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27화 (27/353)

EP.27 도마뱀 소굴 (4)

서울 홀더 아카데미.

전사 계열 교수, 탁원호의 교수실 안.

그간 강의와 운영으로 바빠 볼 시간이 없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인가?”

탁원호가 직접 내린 커피를 찻잔에 담으며 물었다.

한쪽 자리에 앉아있던 김명현이 웃었다.

“학기초 전사 계열 교수회의 이후에 처음이니… 두 달쯤 됐을 겁니다.”

“그 존댓말은 여전하군. 대체 언제쯤 내게 말을 놓을 계획이지?”

“죄송합니다. 워낙 존댓말이 편한 터라.”

자신의 딸 이외의 사람에겐 말을 놓지 않는다.

부드럽고 유연한 교수라고 잘 알려졌지만, 이런 면에선 탁원호보다 더 칼같이 규칙을 지키는 게 김명현이었다.

탁원호가 혀를 차며 커피를 탁자에 놨다.

“마셔라. 간만에 실력 좀 냈으니.”

“손님 대접이 후하십니다. 직접 내리신 커피라니… 잘 마시겠습니다.”

방금 내린 듯 모락모락 피는 연기와 진한 색깔.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이는 에스프레소.

거칠고 딱딱한 탁원호의 성격과.

완전히 정반대처럼 느껴지는 로스팅이었다.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신 김명현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탁 교수의 커피는 쓰군요.”

“리베리카 품종의 특징이지. 향은 적은데, 쓴맛은 강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제게는 아직 낯선 것 같습니다.”

탁원호는 천천히 커피를 들이켰다.

“나는 커피를 마실 때 향을 좇는 게 아닌, 커피 그 자체를 느끼려고 노력한다. 좋은 향만을 좇아 로스팅하다 보면,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커피 품종에 한계가 생기거든.”

쓰디쓴 커피를 단번에 마신 탁원호가 눈을 떴다.

“검술도 마찬가지. 검법이 내는 향만을 좇아 검을 휘두르다 보면, 결국 내가 찾고자 하던 검의 본모습을 놓치게 되지. 마치 마검에 자기 자신을 잡아먹힌 홀더, 황성연처럼 말이야.”

“…과연.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배우긴. 너도 너만의 검술 철학이 있을 텐데.”

탁원호가 얕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 도재현은 어때.”

도재현.

암살자 계열 소속의 신입생 홀더는…

요즘 두 전사 계열 교수의 주 관심사였다.

근래 가르쳤던 제자 중 가장 검술에 재능이 있고, 또 그만큼 성취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다섯을 알아채는 습득력이 있었고, 배운 바를 곧장 훈련으로 체화할 수 있는 응용력이 있었다.

[검] 룬을 보유한 멀티홀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는 전사 계열 소속의 어떤 신입생보다 더 검술에 진심인 홀더였다.

그나마 그와 비슷한 재능을 꼽으라면 전사 계열 수석의 이태준과 중급반의 박진우 정도.

하지만 이태준은 도재현 만큼의 열정이 없었고, 박진우는 스스로가 만드는 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김명현이 살짝 미소를 띠며 답했다.

“더할 나위 없죠. 이런 학생을 전속 제자로 가르친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나도 네가 전속 제자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그러는 탁 교수도 오랜만에 받는 전속 제자 아닙니까.”

“네 안목을 믿은 거지. 실제로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도 했고.”

도재현은 두 교수의 동시 전속 제자가 됨에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파상검법]과 [유수검법]의 복잡한 묘리를 단번에 캐치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후 등록된 룬을 활용하며 두 검법을 융화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당연히 그를 가르치는 두 교수가 신이 안 날 수 없었다.

“궁극스킬은 가르쳤나? 녀석이 유수검법도 꽤 성취를 이룬 걸로 아는데.”

궁극스킬.

룬이 파생시킬 수 있는 스킬 중 가장 강력한 스킬.

그 위력이 너무 압도적이기에…

홀더들의 ‘필살기’라고도 불리는 스킬.

일반적으로는 룬 레벨을 마스터해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이라고 알려졌지만, 특수한 경우와 상황에 따라 미리 익혀지는 경우도 있었다.

