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사기 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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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던 소설에 빙의했다.
사골처럼 우려먹은 클리셰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닥친 현실이었다.
“음. 다른 건 다 잘 적으셨고…”
“…?”
“여기 마지막 칸에 보유하신 룬 정보 적으시면 돼요.”
“뭐요?”
“룬이요. 아카데미 입학하려면 보유 룬 적으셔야죠.”
코앞에서 거만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여직원.
이게 내가 빙의하고 처음 마주한 장면이었다.
처음엔 납치당하거나 꿈을 꾸고 있는 건 줄 알았다.
자고 일어나서, 너무 맥락 없이 시작된 현실이라.
하지만 난 납치당하기엔 너무 평범해.
뒤질 정도로 뺨을 쳐보니 꿈은 더더욱 아니고.
그제야 주변과 여자 직원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룬.
그리고 아카데미.
자주 읽던 소설에 나오던 단어들이었다.
그러니까.
룬과 아카데미가 있는 세상에.
내가 지금 뜬금없이 떨어졌다는 거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잖아, 이런 상황.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행동도 정해져 있었다.
나는 누가 들을세라 속으로 조용히 외쳐봤다.
그래.
이 상황에 다들 외치는 ‘상태창!’ 그거.
<홀더 정보>
◎이름: 도재현
◎성별: 남(20)
◎능력치
[근력: 4] [마력: 2]
[속력: 5] [신성: 1]
[내구: 4] [정신: 6]
◎보유 룬
[단검 Lv.1]
◎보유 스킬
-
◎궁극 스킬
-
와….
이거 소설에서만 봤던 건데.
홀로그램으로 직접 보네.
나는 완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원래의 세계에서 한창 자주 읽던 소설.
<넥스트 룬 홀더>에 내가 빙의했다는 걸.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읽던 소설이고, 전개에 대해서 딱히 불만도 없었다.
5700자의 댓글을 쓰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금세 적응했다.
이미 불가항력으로 벌어진 일이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원래 이런 상황에 현실로 돌려보내는 전개는 없잖아?
게다가 꽤 높은 수치의 ‘정신력’이 나를 보조했다.
일반인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력.
이는 뜬금없는 특수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날 도와줬다.
‘넥스트 룬 홀더라….’
<넥스트 룬 홀더>는 평범한 성장 헌터물이다.
현대 판타지 배경에, 게임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하지만 여타 게임 시스템과 다르게.
‘룬’이라는 독특한 정보가 상태창 대부분을 결정짓는다.
능력치, 보유 스킬, 그리고 궁극 스킬까지.
홀더 정보에 나타나는 모든 수치를 좌지우지하는 것.
그게 바로 룬이었다.
‘거기까진 좋은데….’
다 좋다.
<넥스트 룬 홀더>는 내가 정말 재밌게 본 소설이다.
갑작스러운 빙의가 이 소설이라는 게 다행일 정도다.
그런데 빙의된 사람의 이름이 도재현이다.
<넥스트 룬 홀더>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등장인물.
그렇다.
여느 빙의물 소설들이 그렇듯.
나도 지극히 평범한, 지나가는 엑스트라 1에 빙의한 것이다.
씨발….
“저기요. 빨리 룬 정보 적으시라고요. 뒤에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아. 죄송합니다. 잠이 좀 덜 깨서. 빨리 적을게요.”
“바빠 죽겠는데, 진짜….”
좀 봐줘라….
방금 빙의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잠시 <룬 정보>를 켰다.
홀더 정보에 나타나는 모든 정보는 세부 탐색이 된다.
예를 들어.
<룬 정보>
◎이름: 단검
◎등급: 노멀(Normal)
◎레벨: 1
◎새겨진 부위: 왼손 손등
◎특수효과: 속력+1
◎파생스킬: -
◎세부정보
: 단검을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이건 스킬이나 세부 능력치 등에도 다 적용이 된다.
