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름 이벤트
"아!"
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줄기 새빨간 피가 목덜미에서 어깨로. 가슴 사이로 주르륵 흘렀다. 애로틱하면서도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진짜 공포! 유저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돌릴 생각조차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마 후, 만족할 만큼 피를 빨았다는 듯 안고 있던 엠을 여기사에게 던져버린 다크가 괴성을 흘렸다.
-크크크.
"고. 공녀님!"
날아온 엠의 몸을 냉큼 받아든 여기사가 비명처럼 외치자, 유저들도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맙소사! 죽은 거야?"
"이런 빌어먹을. 저 뱀파이어 자식이!"
유저들은 조금 전의 공포에서 겨우 벗어나 분노를 터트렸다. 생기가 전혀 없는 눈과 실 끊어진 인형 마냥 늘어진 몸. 멍한 눈빛이나마 보였던 조금 전과 달리 엠은 시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시험을 하겠다더니 왜 공녀님을 죽인 것이냐!"
여기사의 분노 어린 외침에 다크는 비웃음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죽은 것처럼 보이나? 하긴 그렇겠군.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그녀도 나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친 존재. 너희 인간들의 관점에서는 죽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럼 죽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래. 아직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지. 후후후.
"이 사악한 놈! 제대로 대답해라! 그게 무슨 뜻이냐?"
입가에 묻은 엠의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아낸 다크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큭큭. 지금 그녀의 영혼은 내 몸 안에 있다. 아직 뱀파이어로서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3시간 안에 영혼을 육체로 되돌리지 못한다면 정말 죽겠지. 이 것이 나의 시험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들에게 단 한 시간 동안만 내 성을 공개하마. 나를 찾으라. 그러면 공녀의 영??돌려주겠다!
"용서할 수 없다. 감히 공녀님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그래. 나에게 이 것은 장난이지. 너희들에게는 목숨을 건 시험일 테고 말이야. 난 이 성 어딘가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너희들을 기다려 보겠다.
말을 마친 다크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여기사가 발악적으로 검을 그에게 던졌지만 허공을 날아 그냥 벽에 박힐 뿐이었다.
-과연 날 찾아낼 수 있을까? 크하하하!
광오한 웃음이 홀을 가득 메우며 다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
"......"
웃음의 여운이 남은 듯 홀은 잠시간 정적에 휩싸였다. 저마다 어떻게 다크를 찾아내야 할지 고민하는 유저들. 그때 공녀의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여기사가 일어나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러분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의아한 유저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저 사악한 뱀파이어 로드 놈은 반드시 제가 잡아 죽여야 합니다만. 차마 제 주군의 따님이신 공녀님을 여기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습니다. 비록 영혼이 없어 시체나 다름없는 공녀님이시지만 전 이 분을 지켜야만 합니다. 뱀파이어 로드는 모든 인간들의 적. 여러분도 인간이니 痢?모두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 대신 드라크 백작을 찾아내 제게 알려주십시오. 반드시 놈의 목을 베어 공녀님의 영혼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유저들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어차피 다크가 유저들에게도 그를 찾아내라 하지 않았는가.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여기사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 일은 반드시 공작님께 알려 후사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성엔 수없이 많은 언데드들이 살면서 드라크 백작의 조종을 받는다고 합니다. 부디 조심해주시길..."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공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자, 유저들은 즉석에서 파티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조금전 다크에게서 느꼈던 공포와 여기사의 조언을 보면 아무래도 쉽게 클리어될 이벤트 같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팀을 짜서 하나둘 홀을 빠져나간 후, 홀로 남겨진 여기사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고했다. 쉐나.
다크의 모습이 아무 기척도 없이 쉐나의 옆에 나타났다. 손가락에 묻은 엠의 피(?)를 맛있게 핥으며 나타난 그는 진짜 뱀파이어가 아닐까 의심되는 모습이다.
쉐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끄응. 대본을 다 아는 저도 다크님을 보면 섬뜩하네요. 게다가 이 성...... 이러다 심장마비로 기절하는 사람이라도 나오는 것 아녀요? 어떤 놀이공원에도 이렇게 거대한 귀신의 집은 없을 건데요."
-공포에 떨라고 만든 건데 안 떨면 섭섭하지.
장난스런 다크의 대꾸에 투구 속에서나마 입을 삐죽인 쉐나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어련하시겠어요. 에혀. 그건 그렇고 연기란 정말 어렵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처음 연기를 한 것치고는 훌륭하게 해낸 그녀다.
어설프지만 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충성심 강한 기사를 연기한 쉐나나. 백치녀에서 시체까지 다양한 연기를 소화해낸 엠. 그리고 엠의 목덜미에서 생 딸기즙-피의 정체-을 빨아 먹어가며 열연한 다크까지. 역시 그 상사에 그 부하라 하겠다.
그로부터 십여 분 정도 후부터. 성안 곳곳에서 자지러지는 비명과 괴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귀신의 집. 과거에만 하더라도 놀이공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단골 메뉴가 지금 에피소드 내에 구현된 것이다.
움직이는 바닥이나 벽과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뿜어지는 냉기의 안개 같은 것은 기본이요. 거울 미로나 무중력 방 등은 옵션이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와 사람들을 놀래키는 동서양의 갖가지 언데드들은 놀이공원의 모형이나 로봇과 다르게 실제 사람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사방에 널린 것이 함정이라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좀비 군단을 이끌고 다니는 구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을 괴롭혀댔다.
미성년자들은 그나마 나았다. 각종 언데드들이 나타나더라도 생생하게 보이지 않고 약간 뿌옇게 보였으니까. 그에 반해 성인들은 언데드들의 입가에 묻은 피와 그들의 살을 파먹는 구더기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만 했다.
붉디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벽에서 쏟아지고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뼈 조각들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지옥이란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 사방에 펼쳐진 것이다.
이로 인해 소심한 유저들은 얼마 안가 포기를 선언하며 성밖으로 도망갔다. 그중 반 이상이 여성 유저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 것은 소수. 아무리 실제처럼 보이고 느껴진다 해도 게임이기에 상당수가 대담하게 언데드들을 물리치며 드라크 백작을 찾아 헤맸다.
물론 몇몇 유저들은 함정에 빠지거나 언데드에게 공격당해 사망하기도 했지만 그 수가 많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다크가 말한 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아직 그를 찾아낸 유저는 없었기에 이대로라면 이벤트 클리어 실패. 하지만 다행이 그가 있는 곳을 거의 찾아낸 한 파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