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름 이벤트
그렇게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내버려두면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어색한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다크였다.
"야."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쉐반은 마치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저. 저요?"
다크는 그를 향해 말없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너 맞으니까 이리 오라는 뜻이다.
하지만 쉐반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크의 지극히 폭력적인 성격을 이미 겪어봤기에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도에 베인 경험도 있는 그가 아닌가. 그렇지만 여긴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이라 아무리 맞아도 고통은 없을 텐데, 쉐반은 지금 그걸 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래 어리버리하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더듬거리며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저기. 제가요. 전 그냥. 그 머냐. 어덜트 비치가 어떤 곳인가 구경하러 간 건데. 메어리가. 아니 NPC가 유혹을 해와서.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음. 그걸 하게 된 거거든요?
사실 다크가 지나가는 유저에게 접근하는 미녀라는 이름의 서브 이벤트를 넣어두긴 했다. 그래도 그건 같이 발리볼을 하거나 하면서 잠깐 어울리자는 유혹이지. 결코 그런 엄한 짓을 하자는 유혹이 아니다.
고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분명 쉐반이 그 미녀 NPC를 꼬드겼기 때문이리라. 잘만 꼬시는 넘어갈 수도 있게 세팅해 두었으니까 말이다. 여름날 해변에서 미녀와의 썸씽을 바라는 남성 유저들에 대한 다크의 작은 배려. 그걸 쉐반이 먼저 선점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하필 오픈을 앞에 두고 바쁜 이 시간에. 그가 죽어라 일하던 그 시간에 여자나 꼬시고 있었다니. 다크는 처절한 응징을 결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닥치고 빨리 안 와?"
울상이 된 쉐반은 우물쭈물하며 바지를 추슬러 올리곤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다크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고, 쉐인과 쉐핀은 조용히 쉐반의 명복을 빌 수밖에 없었다. 다크를 말리다가는 다같이 엮어 들어갈 테니, 그들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으악!"
"시끄러워!"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는 쉐반. 그런 그를 노려보며 소리치는 다크. 허나 쉐인과 쉐핀의 예상과 달리 쉐반은 두들겨 맞지 않았다. 다크는 그가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비명을 지른 이유는 다크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몸에서 빛?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퍼펑!
빛이 사라진 순간, 쉐반의 어리어리한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서 있던 곳에 있는 것은 어른 남자 손바닥만한 '게'. 개(Dog)가 아니라 옆으로 걸어다니는 게(Crab)다.
다크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일일 이벤트 도우미로서 네 본분에 충실해라. 쉐반. 오늘의 네 임무는 살아있는 소품이다. 해변에 게 한 마리쯤은 돌아 다녀줘야 그림이 되지 않겠냐?"
그 말에 놀라 자신의 몸을 살펴본 쉐반은 황당함에 눈을 부릅떴다. 불그죽죽하고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몸. 손 대신 자리한 것은 집게. 그가 사라진 장소에 있던 게는 바로 다크에 의해 그가 강제 변신한 존재였던 것이다.
쉐반은 소리 높여 이 얼토당토않은 임무에 항의했다.
"......!"
하지만 게는 말을 못 한다.
"아참. 쉐반 너는 되도록 유저들 눈에 안 띄는 것이 좋을 거야. 괜히 돌아다니다가 유저들에게 잡히면 십중팔구 찜. 혹은 구이가 되어 버릴 테니까. 씹힌다고 아픈 것은 아니지만 먹힌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걸?"
인간이 저리도 사악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저 말을 하며 웃는 다크의 미소를 보자 쉐반은 그런 생각을 했다. 더불어 '먹힌다'는 생각을 하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표정도 없고 말도 못하는 게지만, 지금 쉐반의 생각을 대충 짐작한 다크는 그를 지그시 밟아 주었다. 물론 살살 밟은 것이라 게 껍질이 부서지진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 힘이면 모래사장 속으로 쉐반의 딱딱한 몸을 쑤셔 넣기엔 충분했다.
"먹히기 싫으면 거기 얌전히 처박혀 있어."