단출하지만, 룬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나는 재빨리 지원서에 룬 정보를 적기 시작했다.
룬의 이름과 레벨 정도만 가볍게 적었다.
다른 구체적 사항은 적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입학시험 때 다시 실전 점검을 하니까.
그것보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높은 정신력으로 적응은 했지만, 아직 실감은 안 난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여직원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검? 이런 하급 룬으로 뭘 그렇게 꾸물거린 건지….”
아니, 이 년이?
아까부터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거지.
빙의한 내 얼굴이 너무 만만하게 생겼나.
게다가 하급룬이라는 평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등급이 노멀이라고 해서, 성능까지 하급인 건 아니다.
[단검]도 마스터하면 암살자로 무쌍 찍을 수 있다고….
물론, 방금 막 빙의해서 정신이 없던 건 사실이다.
정보를 읽고 생각도 하느라 시간도 많이 썼고.
게다가 이제 막 들어갈 아카데미인데…
여기서 난동 피워봤자 나한테 득 될 건 없겠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현실과 내 주변의 파악이다.
잠깐 건물 안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홀더 정보>를 불러봤다.
이름 도재현.
나이 20세.
보유 룬은 [단검] 하나.
능력치는 4가 일반인 수준이니까 평균.
속력과 정신력만 조금 높고, 나머지는 평범하다.
‘딱 엑스트라급이네….’
여주인공 강주연처럼 폭발적 능력치도 아니고.
주인공 박진우처럼 엄청난 잠재력도 없다.
그냥 평범한 룬 홀더의 정보창.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제일 밑에서 순위를 다툴 정도.
딱 그 정도의 정보였다.
‘하지만….’
도재현에 깃든 정신은 평범하지 않다.
<넥스트 룬 홀더>의 애독자!
전편을 소장했던 통 큰 후원자!
설정집까지 구매할 정도의 깊은 과몰입!
나는 이곳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설 내의 굵직한 사건과 전개.
히든피스의 정보가 모두 머리에 있다.
물론, 완결까진 못 봤다.
완결 나기도 전에 갑자기 빙의해서….
하지만 이 정도면 소시민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여긴 룬이 전부인 세상이니까.’
<넥스트 룬 홀더>는 룬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
능력치, 스킬, 특수효과.
그리고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까지.
룬이 가진 잠재력이 곧 룬 홀더의 잠재력이다.
길거리 노숙자도 좋은 룬만 얻으면 인생역전이 된다.
그 확률은 바닥에 가깝지만.
그래서 나는 단기적 목표를 세웠다.
지금 있는 룬을 성장시키는 것보다…
당장 얻을 수 있는 룬을 모두 얻는 쪽으로.
룬은 개인이 노력만 하면 인위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르는 룬 획득 방법을, 원작 소설의 독자였던 난 알고 있었다.
입학시험 전까지 최대한 많은 룬을 얻을 생각이다.
일단 많이 얻어 놓으면, 분명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한 달 뒤가 입학시험이었나?’
오늘 지원서를 썼으니 그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면 박진우나 강주연도 볼 수 있다.
소설로만 읽던 작품 주연들을 직접 눈으로 본다?
오, 씨발.
하루빨리 입학시험을 치르고 싶었다.
* * *
<넥스트 룬 홀더>에서 룬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선택받으면 된다.
룬이 희귀하든 평범하든, 모든 룬은 자연히 결정된다.
박진우의 [구도자의 땀방울]도.
강주연의 [꺼지지 않는 불꽃]도.
모두 홀더가 된 그 순간에.
혹은 룬을 성장시키는 도중 갑작스럽게 얻어진다.
얻고 싶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룬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특수룬이 아니라면.
[검]이나 [활] 같은, 평범한 노멀룬이라면.
개인의 노력으로도 획득 가능한 방법이 있다.
다른 홀더들은 모르는 미지의 방법.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히든피스였다.
