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인재 (3)
다음 날 박진우를 설득하러 온 훈련장.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난 녀석과의 대련에 붙잡혔다.
“하압…!!”
“헙…!!”
챙- 채쟁-
검끼리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훈련장에 울렸다.
하모니처럼 어우러진 기합 소리는 덤이다.
나는 다시 한번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박진우의 공격을 [유수검범]의 묘리로 받아쳤다.
“그 검법! 진짜! 사기네…!!”
“너도! 배워, 임마!”
“필요! 없어!”
우리는 한 음절씩 끊어가며 기어코 할 말들을 했다.
누군가가 훈련장에서 우리를 본다면.
제정신이 아닌 두 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격렬한 대련이었고, 입 터는 것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세지는 거야?’
난 검을 맞대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박진우는 정말 말이 안 되는 녀석이다.
아무리 넘치는 재능과 [구도자의 땀방울]을 타고났다고 해도, 성장 속도가 정말 괴물 수준이다.
나는 전사 계열의 두 교수로부터 [파상검법]과 [유수검법]을 직접 배웠고, 지하 던전에서의 실전 경험으로 능력치와 룬 레벨의 성장을 이뤄냈다.
반면 박진우는 원작처럼 [파상검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실전 경험도 없이 혼자서 훈련만을 지속했다.
그런데도 지금의 나와 동등한 실력을 보이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 15연패로 졌던 녀석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허억… 허억…”
“뒤지게 힘드네… 허억…”
우리의 혈전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나는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며 박진우를 바라봤다.
‘진짜 미친놈이다….’
나도 나름대로 쉬지 않고 성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스승도 없이 혼자 성장한 녀석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해왔는지 감도 안 잡힌다.
스킬은 소용이 없었다.
[연격]은 이미 박진우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스킬들은 일대일로 대련하는 상황에 걸맞지 않았다.
룬도 마찬가지.
[도마뱀의 비늘]이나 [맹독] 같은 변수 창출형 룬을 활용하면 녀석을 이길 수 있겠지만, 생사결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아득바득 대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검과 검으로 맞붙는 실전 대련.
그게 우리의 싸움이었다.
“허억… 너… 근력, 허억… 몇이냐?”
“미, 친새끼… 허억… 너 같으면, 허억… 말해주겠냐?”
“큭큭. 그건 맞지.”
솔직히 능력치는 내가 더 앞서는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난 [룬 사냥꾼]으로 수많은 룬을 얻어냈고, 그 특수효과로 능력치 향상을 몇 번이나 먹었으니까.
하지만 [검] 룬의 성장은 엇비슷하거나 박진우가 더 높은 것 같다.
처음엔 고전하기만 하던 [파상검법]과 [유수검법]을 이제 맞받아치는 것만 봐도, 그를 유추할 수 있다.
“또 간다, 도재현…!!”
“미친….”
그렇게 10분을 더 싸우고서야 대련은 끝이 났다.
누구 하나가 지쳐서 끝난 게 아니다.
대련 도중에 내 검이 부러졌다.
리자드맨들이랑 싸울 때도 느낌이 싸하긴 했는데, 박진우와 정신 나간 대련을 하고 나니 결국 박살이 났다.
더는 대련 진행이 어려웠다.
우리는 그대로 훈련장에 드러누웠다.
사실상 무승부였지만, 박진우는 기어코 자신의 승리라고 우겨댔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던전 공략?”
“어.”
“그거 하면 나한테 뭐가 좋은데.”
“야, 임마. 미발견 던전이라고. 홀더들의 낙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몰라?”
“그게 뭔데 십덕아.”
“이 새끼 진짜 홀더 맞아?”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승낙이나 다름없다.
그간 나와 대련하면서 워낙 친해졌기에…
쉽게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뿐.
성장에 미친 박진우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녀석은 정말 훈련과 연습밖에 모르는 놈이다.
그건 아마 여느 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집안이 불우하지 않고 유복한 탓인 것 같다.
룬 홀더를 직업으로 갖는 대표적인 이유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인데… 박진우는 땅부자에 밭부자 집 아들이라 그런 걱정이 없거든.
녀석은 정말 순수하게 홀더로서의 강함이 좋은 거다.
열혈 홀더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야. 근데 진짜 그 다섯 명만 가는 거야?”
“뭘. 공략 파티?”
“어. 너무 적은 거 아니야?”
“적긴 뭐가 적어. 그 정도 규모 던전이면 5인 파티가 표준인데.”
“그 말이 아니라 신성 계열이 없잖아.”
다른 데선 멍청한 애가, 이런 데선 또 철저하네.
아카데미 지하 던전의 규모는 5인 파티가 정석이다.
앞선을 설 근거리 두 명과 딜링을 할 원거리 두 명.
거기에 보조적인 역할의 신성 계열까지.
파티와 던전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세부 구조가 바뀌긴 하지만, 표준적인 파티 구성은 위와 같았다.
‘저번 공략은 무리였지.’
세 명의 파티에 나 혼자 앞선을 섰던 저번 공략.
그게 사실은 약간의 무리였던 셈이다.
어쨌든 신성 계열은 공략 파티에 중요한 인재다.
자발적으로 파티원들의 치료가 가능하고.