김명현은 갑작스럽게 나온 그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궁극스킬이요? 하하. 탁 교수, 농담도 잘하십니다. 도재현 홀더가 뛰어난 재능이긴 하지만, 벌써 궁극스킬을 배울 단계는 아닙니다.”

“그런가? 흠…”

탁원호는 잠시 교수실의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쯤 지하 던전을 공략하고 있을 제자.

도재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왠지 이번엔, 네 안목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

* * *

[보스 룸에 입장하셨습니다.]

[그리즐리 드레이크의 파괴적인 기운이 맴돌고 있습니다. 홀더의 속력과 근력이 저하합니다.]

“그리즐리 드레이크…?”

보스 룸에 들어오자마자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몸.

근력과 속력이 꽤 감소했음을 알리는 신체 반응이었다.

그리고 낯선 괴수 명의 정보창.

그리즐리 드레이크.

온몸이 회색 갈기로 덮인 거대한 드레이크 한 마리가…

보스 룸 한가운데에서 편히 몸을 뉘이고 있었다.

“드레이크면… A급 괴수 아니야?”

김채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A급 괴수.

보편적으로 B급 홀더 5명이 정석적인 파티를 결성해 붙어야 사냥할 수 있다는 괴수.

그마저도 일반적인 A급 괴수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고, 괴수의 성향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 숫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즐리 드레이크.

이 던전의 보스이자, 괴수명 앞에 ‘그리즐리’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특수한 괴수.

일반 괴수보다 얼마나 강할지 가늠 조차 되지 않는다.

막말로 B급 홀더 10명이 붙어도 못 잡을 수도 있었다.

‘근데 우리 파티는…’

하물며 우리는 저등급 위주의 파티다.

B급 홀더는 한 명에, C급 홀더 한 명.

그리고 C급에 가까워진 홀더 세 명.

아카데미로 치면 나름 상급반 주요 파티라고도 볼 수 있는 전력이지만, 정작 홀더의 세계에선 어디에나 흔하게 있는 평범한 파티 중 하나.

그런 파티와 A급 괴수의 대결.

안 봐도 결과는 뻔해 보였다.

“야… 야.”

박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잔뜩 긴장한 녀석의 얼굴에 괜히 나도 목소리가 떨렸다.

“왜… 왜.”

“지, 진짜 싸울 거야? 저거랑 붙었다가 우리 다 뒤질 것 같은데?”

아직은 고요한 기세로 누워있는 그리즐리 드레이크.

만약 눈을 뜬다면.

당장이라도 우리를 짓뭉갤 것 같은 풍채였다.

나는 천천히 녀석을 노려보다가…

이내 웃으며 파티원들을 돌아봤다.

“그치? 우리가 잡기엔 아직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저놈 깨기 전에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

-그르르르….

그리고 거짓말처럼.

공략 포기 후 복귀를 결정하자마자…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눈을 떴다.

씨발, 진짜….

“하아… 박진우. 산개 대형으로 가자.”

“빌어처먹을. 운수도 드럽게 좋은 날이네.”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박진우가 나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산개 대형.

이는 톡신 이구아나를 잡을 때 펼쳤던 일자 대형과 달리, 박진우와 내가 탱커로서 분산되며 각기 다른 괴수들을 맡는 진형이다.

리자드맨과 시즐링 샐러맨더를 사냥할 때 주로 사용했던 대형.

‘지금은 어그로를 끌어야 하니까.’

단 한 마리의 괴수.

처음 보는 괴수이기에 능력치를 확인할 순 없지만, A급이라는 드레이크의 일반적 등급과 보스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박진우와 내 능력치론 절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 서로 산개한 상태에서 어그로를 끌며 놈의 공격을 분산해야 했다.

-그르르으…!!

전투를 준비하던 도중.

너무 시끄럽게 움직였던 탓일까.

조용히 눈만 떴던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포효하듯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울음소리에.

파티원들 전원의 움직임이 멈췄다.

“……!”

나는 이 상태 이상을 잘 알고 있었다.

‘미친. 공포 효과까지 있다고?’

