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62화 (62/74)

7. 잘못 건드린 대가

롤플레잉 프로젝트팀 소속 운영부의 임 동원 부장은 오늘 기분이 무척 안 좋았다. 생전 안 자던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급히 나오느라 아침도 챙겨 먹지 못했고, 30년에 한번 정도밖에 안 난다던 오토 카의 고장이 하필 오늘 났다. 또 출근을 위해 탔던 오토 택시는 전에 어떤 사람?탔었는지 무척 지저분했으며, 사무실로 오는 동안 반들반들하게 잘 닦인 복도에 미끄러져 넘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몸까지 안 좋은지 자꾸 오한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아침부터 최악의 운을 달리는 날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런 일들이 자꾸 생기는 거야? 정말 짜증나는군. 오늘 누구 한 놈 걸리면 아주 박살을 내버리고 말 테다."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임 부장. 누가 그에게 걸려 박살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지원이 그를 박살내기 위해서 찾아오는 중이란 것은 확실하다.

얼마 안 있어 업무에 열중하던 임 부장의 귀에 벌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사무실을 찾아올 사람은 그의 부하 직원뿐이다. 상사라면 그냥 메시지 하나 날려서 '와라'하면 되니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화상 연결이 있는 이상 서로의 사무실을 찾을 일은 극히 드물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목까지 치솟았던 임 부장은 너 잘 걸렸다 식으로 짜증을 팍 내며 고개를 들었다.

"어떤 놈이 노크도 안...... 어?"

임 부장은 당장 돌 씹은 표정이 되었다.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인간이 문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쯤은 당연히 해고당했으려니 생각했는데, 아직 회사에 남아있다는 것도 조금 놀라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임 부장님."

매력적인 미소를 흩날리는 그의 이름은 서 지원. 계획했던 대로 착실하게 순서를 밟아 이번엔 임 부장을 찾아온 그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예의라는 놈은 대체 어디다가 팔아먹었냐? 남의 사무실에 들어오려면 먼저 노크부터 해야한다는 것도 몰라?"

임 부장은 지원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용하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곧 안 보게 될 얼굴이니 아무런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착각은 자유에다가 노망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뭐. 제가 예의 없는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요. 저와는 다르게 아주~ 예의가 바르신 임 부장님이 그냥 참아 주십시오."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임 동원이 아니다. 괜히 그의 성격이 지랄 같다고 하겠는가.

"뭐야? 이 자식이 지금 어디서 그따위 말을 하는 거야!"

지원은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듯한 포즈로 귀를 후볐다. 그 태연한 모습은 임 부장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분에 못 이긴 임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원에게 달려들었다. 애초에 그걸 유도하기 위해 그의 속을 벅벅 긁었던 지원. 그는 가뿐하게 임 부장의 돌격을 피하며 냉큼 그의 의자에 앉았다.

임 부장은 지원이 너무도 쉽게 그의 돌격을 피하는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어 휘청거렸다. 그러다 겨우 중심을 잡은 그는 지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이없음에 입을 쩍 벌렸다.

"아, 이 의자 참 편하네요?"

지원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임 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못 일어나!?"

비릿하게 웃은 지원은 갑작스레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쾅!

"제대로 확인도 안한 증거를 가지고 최종 보고서를 올려서 이번 사고를 일으키셨으니 업무 과실!"

임 부장의 눈이 당장 휘둥그레졌다. 그러던 말던 지원은 다시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쾅!

"회사 기밀 누출이라는 범죄를 진짜 제가 한 것처럼 잘도 말씀하셨더군요? 당연히 무고죄!"

쾅!

"범죄자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제 이름이 더럽혀졌으니 이 것도 성립되겠지요? 명예 훼손죄!"

지원은 임 부장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 것들 중에는 평소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임 부장님의 고의성 여부가 의심되는 것도 있으니, 가중 처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임 부장은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지원은 순간 훗 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걸로 임 부장님을 경찰에 고발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양할 가족들도 있으신 분이 교도소에 가시면 절대 안되지요."

상당히 그를 생각해 주는 척 하는데. 과연 이 것이 지원의 진심일까?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 아니라고 여겨진다.

아니나 다를까. 지원의 뒷말은 이랬다.

"그래도 그냥 용서해드릴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아! 그렇군요.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회사를 자진 사퇴하시면 되겠네요. 물론 사표를 내기 싫다고 하시면 기꺼이 해고되도록 손을 써드리지요."

