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름 이벤트
*앞편의 공지는 폭파시키고[지워지고] 새 글을 올렸습니다. 안 보신 분들이 많더군요. 앞편부터 보세요.
리노센트는 오늘 열린다던 핫 비치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어덜트 비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건 대다수의 남성 유저들 대부분이 그랬다. 누드 비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짜릿해지면서 가슴이 콩닥거리지 않는가?
"스크린샷 배리어가 쳐져 있을까? 안 쳐져 있으면 좋겠는데......"
얼토당토않은 바램이다. 스크린샷 배리어뿐만이 아니라 동영상 배리어까지 완벽하게 쳐져있으니까. 다크는 요런 면에서 의외로 세심했던 것이다.
"와! 나왔다!"
"텔레포터다!"
다른 유저들의 외침 소리에 리노센트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수많은 유저들의 눈길이 그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러움, 질투와 같은 감정이 듬뿍 담긴 눈길이었다.
이런 것을 눈총이라고 하던가? 상당히 따가웠다.
"에?"
어리둥절해 하던 그는 유저들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 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그가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의 머리 위에 텔레포터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포터와 가장 가까이 서 있다고 그런 눈빛들을 보냈募?얘기가 된다.
"훗. 잘 하면 핫 비치에 가장 먼저 가는 사람이 되겠군."
완성된 텔레포터가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더 이상 기다리기 싫어진 리노센트는 냉큼 까치발로 서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텔레포터의 가장자리에 스치자 그는 곧장 핫 비치로 이동되었다.
"오!"
리노센트는 눈앞에 펼쳐진 투명한 바다에 입을 쩍 벌렸다. 국내 해수욕장 어디를 가도 저만큼 깨끗하고 맑은 해변은 없다.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나 나오는 해변이랄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리노센트는 당장 바지를 걷어 부치고 바다로 달려가려 했다.
허나 그는 몇 발자국 못 가서 멈춰 섰다. 바다는 어덜트 비치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굳이 여기서 바다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이왕이면 눈요기와 함께 시원함을 맛볼 수 있도록 어덜트 비치로 가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결정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리노센트는 어덜트 비치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표지판을 찾아낸 그는 빠르게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옆에는 그의 뒤를 따라 텔레포터로 들어온 다른 유저들도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부분이 남자인 것을 보아 리노센트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물론 여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드 비치라고 해서 여자 누드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한참 후에야 리노센트는 메인 비치의 끄트머리. 높다란 절벽이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약간의 쪼개진 틈이 있고 거기엔 반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힌 작은 길이 나있었다.
절벽은 메인 비치와 어덜트 비치를 나누는 경계선. 그리고 저 작은 길이 바로 어덜트 비치의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성인이신 분들만 가실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미성년자 분들은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들어가시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저 막은 미성년자 분들이 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내 NPC가 소리 높여 외쳤으나, 리노센트는 성인이기에 당당하게 어덜트 비치의 입구로 들어섰다. 반투명한 막은 그의 개인 정보를 검색해본 후 당연히 통과시켜 주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별천지. 리노센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고 해야겠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해변이 아니라 여전히 절벽 안 쪽이며, 난데없이 갈림길이 나온 것이다.
"누드 비치와 어덜트 비치? 어라. 두 개가 다른 건가?"
잠시 고민하던 리노센트는 일단 본능이 이끄는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누드 비치 쪽이다.
"어덜트 비치는 나중에 가봐도 되지."
그렇게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시킨 그는 바삐 걸음을 옮겨 절벽 틈 사이 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눈앞에 펼쳐진 별천지. 리노센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고 해야겠지만 이번에도 현실이 아니었다. 해변이 아니라 탈의실이 나온 것이다.
"누드 비치는 옷을 벗으신 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속옷 하나도 안 됩니다! 그리고 여기 번호 키를 받으셔서 옷을 모두 사물함에 넣어주세요!"
여기도 어김없이 안내 NPC가 있었다.
"옷을 벗어야 하다니. 끙."
잠시 투덜거리던 리노센트. 그래도 다들 벗고 있을 테니 혼자 부끄러울 일은 없다 판단한 그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벗었다. 이어서 사물함 하나를 배정 받아 벗은 옷을 넣어 둔 후, 탈의실 한 편에 나 있는 커다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구 - 누드 비치'라고 친절하?적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후......"
리노센트는 연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출구를 가리고 늘어져 있는 커튼을 확 열어 젖혔다.
"오오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눈앞에 펼쳐진 별천지. 리노센트는 입을 쩍 벌렸다. 맑은 하늘, 투명한 바다. 오색의 산호초에 이국적인 야자수들. 여기까지는 메인 비치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백사장에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팔등신 미녀들이 올 누드로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거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여긴 천국이야."
리노센트는 감동했다. 해변에 있는 사람들 중 반은 남자였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기도 미녀. 저기도 미녀. 누드 비치엔 미녀 아닌 여자가 없었다.
"문 막고 뭐하십니까?!"
