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아카데미 지하 던전 (5)
“아빠. 요즘 왜 이렇게 바빠요.”
김채은이 책상에 자리한 김명현을 바라봤다.
요즘의 그는 하루 내내 정신이 없었다.
일과시간엔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남는 시간엔 전속 제자 교육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선 뭘 만드는지 한창 글을 쓴다.
주말을 제외하면, 평일 내내 일을 하는 그.
덕분에 아빠와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한 김채은이었다.
김명현이 그런 딸을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교보재를 만들고 있단다.”
“교보재요?”
“응. 도재현 홀더가 실전적인 부분에선 굉장히 강한데, 이론적인 부분은 거의 백지에 가까울 정도로 부족하더라고. 말로 알려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간단하게 글로 풀어보고 있어.”
도재현은 흡수력이 뛰어난 홀더다.
암살자 계열로 등록된 걸 보면 본인이 [단검] 룬 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김명현이 보기에 그는 [검] 룬에 더 재능이 있어 보였다.
두 명의 스승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유수검법]과 [파상검법]은.
익히는 방식과 성질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검법들이다.
레벨만 충분하다면 어떻게든 익힐 수 있는 ‘파생스킬’과 달리, ‘파생룬’은 해당 룬에 대한 깨달음과 넘치는 이해력이 있어야 등록이 된다.
“평범한 전사 계열 홀더들은 전속 제자로 두고 가르쳐도 룬이 안 생겨.”
“유수검법이요?”
“응. 노멀룬인 검과 다르게, 유수검법 같은 파생 레어룬들은 사실 재능의 영역이거든.”
그리고 이는 [파상검법]도 마찬가지였다.
두 검법이 괜히 레어룬일까.
아무나 따라한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룬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도재현은 동시에 익히는 것으로 모자라.
두 검범을 융화하며 검술에 있어 다양한 시도를 하곤 한다.
배우고자 하는 노력과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열정까지.
아카데미의 홀더 교육자로서.
김명현이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김채은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를 봤다.
“재현이가 그렇게 좋아요?”
“하하하. 교수 입장에선 잘 배우는 학생이 좋지.”
“누가 보면 도재현이 아들인 줄 알겠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김채은은 괜히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일과가 끝났는데도 초과 업무를 하는 중인 아빠의 얼굴이, 피곤해 보이지 않고 밝았기 때문이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
김명현은 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받아치며 예술처럼 움직이는 검.
그러한 자신만의 검을 완성하는 데에 오랜 세월을 쏟았고, 홀더 생활 대부분을 그러한 독자적인 행보로 걸어왔다.
그렇게 나온 [유수검법]이었고.
그 길로 얻어낸 교수직이었다.
‘그치만…’
하지만 그는 홀더들에게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전사 계열 홀더들은 파괴적이고 강력한 힘을 원했다.
그래서 호쾌한 검술을 구사하는 탁원호가 인기를 끌었고, 특별한 경력도 클랜도 없던 김명현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검]의 기초 강의까지 인기가 없는 건 아니다.
그의 교육 방식은 깔끔하고 알차기로 유명했다.
다만 [유수검법]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적을 뿐이었다.
그래서 김명현은 전속 제자를 받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를 배우고자 하는 이가 없었기에.
‘재현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도재현이, 김명현의 전속 제자가 되어 그의 검을 배우고 있다.
심지어 얼마나 강한 인상을 줬는지.
김명현의 교육열마저 다시 불태우고 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긍정적인 변화.
두 사람 모두와 가까이에 있는 김채은은.
당연히 이 변화가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거 끝나는 대로 식탁으로 와요. 저녁 차려 놨으니까.”
“…….”
저녁 차려 놨다.
그 한 마디에.
펜을 굴리던 김명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곤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딸을 봤다.
“혹시… 꼭 먹어야 할까?”
“진짜 죽을래요?”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네. 금방 갈게, 채은아.”
김명현이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바꿨다.
특별한 약속으로 도재현이 없는 지금.
김채은의 수제 저녁 식사를 함께해야 하는 건.
안타깝게도 아빠인 김명현뿐이었다.
* * *
아카데미 지하 던전.
초입부의 마무리 단계까지 공략을 마친 우리 파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한 걸음.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거 안 밀리는데?”
문가은이 낑낑거리며 바위를 밀어봤다.
그리고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
원래도 이 바위 때문에 던전의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갔으니 당연한 일.
“…잠깐 나와봐.”
강주연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룬 마법을 쏘아내려는 모양새.
나와 문가은은 재빨리 그녀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카가가가- 화르륵!
리자드맨을 사냥할 때 크게 활약했던 [라이트 메테오]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본래 [라이트 메테오]는 여러 괴수에게 쏘아내는 광역기에 해당하지만, 저 정도 큰 바위라면 한곳에 모아 쏘는 일점사가 가능했다.