순간적으로 신체를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상태이상 공포.

그리즐리 드레이크는 아무래도 울음소리와 공포가 연동되는 관련 룬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뭐야. 다 왜 멈춰 있어? 안 싸워?”

물론, 공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파티원도 있었다.

박진우.

그가 보유한 또 다른 에픽룬, [명경지수]는 이런 종류의 상태 이상을 무시하고 무조건 평정심을 잃지 않게 해줬다.

…진짜 개사기룬.

저래서 갖고 싶었던 건데.

-그르르으…!! 그르으!!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타겟은 다행히 공포를 당하지 않은 박진우.

녀석은 검을 들어 놈의 돌진을 겨우 막아냈다.

“미친…!! 무슨 근력이…”

그와 동시에 공포가 모두 풀렸다.

나는 재빨리 검을 들고 박진우를 덮친 놈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 몇 초만 지나면 박진우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압…!!”

[날렵한 몸놀림]과 [질주]로 가속화된 속력으로.

[파상검법]의 묘리를 담아 스킬 [연격]을 꽂는다.

본래 [연격]은 [유수검법]의 영향을 받아 베기에 특화된 스킬.

하지만 내가 이번에 꽂아 넣는 [연격]은 세 번을 동시에 베고 난 후, 마무리 찌르기까지 들어가는 동작이었다.

-그르르으…!!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일말의 흠집도 없었다.

놈의 내구 수치가 높은 건지.

아니면 [도마뱀의 비늘] 룬 레벨이 높은 건지.

내 혼신을 다한 공격은.

그리즐리 드레이크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괜찮아.’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이건 그저 어그로를 끌기 위한 공격이다.

타격을 입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리즐리 드레이크는 타겟을 박진우에서 나로 바꿨다.

-그르르으…!!

“흡…!!”

대략 3초쯤일까?

나는 모든 걸 쏟아부으며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정면에서 검으로 막아내는 것부터…

[유수검법]으로 공격을 흘려내는 것.

마지막으로 [단단해지기]를 활용해 그대로 공격을 받아내기까지.

일시적인 탱커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아마 박진우도 나를 도와줄 몸상태가 아닐 것이다.

“도재현, 물러서!!”

그리고 여느 때처럼.

우리를 구원해 줄 문가은의 신호탄이 터졌다.

나는 남아있던 모든 힘을 쏟아부어…

그리즐리 드레이크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쳤다.

캉, 카가강-!!

딜러들의 폭격이 쏟아졌다.

김채은의 빙결 마법, 강주연의 불 마법, 문가은의 지원 사격.

하나 같이 강렬한 공격들이 오로지 한 개체를 사냥하기 위해 쏟아졌다.

단일 스킬의 성능만 놓고 보면 모두 B급 홀더의 스킬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위력의 스킬들이었다.

장관에 가까운 모습.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박진우가 조용히 말했다.

“…해치웠나?”

아.

기어코 그 말을 하고 마는구나.

하지만 박진우의 말처럼, 정말 해치운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온갖 마법과 사격이 쏟아져 연기가 자욱하지만, 그리즐리 드레이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다른 흔적도 없이 사망하며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확인을 위해.

후방의 문가은이 집중한 채 연기 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커진 눈으로, 내게 말했다.

“도재현, 안에…!!”

“……!!”

연기 안엔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있었다.

처음 내 혼신의 일격을 막아내던 때처럼.

여전히 비늘에 어떤 흠집도 나지 않은 채.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은 것처럼…

고고하게 보스 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게 말이 돼?”

파티원들이 침묵에 휩싸였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A급 괴수.

그중에서도 보스 괴수.

그게 이토록 압도적인 벽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쏟아부었는데.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하다니….

그리고 그런 우리를 조롱하듯.

던전을 들어올 때의.

보스 룸을 들어올 때의 정보창이 또다시 나타났다.

[던전 내 스산한 기운이 한데 모여, 그리즐리 드레이크를 감싸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기운과 압도적인 내구력이 그를 보호합니다.]

[그리즐리 드레이크는 면역 상태입니다.]

진짜 구라치지 마….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