뒤에서 사뭇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노센트가 지금껏 탈의실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얼른 옆으로 비켜서자 탈의실에서 속속 다른 유저들이 누드 비치로 들어섰다. 대부분은 처음 리노센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흥분하여 하체를 양손으로 감싸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다.
"쯔쯔. 겨우 저 정도에 흥분하다니."
이런 것을 사돈 남 말한다고 한다. 리노센트의 하체의 한 부분도 마찬가지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으니까. 사실 수백 명의 미녀 누드가 눈앞에 있는데 흥분 안 하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험험."
뒤늦게 그걸 알아챈 리노센트는 다른 남성 유저들의 뒤를 따라 역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물의 차가움으로 열기를 식히려는 의도였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허리까지 잠기는 정도에 선 채 연신 백사장을 훔쳐보고 있는데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아예 물 속으로 잠수를 해버린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픈 첫 날. 누드 비치를 찾은 모든 남성 유저들은 로그아웃을 하기 전까지 바다 속에서 나오질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치 못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다크의 실수라 할 수 있다. 허나 그는 그걸 인정 안 했으며 굳이 서브 이벤트들이 벌어지는 장소를 백사장에서 바다로 교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다크는 지금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인은 인내심이나 용기가 있는 자만이 차지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썸싱 일으키고 싶으면 흥분 자제하고 백사장으로 나오라는 소리다. 아니면 주변 눈길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오던가.
[외전] 멈춰진 시간 속의 세상
세상은 멈춰져 있다. 길거리를 오가던 오토 카들도. 바삐 오가던 사람들도. 사람들도 동물들도 한낮 허공을 스치는 바람조차 멈춰진 세상. 이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자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다. 이 멈춰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부여된 시간은 멈췄으나 그 '밖'을 감싸고 있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이 멈춰진 시간 속의 세상 중 한 곳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밖'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세상 속에서 부여된 그 장소의 이름은 (주)테이머의 본사 건물. 그 곳 지하 10층에 있는 제 2 이벤트 관리과 과장의 사무실이다.
"으......"
작은 신음 소리. 이 멈춰진 시간 속의 세상에서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 남아 있었던 걸까? 물론 인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따지지 말자.
어쨌든 그 신음을 시작으로 작던 움직임이 조금씩 커졌다. 처음엔 손가락 하나가 움직였고 다음으로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완전히 굳어져 있던 전신이 차츰 마비에서 풀렸다. 사무실 한 편에 놓인 소파에 기대앉은 채 굳어있던 남자. 이 멈춰진 시간 속의 세상에서 '서 지원'이遮?이름을 부여받은 인간이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젠장.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무척 오랫동안 굳어 있기라도 한 듯 뻐근한 온 몸을 주무르며 지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켜져 있던 그의 사무실 전등이 꺼져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지원은 짙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가장 먼저 그가 앉아있는 소파가 만져지고 그 앞의 작은 테이블이 만져졌다. 한참을 더듬던 그는 테이블의 형태가 상당히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내 사무실에 있는 테이블...... 그럼 여긴 내 사무실이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사무실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훤하다. 조금 어색하긴 해도 행동에 문제는 없다는 얘기다.
"엠?"
지원은 천천히 자신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며 그의 보조 A.I를 불렀다. 하지만 이 멈춰진 세상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직 그 하나뿐. 당연히 엠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엠! 대답을 해!"
재차 외쳤으나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지원은 우뚝 멈춰선 채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깨어나기 전. 그러니까 그가 굳기 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저 그 날의 이벤트를 마치고 캡슐을 나온 후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끝. 그게 깨어나기 전의 기억 전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엠이 정상적인 동작을 하고 있다면 그의 주인인 지원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고로 지금 엠의 가동이 멈춰진 상태라는 건데...... 반영구적 자체 동력을 가진 A.I가 멈춘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설마?"
지원은 난데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젠장. 확인해 봐야겠군."
짙은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려나간 그는 사무실 문을 수동으로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랜 시간 지냈던 곳이니 아무리 어둠 속이라 해도 거칠 것이 있을 리 없다.
다급히 제 2 이벤트 관리과를 나온 그는 고속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것 역시 가동이 되지 않는 듯 수동으로 버튼을 눌러도 작동이 되질 않았다.
별수 없이 옆의 비상계단으로 달려간 지원은 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 지하9층의 제 1 이벤트 관리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내 예감이 들어맞은 모양이군."
제 1 이벤트 관리과의 직원들 모두가 굳어있었다. 어떤 이는 책상 앞에 앉아 넷 접속 전용 헤드기어를 착용한 상태 그대로. 또 어떤 이는 어딘 가로 걸음을 옮기던 자세 그대로. 모든 사람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
지원은 지금 이 이상한 상황을 간단히 결론지었다. 이 세계에 주어진 시간이 멈춰 버렸다는 것을.
"내가 언젠가 이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 빌어먹을 게임 중독자."
