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64화 (64/74)

8. 여름 이벤트

2178년 11월 15일.

지원이 통쾌한 복수극을 벌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 간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했다. 하나 달라진 것이라면 악질 유저만이 아니라 지원에게 괴롭힘 당하는 대상이 늘었다는 것 정도? 무척 바쁜 쉐자 돌림 파티와 김 澎綬?심심하면 불러내서 괴롭혔던 것이다.

이로 인해 쉐자 돌림 파티와 김 원기는 매일 밤 모여서 지원의 뒷담을 한다고 한다. 자기가 모종의 프로그램을 빨리 만들어 내라고 시켜놓고 툭하면 방해한다고 말이다.

또 시간이 남을 때마다 김 전무에게 화상 연결을 해서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 예의 바른 지원이었다. 물론 저 예의 바르다는 것은 그만의 생각이며 진짜 문안 인사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렇게 즐거운 일주일을 보냈던 지원은 오늘도 여전히 정각 10시에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원님.]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책상 앞에 앉자 엠의 말이 곧장 이어졌다.

[화상 메시지가 하나 와있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열어봐."

곧 그의 책상 위에 듬직해 보이는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지원으로선 처음 보는 20대 후반의 남자. 사실 둘은 에피소드 내에서 본 적이 있지만 가면을 쓴 상태였기에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서 과장님. 전 온라인 운영과의 강 달훈 대리입니다. GM 다루니라고도 하지요. 이렇게 메시지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과장님께서 여신 이벤트 건으로 유저분들의 문의가 많이 쏟아져서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유저분들이 부르시기를 술래잡기라 하시더군요. 그 술래잡기 이벤트에 대한 유저분들의 문의 내용은 대체로 제각각이었습니다만. 간단히 정리해볼 때 언제 또 그런 이벤트가 열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이벤트의 승자가 없었으니 꼭 다시 열어달라 하시면서 말입니다. 저희 GM들로서는 무너진 집과 파헤쳐진 길 복구에다가 사망하거나 다친 NPC들 때문에 상당히 고달팠는데 유저분들의 반응은 무척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지원은 자기도 모르게 킥킥대며 웃고 말았다. 강 달훈이 '무너진'이란 말을 할 때부터 상당히 슬픈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고달프긴 고달팠나보다. 그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 이유로 혹시 그 이벤트를 다시 여실 계획이 있으시면 저희 온라인 운영과에 미리 통보해 주시기 바라며, 또 되도록 도시 외의 장소에서 열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 만약 여실 계획이 없으시다 하더라도 바로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하셨던 유저분들께 답변 메시지를 보내드려야 하니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 강 달훈이 말한 것은 데몬 아머를 걸었던 그 술래잡기. 불가피한 일 때문에 중간에 엠에게 맡겼던 바로 그 이벤트다. 그때 엠은 고지식하게 죽어라 뛰어만 다니는 바람에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았다고 후에 보고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원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엠. 답변은 텍스트 메시지로 띄워."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술래잡기 이벤트를 언젠가 다시 열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와 장소 등은 미정. 정해지면 통보해 주겠음."

곧 엠이 메시지가 전송되었음을 알려왔다. 고개를 끄덕인 지원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엠. 오늘 특별한 스케줄이 있던가?"

[20분 후에 운영진 회의가 있습니다.]

"운영 회의? 정기 회의는 어제 했잖아?"

[비 정기 회의입니다.]

지원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은 무시해도 되는 거니까 그냥 넘겨. 그런데 예전에 내가 이런 비 정기 회의 같은 것은 굳이 말해줄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전에는 분명 그러셨습니다만. 6일 전. 이제부터는 어떤 회의든 꼬박꼬박 참석하실 것이니 회의 시간을 잊지 말고 통보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던 지원은 잘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랬던가? 거참. 별걸 다 기억하네. 그런 것은 좀 잊어라. 귀찮다."

[엄밀히 말해서 기억이라기보다는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라 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잊는 것이 아니라 삭제하는 것입니다.]

"......하긴 A.I에게 망각을 바라긴 힘들지."

[전 일반 A.I들과는 틀리니 꼭 자기 학습형 고급 A.I임을 붙여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하급 A.I들과 같은 취급은 싫습니다.]

"......"

지원은 엠이 자신을 닮아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건방지게 말대답하는 폼이 꼭 그를 흉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그런지도 모른다. 엠은 자기 학습형 A.I이니까,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주인의 성격을 배워 가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를 닮은 A.I...... 같이 일하는데 닮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딴 것은 몰라도 성격만은 안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원이었다. 자기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란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래봐야 소용없다. 엠이 보고서 뭔가를 배울 수 있는 모델은 현재 그 뿐이니까. 지원도 그 점을 생각해 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회의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아. 회의...... 그러고 보니 이 부장 취임 후 첫 비 정기 운영 회의인가? 정기 회의를 바로 어제하고서 다음날 또 회의를 소집하다니. 부지런하기도 하지."