그렇게 쉐반을 게로 만들어 파묻어 버린 후, 다크는 쉐인과 쉐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니들."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쉐반의 모습을 본 둘은 한껏 몸을 긴장시켰다.
"네!"
"말씀하십시오!"
다크는 힘차게 대답하는 둘을 보고 피식 웃었다. 마치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 같지 않은가?
"니들도 놀지 말고 저 것들 좀 적재적소에 배치해라."
"네!"
"맡겨만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다크가 가리킨 소품 더미로 냉큼 뛰어갔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할 수는 없다! 라고 외치는 듯한 자세로 소품 배치에 열성적으로 몰입했다. 쉐반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 한다고 게로 만들어 버리면 골 아좋?않은가?
또 게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크가 한 말. 즉 유저들의 눈에 띄면 게찜이 돼서 먹힐 거라고 한 것에 잔뜩 겁먹기도 했다.
게다가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해도, 상대가 사악 무도한 다크인 이상 어떤 일이든 참아야만 한다. 이 것은 쉐자 돌림 패거리가 최근 깨달은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는 지혜(?)였다.
어쨌든 다크는 소품 배치를 쉐인과 쉐핀에게 떠맡긴 채 잠시 그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나 워낙 잘하고 있어서 굳이 옆에서 코치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빨리 끝내라."
간단히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난 다크는 미리 설정해둔 갖가지 서브 이벤트 NPC들을 해변에 왕창 풀어두었다. 그리고 이어서 일반 NPC들을 풀고, 미리 만들어 둔 각종 상점과 노점상들에 상인 NPC들을 설치했다. 그 외에도 안전 관리 요원이나 '오~ 그림 좋은데?' 따위의 식상한 대사를 내뱉는 깡패 NPC도 조금 만들어서 풀었다. 여러 가지 경험들을 이 핫 비치에서 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대략 2시간쯤이 지난 후, 소품 배치에 목숨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던 쉐인과 쉐핀이 다크에게 다가왔다. 이때 다크는 자기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야자수 그늘 아래 드러누워 있었다.
"배치 완료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다크는 허공으로 떠올라 메인 비치와 어덜트 비치를 샅샅이 훑어보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해변에 색색의 비치 파라솔들이 펼쳐져 있고, 활발히 돌아다니거나 해수욕, 또는 일광욕을 즐기는 NPC들이 생동감을 더해줬다.
"좋아."
소품도 배경도 NPC들도 모두 완벽하다. 다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땅 위로 내려섰다. 이제 어제 저녁에 설치해둔 자이렌 중앙 광장의 텔레포터가 작동되기만 기다리면 된다. 얼마 안 남았다.
수도 자이렌의 중앙 광장은 평소보다 최소 10배는 많아 보이는 유저들로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열리는 핫 비치로 가는 텔레포터가 바로 이 곳에 열리기 때문이다.
날씨는 후텁지근하고 움직이는 족족 서로의 어깨가 부딪힐 만큼 사람이 많다. 이런 곳에는 보통 사소한 다툼이 많기 마련. 아니나 다를까. 곧 광장 한 쪽 구석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밀지 좀 마요!"
"누가 밀었다는 거야?"
조금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전사 둘이 서로를 노려보며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지 누구야!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밀기는 개뿔. 나도 밀린 거라고! 나도 발 무수히 밟혔단 말이다!"
"어쨌든 나한테 와서 부딪힌 것이 당신 맞잖아!"
"어쩌라고. 나도 피해자인데."
싸움은 계속 되었고 그 주변에서 그걸 지켜보던 한 유저가 혀를 찼다.
"쯧. 자기들만 밀리고 발 밟힌 줄 아나."
워낙 나직했기에 싸우던 두 전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만약 들었다면 싸움은 삼파전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 이 시비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린 유저의 이름은 알비나 베라. 트랩 헌터라는 사뭇 독특한 직업을 가진 남자다. 직업 못지 않게 상당히 특이한 메인 스토리 관련 백 스토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하려 노력하던 중. 색다른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에 이 곳을 찾았다. 계속 메인 스토리만 파고들었으니 좀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언제 열리나. 아직 시간이 안된 건가?"
