 그대로 들으시길."

지원은 굴욕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 전무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첫째. 앞으로 저와 제 주변 사람들. 특히 제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그 어떤 짓도 하지 마십시오. 둘째. 앞으로 제 업무 처리 방식에 대한 제재나 간섭이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제 아버지의 일을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한가지 도울 舅?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입장이라고 들었는데. 이 기회에 제 아버지 쪽으로 붙으세요. 넷째. 앞으로도 종종 애용해 드릴 테니 행여나 거부하거나 외면할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그냥 통쾌한 복수로만 끝나면 아쉽지 않은가. 원래 복수란 하고 나면 허탈한 법. 약점 하나 잡은 것으로 계속 우려먹겠다는 속셈을 여실히 드러내는 지원이다. 당연히 김 전무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보게. 그건 요구가 너무 과하지 않나. 다른 것은 몰라도 셋째와 넷째는......"

"호오. 지금 그런 것을 따지실 상황이 아님을 모르시겠습니까?"

"그. 그래도...... 아니, 됐네. 내 다 들어주지. 대신 그 메일의 원본과 모든 사본을 내게 주게."

"물론 드려야지요. 죽기 전에는 꼭 드리고 죽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쉐자 돌림 파티에게 한 말을 그대로 다시 써먹는 지원. 역시 저 뻔뻔함은 고금제일이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내가 그 조건을 당장 다 들어줄 것이니, 자네도 바로 그걸 넘겨줘야 하지 않나? 거래는 거래답게 해야지!"

지원은 피식 웃었다.

"누가 지금 이걸 거래라고 했습니까?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인데. 이건 협박을 통한 일방적인 요구지. 주고받는 거래가 절대 아닙니다."

"......"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십시오. 요구는 좀 많을지 몰라도 비밀만큼은 절대 지켜 드릴 겁니다. 대신 수틀리면...... 아시죠? 알아서 잘 처신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완전히 좌절하여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김 전무. 지원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크게 웃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전무실을 나섰다.

"하나는 처리 끝이니 이제 두 놈 남은 건가?"

지원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그 두 놈(?)은 이때 심한 오한에 떨었다고 한다.

- 절단마공이라고 구박하셔서 안 끊기위해 노력했더니 용량이 불더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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