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70화 (70/74)

8. 여름 이벤트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던 어느 이름 없는 산. 특별한 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이 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도 없기에 사람들이 이 산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근처에 작은 마을조차 없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오늘 이 산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그 순결했던 몸을 내주어야만 했다. 이틀전 산 정상에 난데없이 나타난 고색창연한 성 때문이다. '드라크 백작의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제국 각지에 뿌려진 전단지 겸 초대장에 이 산과 성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방해 없이 제멋대로 자라나던 수풀이 산 정상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혔고, 놀란 동물들이 모두 산 아래로 도망갔다. 물론 그 원인이 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기기에 바빴지만 말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산 정상에 하나둘 도착했다. 대충 봐도 2~3천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 인파다.

그런 그들 앞에 우뚝 서 있는 회색빛 고성. 허나 짙은 핏빛 안개에 가려진 성은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아 신비한 느낌이다. 그 몽롱한 모습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군. 근데 아직 시간이 안 됐나?"

"응. 조금 남았어."

"이번 이벤트는 어떤 것일까? 대충 호러 쪽으로 나갈 것이란 짐작은 가긴 하지만..."

"내 생각도 그래. 근데 드라크 백작은 이름만 봐선 드라큐라 백작이라는 것 같은데. 뱀파이어도 결혼을 하던가?"

"못할 것은 뭐 있겠어. 아! 맞아! 원래 뱀파이어는 박쥐같은 것으로 변하기도 하잖아. 혹시 이쁜 박쥐 암컷을 만났다가 둘이 눈 맞아서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너의 발칙한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마."

"오옷. 경의까지! 고맙다. 친구야. 역시 날 알아주는 것은 너뿐이구나."

"그렇게까지 고마워하면 내가 미안하니 그만해라. 사실 욕이었다."

"......죽어!"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동료들과 뭉쳐선 채 이런 시답잖은 농담 등을 주고받으며 초조하게 이벤트 개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괴상한 얼굴이라서도 아니다. 그저 안색이 좀 창백하다는 것과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 때문이랄까.

이게 왜 눈에 띄는 점이냐 하면 오늘 이벤트의 주연이 바로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의 특징이 뭔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무척 아름답게 생겼으며 창백한 안색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뱀파이어와 비슷한 이미지인 그녀에게 사람들의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다.

'혹시 이번 이벤트의 NPC가 아닐까?'

이 것은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유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뱀파이어도 아니고 NPC도 아닌 평범한 유저다. 이름은 네레이프. 올해 22살의 그녀는 네크로맨서라는 독특한 직업을 선택하는 바람에 얻게된 창백한 피부 때문에 이 이상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도 자신의 미모 때문에 많은 눈길을 받아왔던 네레이프는 왠지 오늘따라 주변의 눈길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누명을 썼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기에 더욱 그랬다.

괜히 혼자 왔다고 생각하며 이제라도 친구를 부를까 하던 그녀는 마침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친구에게 보내던 메시지 전송을 취소했다.

콰르륵! 드륵!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울려 퍼지는 굉음. '드라크 백작의 초대'이벤트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쿵!

잠시 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성문이 완전히 열어 젖혀지자, 유저들은 잔뜩 기대하며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때.

"잠시 멈춰 주십시오!"

그리 좁지 않은 성문으로 와르르 몰려드는 유저들의 앞을 한 구울이 가로막았다. 과거 에피소드의 GM 원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다크의 수하 쉐핀으로 임시 이벤트 도우미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울?"

"성에서 구울이 나오다니. 역시 드라크 백작은 뱀파이어였군!"

"원배야! 터닝해!"

선두에 선 유저들이 각자 자기 할말만 하곤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쉐핀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의 말은 다크의 능력으로 증폭되어 성밖의 모든 유저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공격하지 마십시오. 전 이 성의 집사입니다!"

"집사?"

"집사라는데?"

"저 구울이 집사래."

"그러고 보니 정장 입은 구울이네."

"오거가 전신 타이즈 입은 것만큼 웃기는군."

그제야 유저들의 손과 무기가 쉐핀에게서 치워졌고, 네레이프 역시 막 쉐핀에게 걸려던 저주를 취소시켰다. 속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쉐핀은 짐짓 점잖게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우선 제 주인님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와주신 신사, 숙녀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는 것을 아시고 저희 백작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지만 약간의 양해를 좀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실 줄 미처 몰랐기에 모든 분들을 한 자리에서 대접할 공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든 유저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고 또 너무 많으면 진행에 무리가 오기 때문임은 다크와 쉐자 돌림만이 아는 비밀이다. 쉐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백작님께서는 제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힘들게 찾아주신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시간 간격을 두고 일정 인원씩 차례로 성안에 들이라 하신 겁니다. 결혼식과 피로연은 앞으로 3일 간 계속 벌어질 테니 모든 분들에게 골고루 참석 기회를 드리고자 한 겁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우선 가장 앞쪽의 분들부터 오백 명씩 연회장으로 안내할까 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늘어났긴 하지만 확실히 너무 많은 인원임은 분명하기에 유저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유저들은 나뉘어졌다. 가장 먼저 연회에 참석할 선두 오백 명과 성 밖에 남을 나머지 인원으로 말이다. 네레이프는 운 좋게도 선두 오백 명안에 들어 가장 먼저 성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크륵, 제 뒤를 바짝 따라와 주십시오. 괜한 호기심으로 엉뚱한 길에 들어서셨다가는 다시는 성밖으로 나갈 수 없음은 물론. 진정한 어둠의 공포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음산하게 경고하는 쉐핀. 즉 구울 집사의 말에 대부분의 여성 유저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치는 배경음악과 내부 분위기에 구울 특유의 냉기가 섞인 경고가 두려움을 몰고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는 어디나 있는 법. 매일 밤 무덤을 파헤치고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와 동거동락하던 네레이프는 성안이 무척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 저 핏자국과 부스러진 해골.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 수가!"

그 말을 들은 그녀 주변의 유저들이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어쨌거나 구울 집사는 준비된 연회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유저들은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네레이프 역시 그 뒤를 따랐지만, 성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어느새 가장 뒤쪽으로 처지게 되었다.

그래도 앞의 사람을 놓치지 않고 뒤따르던 네레이프는 문득 자신의 뒤를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그녀가 행렬의 마지막이었는데 말이다.

꿀꺽.

"헙!"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에 혼자 놀랐던 네레이프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나직하게 마법 주문을 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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