괜히 일찍 왔나 하는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작스레 번쩍인 빛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허공에 마법 문자들을 새기고 있는 붉은 빛줄기가 보였다.
"와! 나왔다!"
"텔레포터다!"
유저들의 환성이 쏟아져 나오고 곧 허공에 새겨진 글자들이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마법 문자로 이루어진 원. 바로 저게 텔레포터다.
완성된 텔레포터는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성질 급한 유저들은 아직 완전히 내려서지도 않은 텔레포터에 까치발을 하며 손을 뻗었다. 닿는 순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곧 다른 유저들도 저마다 손을 뻗어 핫 비치로 이동했다.
광장을 꽉 채웠던 유저들이 성급히 핫 비치로 이동해가자 알비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벤트라면 다들 부나방처럼 마구 몰려드니. 나참."
자기도 그 부나방 중 하나란 자각은 전혀 없는 알비나. 그는 그 주변의 유저들이 다 이동하길 기다렸다가, 앞길이 트이자 느긋하게 텔레포터로 다가서서 손을 댔다.
빛의 소용돌이. 어지러움.
알비나는 로딩 때면 항상 겪는 그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로딩이 완료되자 슬쩍 눈을 떴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 수많은 사람들로 해변이 북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비나는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 멋지다."
그는 당장 바다로 달려가 바지를 걷어 부치고 발을 담갔다. 시원함이 온 몸으로 퍼지자 그는 희열 비슷한 것까지 느꼈다.
툭. 데구르르.
한참 좋은 기분에 빠져 있던 알비나는 뭔가가 자신의 허리춤을 맞추고 떨어짐을 느꼈다. 고개를 내리자 큼지막한 노란색 공이 보였다.
"저기 죄송한데요. 그 공 좀 주워 주시겠어요?"
맑고 예쁜 목소리. 알비나는 저절로 호감이 가는 것을 느끼며 공을 주워 들고 고개를 들었다.
"아!"
누가 목소리 예쁜 여자는 얼굴이 안 예쁘다고 했던가? 알비나는 역시 옛 말은 믿을 것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목소리 예쁜 여자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죽인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색 비키니에 건강미가 넘쳐 보이는 매끄러운 커피색 피부. 잘록한 허리.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 늘씬하게 잘 빠진 다리. 게다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블루블랙의 긴 생머리...... 20대 초반의 건강한 사내인 알비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녀에게 공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상큼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공을 받으며 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혼자세요?"
여기서 '왜요?'라고 물으면 남자 자격 상실이다. 저런 류의 질문은 여자 쪽에서 먼저 작업을 걸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알비나는 최대한 멋지게 웃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네. 혼자입니다. 혹시 그 쪽도?"
"친구들과 같이 왔었는데요. 그 애들이......"
알비나는 그녀가 말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세 명의 남녀가 서로 어울려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걸 본 그는 쉽게 그녀의 뒷말을 눈치챘다. 친구 세 명과 같이 왔는데 그녀들은 먼저 다른 남자들과의 작업에 성공했다는 것을. 그래서 혼자 남保낫募?것을 말이다.
이럴 때는 만세 삼창을 한번 해야 하지 않을까? 알비나는 그런 고민을 하며 친근하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전 알비나 베라라고 합니다. 그 쪽은?"
그녀는 눈부신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미헤느예요."
두 남녀 사이에 작은 불꽃이 튀기고...... 해변의 로망. 남자의 로망. 잘 빠진 비키니 미녀와의 썸싱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졌다.
알비나 베라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서브 이벤트 NPC라는 것을. 또 이와 아주 유사한 일이 이 핫 비치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편의 등장 인물 중 하나인 '알비나 베라'는 [하이엘프]님이 하신 E.M 출연 요청에 따라 집어넣은 인물입니다. 다른 분들이 보내주신 이벤트 소재와 출연신청 메시지들은 잘 보관하고 있으니, 차차 이야기 진행 도중 중간 중간 넣어드릴 예정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원하시는 분은 백 스토리와 이름, 직업 등을 정해서 메시지 주세요. 이런 이벤트가 있었음 좋겠다~라는 것도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