임 동원 부장이 해고당한 후 어제 부로 새로이 운영 부장이 된 이 상미.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여자다.

지원은 왠지 모르게 그녀가 꺼려졌다. 젊은 여자 상사라는 이유는 절대 아니다. 요즘 시대에 여자라고 차별 대우 하는 것은 돌 맞아 죽을 일이니까. 게다가 아버지 쪽 사람이라 오히려 지원을 우대해주면 주었지. 무시하거나 홀대할 일도 없다.

그래도 꺼려지는 이유는 지원 자신도 모른다. 그저 그녀의 얼굴이 자신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며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뿐. 사실은 그녀와 아주 많이 닮은 여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지만 지원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안. 아니, 못 간다고 전해. 바빠서 그러니까 나중에 회의 결과나 통보해 달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에피소드에 접속하시겠습니까?]

피식 웃은 지원은 아무 말 없이 캡슐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피소드의 EM 휴게실에 접속한 다크는 곧장 수도 자이렌의 광장으로 향했다. 요즘 그는 개인 아지트로 가지 않는다. 굳이 그런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서 홀로 중얼거리며 이벤트를 짤 필요는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혼자 있기 위해서 개인 아지트를 만든 거였지만, 유저가 많든 적든 하이딩 상태면 그는 혼자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다른 운영자가 다가오지 않는 한 말이다.

"점점 여기서 접속하는 유저가 늘고 있는 것 같군."

언제나처럼 북적이는 광장.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유저가 많아졌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요즘 에피소드의 메인 스토리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규 가입자가 더욱 늘었던 탓이다.

"이럴 때는 대형 이벤트를 하나 터트려 줘야 재미있는데."

다크는 메인 스토리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만 있다면, 드래곤을 여기다 확 풀어버리고 싶었다. 예전에 드래곤을 팼던 손맛-발 맛이던가?-을 아직 잊지 못해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월권을 하려면 못 할 것은 없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 자신만의 권한으로도 얼마든지 대형 이벤트를 벌일 수 있으니까. 물론 드래곤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다 문득 다크는 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영자 캐릭터로 접속중인 그가 그런 감각이 있을 리는 없지만, 워낙 쨍쨍하게 내리 쬐는 해를 보니 느낌이 그랬다. 저 정도면 유저들은 무척 덥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지나다니는 유저 모두의 옷차림이 무척 얇았고 또 땀에 젖어 있었다. 그 중 여성 유저들은 유독 노출이 심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더운지 예쁜 손 부채를 휴대한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에피소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계절감마저 재현해낸 것이다.

"좀 시원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겠는걸?"

그렇게 중얼거린 다크는 씨익 웃었다. 지금 그의 얼굴만 유저들에게 보여줘도 다들 오한에 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극히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어쨌든 여름 특집 이벤트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 그는 분수대 꼭대기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여름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바다로의 피서? 여름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 아니면 얼음이나 에어컨 같은 직접적인 시원함을 주는 것들? 그 것도 아니면 연인과 즐기는 작은 불꽃놀이나 시원한 맥주 한잔?

이 질문을 던지면 남자들은 여성들의 노출을 가장 먼저 꼽을지도 모르겠다. 비키니나 배꼽티, 초미니스커트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리고 또 보신탕이나 삼계탕 같은 보양식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자들도 남자들과 비슷하다. 조금 다르다면 남자들이 비키니를 떠올릴 때, 여자들은 다이어트와 피부 관리를 같이 떠올리는 것 정도? 그 외엔 거의 비슷하다 하겠다.

어쨌든 여름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워낙 많기에 다크는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벤트를 열만한 소재는 많고, 또 그에 어울리는 이벤트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서 선택이 무척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다크는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대규모 이벤트라 하더라도 모두 다 참여할 수는 없을 만큼 에피소드의 유저 수는 많다. 또 다크에겐 이벤트를 열 시간이 충분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꼭 하나만 선택할 필요 坪?차근차근 전부 다 해버려도 되는 것이다.

"너무 많이는 내가 힘드니까. 한 서너 개만 할까?"

결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다크는 생각났던 이벤트들 중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선택해 세부 기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이벤트들에는 이벤트용 하급 NPC가 아닌 인간 도우미도 좀 필요하리라. 마침 적당한 사람들을 떠올린 그는 킥킥대며 웃고는 다시 이벤트 기뮈?몰입했다.

이름하여 EM 다크가 개최하는 에피소드 여름 특집 이벤트! 아니. 이벤트들! 과연 다크가 얼마나 유저들을 시원하게 해줄지......

그런데 에피소드 안은 한 여름이지만 현실은 11월의 초겨울. 굳이 유저들을 시원하게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까? 어쩌면 알면서도 그냥 여름 이벤트가 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 더우시죠? 여러분들을 위한 여름 이벤트 챕터이옵니다. [사실은 제가 더워서일지도...-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