당한 대로 돌려준다. 지원도 자진 사표 제출을 요구받았으니 임 부장에게도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그제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임 부장은 길길이 날뛰며 따졌다.

"네 녀석이 무슨 권리로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그리고 무고니 명예 훼손이니 하는데. 네 놈이 범인 맞잖아!"

"정말 그럴까요? 확신하십니까?"

지원의 입가에 떠오른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 임 부장은 불안해졌다. 지원은 그 불안함에 당당히 쐐기를 박아 주었다.

"현재 임원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 모르겠군요. 지금 거기선 제 무죄를 증언해줄 증인들이 열심히 '진실'을 밝히고 있을 겁니다. 이래도 계속 제 앞에서 태연하시렵니까?"

임 부장은 다리에 힘이 풀림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지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마무리가 될 수 있을 만큼 큰 업무 사고다. 김 전무가 그런 책임을 질리는 없으니, 그 책임은 자신이 아니면 이벤트 1과의 김 과장에게 떨어지리라.

여기서 책임이란 것은 곧 징계. 그런데 지원의 아버지인 부사장이 약간만 힘을 쓰면 분명 임 부장에게 징계가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징계는 아마도 해고? 빽을 싫어하는 임 부장에게 연줄이 있을 리도 없고, 회사가 그를 포기하지 못할 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황은 절망적이다.

"......"

간신히 책상 모서리를 잡아 쓰러지지 않은 임 부장은 아무 말 없이 지원을 노려보았다. 굳이 자신에게 찾아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지원은 용서를 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빌어서 용서해준다면 먹여 살려야할 가족을 위해서라도 빌고 싶은 것이 임 부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나이에 별다른 기술도 없이 다른 회사에 취직하기는 힘드니 말이다. 운영자를 오래 해서 부장 자리까지 오른 것인데, 다시 타 회사의 운영자로 취직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싶다고 해도 나이 많다고 안 받아준다.

"으으음. 서 과장. 이건 그러니까......"

비굴한 성격이 전혀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존심 때문일까. 막상 말을 꺼냈어도 뭐라 뒤를 잇지 못하는 임 부장이었다. 지원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신 것 같군요. 왜요? 나이 어린 부하 직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는 자존심 상하십니까?"

정곡을 찔린 임 부장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지원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사죄하실 기회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차버리시다니. 어디 그 높디높은 자존심 가지고 잘 사시나 두고 보겠습니다."

사실은 사과해도 용서해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괜히 그래보는 사악한 지원이었다. 여기 온 것은 해고될 것임을 미리 통보하고 임 부장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기 위한 것. 그에 대한 복수는 이 후에 이뤄질 해고로 시원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앗! 서 과장. 그게 아니라!"

임 부장은 화들짝 놀라며 지원의 팔을 붙들려 했다. 하지만 지원은 가볍게 그 손길을 피해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물론 문을 나서기 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러게 왜 가만있는 저를 건드리십니까?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서 과자앙~! 잠깐만!"

지원은 뒤에서 들려오는 웬 개소리(?)를 깨끗이 무시하며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깐. 잠깐 멈춰보게!"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지원의 뒤를 쫓아온 임 부장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붙들었다. 지원이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하네. 난 정말 몰랐어."

"안 들리는데요?"

"......"

역시 임 부장은 제대로 사과를 할 인물이 아니다. 피식 웃은 지원은 임 부장의 손을 문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곧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혔다.

"아참. 이걸 깜박했군요."

문이 거의 닫히는 순간, 얼른 한 발 앞으로 나선 지원은 손바닥 쪽을 위로 한 채 주먹을 앞으로 죽 뻗었다. 그리고 임 부장이 똑똑히 보는 가운데, 중지를 세워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일명 '엿 드세요'라 불리는 만국 공통의 욕이다.

"너......!"

뭐라 말도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임 부장. 지원은 상큼한 윙크 한방을 날리곤 다시 문이 닫히도록 몸을 뒤로 뺐다.

곧 문이 완전히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지하 9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노와 굴욕감에 휩싸인 임 부장을 내버려둔 채.

"후후후. 이제 한 놈 남은 건가?"

지원의 중얼거림에 그 한 놈(?)은 다시 한번 오한에 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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