돌발 상황에 신성 마법으로 대처 가능하니까.
하지만 난 이번 공략에도 신성 계열 홀더를 추가할 생각이 없었다.
떠오르는 이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특별히 그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또 지금의 그들이 비밀을 지켜준다는 보장도 없고.
나는 누운 채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상관없어. 대체 가능해서.”
“대체? 뭘로 대체할 건데.”
“포션.”
“포션? 연금술사들이 만드는 그거?”
“어. 그거 말고 더 있냐.”
“미친놈. 너 돈 많아? 엄청 비쌀 텐데.”
“다 싸게 사는 방법이 있다, 임마.”
포션 뿐만이 아니라, 방금 박살 난 내 무기까지.
품질 좋은 제품을 싸게 살 방법이 있었다.
최유민과 최아린.
대장장이 계열의 스페셜리스트 이현호에겐 밀리지만, 꾸준히 자신들의 재능을 개화시켜 훗날 그와 버금가는 특수 계열로 성장하는 홀더들.
특히 최유민이 나중에 개화하게 되는 [철혈의 야장]은 대장장이 계열 룬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에픽룬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지금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제 그걸 떠올리고.
유레카를 외치며 손가락을 튕겼었다.
미지의 던전 중간부를 공략하려는 현 시점.
그녀들은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 * *
중간만 갈 수 있다면, 돈을 쓸어 담는 직업.
룬 홀더.
일반인들에겐 꿈의 직업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사실 전투계열의 홀더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비전투 혹은 생산 쪽을 아우르는 특수 계열 홀더들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도 궁핍하거나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는 게 보통이다.
특수 계열은 재능도 있어야 하면서도, 해당 홀더에게 적당한 수준의 투자도 필요하다.
둘 중 어느 하나 충족하지 못한다면.
특수 계열 홀더로 성공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하물며 학생일 때는 오죽할까….”
재능을 개화하려면 재료가 필요하고, 재료를 얻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최유민은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홀더 의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 의뢰는 대형 화분 옮기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에서의 이동이라, 일반인들이 버거워하는 근력 관련 의뢰였다.
원래는 두 명이 해야 하는 의뢰인데, 워낙 지원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최유민 혼자 하는 의뢰이기도 했다.
건물에 도착하자.
서글서글한 인상의 의뢰인이 나와 있었다.
“아이고! 홀더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아유. 오자마자 일부터 시켜서 미안해요. 오늘도 고생 좀 해줘요. 그래도 오늘은 같이 하시는 홀더님이 있어서 다행이네.”
“같이 하는 홀더요…?”
“몰랐어요? 아! 저기 오시네.”
의뢰인이 가리킨 손가락.
그 끝에는 정말 웬 체격 있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홀더인 걸 알아볼 수 있는 단단한 체격과 근육.
하지만 최유민은 그 얼굴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더라…?’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났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이내 별 말 없이 곧장 화분을 들며 일을 시작했다.
“앗…”
최유민도 그를 따라 바로 일을 시작했다.
누구인지가 뭐가 중요할까.
이 많은 화분을 오늘 다 옮기려면…
오전 시간을 다 써도 부족했다.
‘말도 안 돼….’
최유민은 경악 속에 남자와 화분을 번갈아 봤다.
남자의 근력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 많던 화분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옮겨냈다.
일 처리로만 따지면 그녀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
저 정도 근력으로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마 심심해서 부업으로 잠깐 했다거나, 실전 경험이 부족한 학생 홀더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일이 모두 끝난 후.
최유민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학생이세요?”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곧장 되물었다.
“어? 나 몰라? 우리 같은 수업도 듣는데.”
같은 수업?
그럼 서울 홀더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건데…
생각할 틈도 없이,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력 제어의 기초. 기억 안 나나 보네. 반가워, 나 중급반 도재현이야.”
“도재현…?”
또다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하지만 이번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생각이 났다.
“아! 그 실전 대련에서…”
최유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드디어 떠올랐다.
단단한 체격과 잘생긴 얼굴.
너무도 익숙했던 외관.
신입생 입학 시험 당시.
한창 화제였던 실전 대련의 주인공.
아카데미 동기 도재현이었다.
‘그런데 도재현이 여길 왜…’
최유민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꽤 많이 들어 알고 있다.
실전 대련 한 번으로 단번에 하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승급하고, 한 달 전 아카데미에 출현했던 괴수와도 맞서 싸웠던 홀더.
게다가 이후 꾸준한 성장세로 벌써 중급반에서도 상대할 적수가 없는, D급 홀더 이상 수준의 실력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학기 말 평가에서 최고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 받는…
그로 인해 상급반으로의 월반이 거의 확정적인 사람.
이현호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중급반 최유민 맞지? 특수 계열 홀더.”
“…날 알아?”
“당연하지. 너 보러 여기까지 온 건데.”
최유민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그런 이가 자신을 알고, 심지어는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단다.
수준에 맞지 않는 의뢰까지 도맡아 하면서.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도재현은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해는 크게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곤 이내 품속에서.
웬 통장 하나와 서류, 마력석들을 꺼내 내밀었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그건 마치.
무모한 일거리를 맡기고 부려 먹으려는…
악덕 의뢰인의 얼굴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