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72화 (72/74)

8. 여름 이벤트

장막이 걷힌 무대 위에서 붉은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서 있는 아름다운 남자. EM 다크이자 뱀파이어 로드인 드라크 백작의 차분한 등장에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의 성에 온 것을 환영한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울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홀 전체에 퍼져 나갔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넓은 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마치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선 내 소개부터 할까? 좀 더 긴 정식 이름이 있다만. 인간인 너희들에게는 드라크 백작이라고만 해두겠다. 어차피 내 본명을 발음할 수도 없을 테니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오만한 발언이지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외모부터가 평범치 않은 그였으니까. 다크의 뻔뻔한 성격을 바탕으로 한 타고난 연기 실력은 여기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쪽은......

다크는 문 쪽을 향해 그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유저들의 눈길은 그 손가락 끝으로 향했다.

-내 아내가 될 인간이다.

그의 간단한 소개말과 함께 유저들이 들어섰던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멍한 눈빛의 미녀로 분장한 엠이었다.

"오오."

남자들은 엠을 몽롱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그만큼 그녀는 예뻤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여자들의 눈길은 곱지 못했다. 한 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인 다크의 아내라는 점 때문이다. 질투라고 하는 그 감정 말이다.

허나 엠은 그런 유저들의 반응을 깨끗이 무시한 채 오직 다크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주변의 유저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 그 것은 멍한 눈빛과 어우러져 이지를 상실한 여자란 느낌을 풍겼다.

당장 유저들의 숙덕임이 더욱 커졌다. 뱀파이어와 이지를 상실한 여자...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자. 이리 오너라.

사이한 느낌마저 풍기는 다크의 부름이 들리자 엠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와 품에 안겼다. 이쯤에서 유저들은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이 상황을 마치 연극 보듯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인지.

허나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 대신 행동에 나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챙!

"역시 공녀님을 납치한 것은 네 놈의 짓이었구나! 이 사악한 뱀파이어!"

난데없이 칼을 뽑으며 일어선 여기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일시에 집중된 시선. 이로 인해 그 기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뻘쯤하며 식은땀을 흘려야했다. 그 중엔 네레이프도 껴있었다.

-호오. 쥐새끼 한 마리가 내 손님들 틈에 끼어 들어왔구나.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로군. 내 아내의 호위기사였던 자인가?

"그렇다! 케튼 공작님의 명에 따라 따님이신 엘라이온 공녀를 구하기 위해 지난 반년간 대륙을 헤맸다. 어서 공녀님을 이리 보내라!"

오늘 정의의 기사 역을 맡은 쉐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충실히 주어진 대사를 읊었다. 목소리는 몰라도 표정 연기력이 딸리는 그녀를 위해 투구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큰 낭패였으리라. 지금 그녀의 새빨개진 얼굴과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누군가 보았다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후후. 싫다면?

"널 쓰러트리고 공녀님을 되찾아 가겠다!

여기사의 당당한 선언. 유저들은 한껏 숨죽인 채 여기사와 다크의 대치를 주시했다.

-네가 날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다크의 몽롱하던 눈빛이 순간 변했다. 난폭한 광기. 그가 분노했음을 알리듯 그의 등 뒤에서 붉디붉은 오오라가 넘실거린다.

하지만 여기사는 전혀 겁먹지 않은 듯 당당하게 대꾸했다.

"물론이다!"

-우습구나. 용기는 가상하다만 내 성에서 날 쓰러트릴 수 있다 장담하는 것은 만용이란 것을 모르는가?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 내게 있는 것이 용기이든 만용이든. 나는 반드시 공녀님을 되찾아 가고 말 것이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지그시 여기사를 바라보던 다크는 어느 순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자를 만나는 구나. 어둠의 군주이자 너희들의 밤을 지배하는 날 쓰러트리겠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구나. 하하하.

다크의 정말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걸 들은 쉐나나 엠마저 진짜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다. 그만큼 다크의 연기-정말 연기이기만 할까?-는 훌륭했다.

"지금은 마음껏 웃겠지만 과연 계속 그럴 수 있을까?"

-후후후. 어리석은 기사여. 지금 내가 너의 목을 취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임을 모르겠는가? 허나 네가 나를 오랜만에 웃겨 주었으니 그 보답을 해주마. 내 시험을 받아 보아라. 만약 내 시험을 이겨낸다면 공녀를 돌려주지. 아아. 물론 하찮은 인간이 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발버둥칠 기회를 주는 것 뿐. 어떠냐. 결과는 뻔하지만 한번 받아 보겠느냐?

엠이나 쉐나마저 그 진의를 의심할 정도이니 유저들은 안 봐도 뻔한 일. 그들은 정말 깜박 속은 채 상황에 몰입했다. 이벤트라기 보단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 사실 그런 느낌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아름답지만 광오한 다크에게 적대감을 일으켰다.

"뭐야. 저 자식. 하찮은 인간이라니? 죽고 싶냐?"

"저 기사만 보이고 우리들은 안 보이나 보지?"

"잘생겼으면 다냐! 잘난 척은 '즐'이다!"

"죽여 버리자. 저 자식!"

원래 자신들이 유리하다 생각되면 겁이 없어지는 법이다. 다크는 혼자지만 자신들은 오백 명이라 생각해 안심한 유저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들고 일어나 다크를 위협했다.

하지만 다크는 싸늘하게 미소지을 뿐. 그 위협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지 분노하는 '척' 했다.

-기껏 손님으로서 대접해 주려 했는데 건방진 인간들이로구나. 좋다. 그렇다면 너희 모두에게 기회를 주지. 마음껏 발버둥치다 죽어갈 수 있는 기회를!

찌익!

다크는 안고 있던 엠의 어깨를 움켜잡고 그대로 옷을 찢어버렸다. 가냘프게 떨리는 엠의 어깨와 목덜미가 드러나고, 다크는 그 새하얀 목덜미에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를 박아 넣고 피를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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