[바람을 가르는 검의 무게가 익숙해집니다.]
[새로운 룬을 얻었습니다.]
[룬의 성향으로 근력을 1 획득합니다.]
“됐다!”
[검] 룬이 새로이 몸에 새겨졌다.
이번 조건은 정자세로 2001번 베기를 반복.
벅찬 숨과 곳곳의 물집들을 참고 얻은 결과였다.
[검]이나 [활], [창]과 같은 기초적인 노멀룬들은, 이런 식으로 히든피스로 정해진 조건을 만족하면 인위적으로 룬을 획득할 수 있다.
홀더에게 룬이란 곧 자산과 같다는 걸 고려하면, 이러한 룬의 획득 방법을 혼자 알고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였다.
<홀더 정보>
◎이름: 도재현
◎성별: 남(20)
◎능력치
[근력: 8] [마력: 2]
[속력: 7] [신성: 1]
[내구: 4] [정신: 7]
◎보유 룬
[단검 Lv.1] [둔기 Lv.1] [활 Lv.1] [도끼 Lv.1]
[창 Lv.1] [요리 Lv.1] [질주 Lv.1] [검 Lv.1]
◎보유 스킬
-
◎궁극 스킬
-
한 달 전.
직원에게 무시 받던 때와 완전히 달라진 상태창.
7개나 되는 추가 룬을 획득했고, 그로 인해 각종 능력치가 고르게 상승해 있었다.
인위적으로 룬을 획득하는 히든피스는 다양했다.
방금처럼 정자세로 2001번의 베기를 한다거나.
허공을 향해 1880번의 화살을 쏜다거나.
한 달 간 일정 거리를 일정 속도로 꾸준히 뛴다거나.
“…미친 짓이긴 하지.”
정상인의 사고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방식.
하지만 소설의 열혈 독자인 나는 그를 외우고 있었다.
덕분에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기초적인 룬들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벌써 룬이 8개나 되네.”
솔직히 이게 내 성장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자연히 선택받은 룬은 [단검]이었고, 그건 결국 내게 암살이나 투척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룬으로 받은 능력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둔기], [도끼], [창], [검]으로 4의 근력을.
[활], [질주]로 2의 속력을.
그리고 [요리]로 1의 정신을 얻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 달의 노력은 성과를 냈다.
그리고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많은 룬을 얻어 놓아서 나쁠 건 없겠지.
홀더의 룬 획득엔 딱히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
그런데 그때.
<홀더 정보>에 등록된 내 새 룬들.
[둔기]부터 [검]까지의 룬들이 문득 반짝이기 시작했다.
상태창을 가득 메울 정도의 눈 부신 빛.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새 정보창들이 떴다.
평범한 일전의 정보창들과는 완전히 다른, 심상치 않은 형태의 특수 정보창.
황금색의 정보창이었다.
[놀라운 업적! 선택받은 이들의 전유물인 ‘룬’을 스스로 힘으로 얻어냈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며 7개의 룬을 쟁취한 당신은, 룬의 사냥꾼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새로운 룬을 얻었습니다.]
<룬 정보>
◎이름: 룬 사냥꾼
◎등급: 에픽(Epic)
◎레벨: Max
◎새겨진 부위: 심장
◎특수효과
: 결투에서 승리 시, 상대방의 룬 하나를 복제할 수 있다. 동일 대상에겐 하나의 룬만 복제할 수 있으며, 획득한 룬은 레벨이 하락해 한층 저하된 성능으로 등록된다.
◎파생스킬: -
◎세부정보
: 홀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7개의 룬을 획득하면 얻을 수 있는 룬. 누군가 한번 획득하면 다시는 얻을 수 없는 고유룬이다.
“…뭐냐, 이게.”
멍하니 정보창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넥스트 룬 홀더>의 애독자인 나도 처음 보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사기 룬.
[룬 사냥꾼]이라는 기형적인 에픽룬이.
너무 쉽게 내 손안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