거친 불구덩이 여러 개가 바위에 폭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불꽃의 연기가 사라지고 난 후.
던전 안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
“주연아. 흠집도 안 나는데?”
문가은은 정말 대단하다.
강주연에게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강심장이라니.
화내는 거 무섭지도 않나?
그래도 충격 요법이 효과는 있었다.
“…기다려 봐.”
강주연이 살짝 입술을 베어 문 후.
다시 한번 마법의 준비 자세를 취했다.
아…
저거 아무리 해도 안 될 텐데.
원작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던전 초입 마무리의 저 바위는.
강주연의 마법으로 뚫리지 않는다.
우선 저 바위가 평범한 바위가 아니라, 겉면과 안이 온통 ‘마력석으로 구성된 특수 바위’라는 게 첫 번째 문제다.
마력석은 기본적으로 마력이 담겨 있고, 마력으로 구성된 모든 것들에 친화력이 높다.
따라서 전체가 마력석으로 구성된 이 바위는.
마력을 담은 강한 공격이 날아가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뚫기 힘든 두 번째 이유.
그건 강주연의 마법 계열이 ‘불’이라는 것이다.
불 계열 마법은 아무래도 바위 같은 종류의 사물에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성이었다.
마법 자체도 큰 효과가 없는데, 그마저도 상성의 마법이라… 강주연의 공격은 사실 뭘 해도 바위를 뚫을 수 없었다.
카가가가-
화륵, 화르륵!
또 한 번 [라이트 메테오]가 작렬한다.
이번엔 방금 쓴 것보다 더 위력을 더한 느낌의 공격.
하지만 여전히 어림도 없었다.
단단한 마력석 바위에 살짝 기스가 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바위를 부수는 건 어려웠다.
또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아하하. 주연이도 못하는 게 있네. 신기하다. 아하하하.”
“…….”
제발 그만.
그만해, 문가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분위기.
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앞장을 섰다.
“하- 하하! 강주연 불 마법은 거의 최고인데 안 되는 거 보면, 이거 아마 마법으로는 잘 안 부서지는 바위인가 봐. 어떻게든 힘으로…”
그런데 앞장을 서던 내 몸이 순간 멈췄다.
내가 한 말에.
스스로 이상한 점을 느껴서.
힘으로…?
바위를 매만지면서, 정말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처음 던전에 들어와 리자드맨을 사냥한 후.
운좋게 얻었던 레어룬, [괴력].
레어룬은 노멀룬과 다르게 시작부터 스킬을 파생하거나 특수효과를 지닌 경우가 많고, 그 중 [괴력]은 두 개를 동시에 보유한 케이스였다.
[괴력]의 특수효과.
그건 특정 사물을 들어 올리거나 밀 때, 근력의 2배에 달하는 힘을 낼 수 있다는 것.
우리 앞을 가로막은 이 마력석 바위는.
당연히 ‘특정 사물’의 범주에 들어갔다.
나는 순간 번뜩인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곧장 바위 앞에 자리를 잡으며 문가은을 불렀다.
“문가은. 아까처럼 잠깐만 도와줘.”
“또 밀게? 그거 진짜 꿈쩍도 안 하던데.”
“괜찮으니까 한 번만.”
“흐음… 알겠어.”
문가은이 내 옆에 붙어 자리를 잡았다.
손을 몇 번 털어내며 준비를 마친 나는.
순간적으로 모든 근력을 동원했다.
“흐읍…!!”
온 힘을 다해 밀어내는 바위.
여전히 이동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조금씩 바위가 움직이려 하는 게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어…?”
그리고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옆에서 같이 밀던 문가은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뭐야? 왜 될 것 같지?”
“한 번만 더 해보자.”
“아, 응.”
그그그그-
뭔가 밀리려는 바위의 굉음이 들린다.
하지만 완전히 밀어내기엔 아직 힘이 부족한 걸까.
바위는 밀려나려는 낌새만 보일 뿐.
아직 눈에 보일 정도로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문가은이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와. 도재현 너 근력이 도대체 몇이야? 이게 조금씩 밀려지네.”
“그러게. 나도 놀랐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라 시도해보긴 했지만.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내 근력 수치는 27.
여기서 2배의 힘이면 54의 근력을 가하는 것이니, 확실히 이 단단한 바위가 조금씩 밀릴 만도 했다.
“그래도 지금으로는 이거 못 밀 것 같아.”
“응. 아무래도…”
내 [괴력]에 더해, 근력 수치가 꽤 될 법한 문가은이 함께 밀었는데도 바위가 완전히 밀리지 않았다.
여기서 강주연이 붙어도 똑같을 것 같다.
그녀는 근력 수치와 거의 무관한 마법사 계열 홀더니까.
그렇다면 이 바위를 밀어내는 것.
그리고 초입을 벗어나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그 방법은 하나였다.
“파티원. 더 필요하겠지?”
새로운 홀더를 파티에 추가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