한숨을 푹 내쉰 지원은 제 1 이벤트 관리과 사무실을 나와 차분히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익숙한 위치에 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이."
이 황당한 상황이 가져다준 충격이 지원을 미치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아니라면 왜 난데없이 허공을 향해 말을 걸고 있단 말인가!
"다 듣고 있는 것 아니까 뭐라 대답 좀 하시지?"
이 멈춰진 시간 속의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지원 하나뿐.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하지만 지원은 텅 빈 허공을 향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해!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생각이냐? 뭐 잘한 것이 있다고 묵비권 행사야!"
아무래도 지원은 미친 것이 분명하다. 아직 창창한 젊은이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꾸 그렇게 나오면 출연 거부해 버린다?"
이. 이상한 말이 아. 아닐 수 없다. 추. 출연 거부라니. 지원이 무슨 영화 배우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봐. 나 정도 잘난 인물에 뛰어난 능력. 멋진 성격이면 어떤 소설에서라도 주인공 자리는 맡을 수 있다고. 자꾸 그렇게 내 말 무시하면 진짜 이 E.M에 출연 거부해 버릴 거야?!"
......
"좋아. 그럼 난 갈테니 E.M 주인공을 바꾸던지 말던지 맘대로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원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더 이상 상황 and 배경 설명에만 치중하다가는 주인공 잃어버릴 것 같다.
"잠깐! 너무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말라구."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지원과는 전혀 다른 경쾌해 보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다. 바로 내 목소리다. 언제나 주인공인 지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설명하던...... 이 세계를 만들고 움직이던 자. 보통 작가라고들 한다.
"진작 대답할 것이지. 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거냐?"
지원은 그렇게 물으며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내 대답여하에 따라서 다음 행동을 하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난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궁색한 변명을 꺼내 놓았다.
"원래 작가가 글 속에 끼어 드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 알잖아. 예전에는 그런 소설들이 몇 있긴 했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따 당한다고."
지원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작가가 글 속에 끼어 들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안 되고. 연재 중단은 괜찮단 말이냐? 지금 이 상황 안 봐도 뻔하다. 이 세계에서 시간이 멈췄다는 것은 당신이 글을 안 썼다는 거잖아. 당신 또 게임에 빠져서 연중하고 잠적했지!"
비수같이 내 심장을 쿡쿡 찌르는 지원의 말에 난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냐!"
하지만 지원에게서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일반 판타지 쓰다가 게임 소설을 쓸 정도로 게임 중독자면서!"
저 놈이 이 소설의 주인공만 아니라면 확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죽여서 허무한 엔딩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
"내가 게임 중독인 것은 맞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고. 뭐. 가끔 마음에 드는 게임이 생겼을 때 한동안 푹 빠져든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번엔 아냐!"
"그럼 이번엔 왜 연중을 한 건데? 별 시답잖은 이유라면 당장 출연 거부하고 딴 작가에게 가버릴 지도 몰라."
...... 무서운 놈. 역시 저 놈은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아는 놈이다.
"일하던 직장을 불시에 그만두게 되는 바람에 골 아팠다고. 너도 알다시피 난 부모님이랑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잖아. 당장 직장이 없으면 생활이 힘들어. 게다가 이번엔 이사까지 해야하는 바람에 무척 힘든 시간들이었어. 물론 가끔 틈날 때 마다 글을 쓰려고 마음은 禿向鄕嗤?머릿속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그게 잘 안 되더라고."
지원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가로막힌 듯 입만 살짝 오물거리다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한동안 빈 허공을 죽어라 노려보다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왜 말을 못하게 막는 거냐? 찔리는 것이 많긴 많은가 보지?"
......예리한 놈. 이번 말은 너무 불시에 튀어나와서 못 막았다.
"찔리긴 뭐가."
"뭐긴 뭐냐.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연중한 동안 네가 게임에 접속했던 것을 본 사람이 있어! 그 시간에 글을 썼어야 할 것 아냐!"
......이번 말을 막았어야 하는데. 이젠 소문 다 퍼지겠군.
"이사 준비하고 여러 가지 잡무를 하는 동안 가끔 기분 풀러 겜방에는 갔었어. 하지만 글을 쓰긴 힘든 환경이었다구. 이래뵈도 꽤 예민한 편이라 그 시끄럽고 답답한 겜방에서는 영 글이 안 써져서 말야."
허나 내 구구절절한 변명에도 지원의 싸늘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변명은 그만."
"......"
"써."
"......"
"대답 안해?"
뜨끔.
"그. 그래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한 나인데 그런 명령투라니. 너무하잖아?"
내 작은 반항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시끄러워."
"......"
"빨리 써!"
".......응."
역시 지원이라고 해야 할까. 저 안하무인한 성격이 좀 오래 굳어 있었다고 해서 어디 갈리 없다.
내 심정이야 어쨌든 멈춰진 세상은 다시 움직일 것이다. 비록 워낙 오래 굳어 있었던 관계로 모두 가동시키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