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학기 말 평가 (3)
학기 말 평가의 날이 밝았다.
아카데미는 아침부터 긴장한 1학년들로 북적였다.
훈련장은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고, 곳곳에서 자신의 상대를 예측하며 모의 대련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도재현! 여기야, 여기!”
“…….”
김채은과 함께 시험장에 도착했을 땐.
문가은이 벌써 명당을 잡아놓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대련을 구경하고, 이름이 불리면 곧바로 나갈 수 있는 최적의 자리.
역시 이런 일엔 문가은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선수를 치는 속도부터 다르다.
그 옆엔 당연히 절친인 강주연이 있었고…
구석엔 박진우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우! 드디어 왔구만.”
얜 또 왜 여깄어?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박진우?”
“아으, 진짜. 말도 마. 우리 있는 곳에 있으면 도재현 너도 볼 수 있다고, 아까부터 혼자 여기 눌러 붙어있었다니까.”
문가은이 질린다는 듯 부연설명을 했다.
역시 박진우.
열혈 홀더답게 문가은과 강주연의 경멸 어린 눈빛도 마다하지 않은 모양이다.
뚝심 하나는 인정해줘야 하는 녀석이다.
“하하하. 어차피 친구도 없는데, 그나마 도재현과 같이 구경하는 게 최선이지.”
“자랑이다. 에휴. 안 그래도 오늘 아빠가 선 보라고 난리 쳐서 짜증 나는데.”
“선? 무슨 선?”
뜬금없는 문가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현 아카데미의 1학년들은 거의 다 스무 살, 이제 막 성인이 된 학생들이다.
그런 스무 살짜리한테 웬 선?
하지만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는지.
문가은의 이마가 더욱 찌푸려졌다.
“아, 나도 몰라. 우리 아빠 진짜 이상해. 석양의 꽃 후계자랑 만나보라는데, 귀찮아 죽겠어.”
<석양의 꽃>이면 요즘 치고 올라오는 중견 클랜이다.
3대 거대 클랜에 비할 규모는 아니지만, 자신들만의 특성을 살려 국내에서 입지를 키워가고 있는 신흥강자 클랜이었다.
그 클랜의 후계자라면, 아마 아카데미 2학년에 재학 중인 전사 계열 정현석.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우리 또래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냥 소개팅하라는 거 아니야?”
“아빠가 주선하는 소개팅이 어딨어! 어른들이 하면 다 선이지.”
“그런가?”
“조선 시대도 아니고, 딸이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는 건지… 힝. 주연아, 나 불쌍하지.”
“…….”
강주연은 꽤 익숙한 상황인 듯.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곤 내게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어?
지금 나한테 인사한 건가.
나는 얼떨결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어, 어. 안녕.”
강주연과 인사하는 사이?
이거 문가은이 아니라면 정말 귀한데.
왠지 모르게 김채은이 옷깃을 세게 잡는 게 느껴지지만…
착각이겠지.
우리는 빈자리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야. 이렇게 다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네. 거의 한 달 만 아닌가?”
박진우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던전 공략을 했던 멤버.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후 김채은과 몇 번 던전 공략을 가긴 했지만…
어쨌든 초기 멤버가 모두 모인 건 처음이었다.
생사를 함께 했던 사이라 그럴까.
아니면 내가 좋아했던 주연들이라 그럴까.
다른 학생들보다 이들과 같이 있을 때 훨씬 친밀감이 느껴졌다.
“다들 평가 준비는 잘 했어?”
오늘 있을 학기 말 평가.
월반 혹은 강등이 결정되고, 학년 내 석차에도 변동이 생기는 중요한 시험.
그에 관한 화두를 꺼내자, 문가은의 표정이 유독 안 좋아졌다.
“전-혀. 매칭되는 상대 계열이 랜덤이니까, 궁수 계열은 너무 불리해. 안 그래도 아빠가 자꾸 선 보라고 해서 화나는데, 스트레스 두 배야.”
“선이 아니라 소개팅이라니까.”
“아무튼…!!”
문가은의 말대로다.
이런 대련 형태의 결투에서 그녀가 불리하기는 하다.
궁수 계열은 일대일 전투보다 파티를 구성해 움직이는 팀 전투에서 더 빛을 발하니까.
속력이 빠른 전사 계열이라도 만나면.
그대로 승패는 끝이었다.
물론, 대련에서 진다고 엄청난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학기 말 평가는 대련 평가뿐 아니라, 계열별 과목 평가도 진행되기에.
“…….”
가만히 우리 얘기를 듣던 강주연.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내 유일한 B급 홀더.
그 타이틀 하나 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아카데미 전학년을 통틀어도 상대가 별로 없을 정돈데, 학기 말 평가 정도는 손쉽겠지.
별다른 준비를 안 했더라도 자신감 있는 게 이해가 갔다.
박진우 역시 마찬가지.
그는 평소처럼 걱정이 없는 얼굴로 특유의 자신감을 보였다.
“누가 와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붙고 싶은 상대는 있지.”
“누군데.”
“물어 뭐해! 도재현, 너지. 하하하.”
“아, 좀. 질리지도 않냐?”
“전혀! 매 순간 재미있다!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고.”
지가 박지성이야 뭐야….
입학시험 실전 대련 이후로 녀석과 20번은 넘게 싸운 것 같은데, 박진우는 아직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원작에선 이 정도로 박진우를 불타게 하는 경쟁자가 없었는데, 뭔가 내가 개입하고 나니 박진우의 성장 폭이 더 넓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증거로 녀석은 [파상검법]을 배우지 않고도, 원작의 지금 시점을 넘어선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괜히 주인공의 재능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지금 싸우면 내가 이긴다.
나도 녀석 못지않은 속도로 성장 중인 터라.
-지금부터 서울 홀더 아카데미 1학년 1학기, 학기 말 평가. 그 중 마지막인 대련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했을 때 시험장에 나오지 않는 학생은 실격으로 처리되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시험장 중앙의 감독관이 마이크를 들었다.
“오, 시작한다.”
“으으, 긴장 돼.”
“제발 마법사 계열, 제발…!!”
대기석에 자리한 학생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실 계열 상성으로 상대가 매칭되면, 교수들도 다 고려를 하면서 채점을 한다.
불리하면 불리한 대로 많은 점수를.
유리하면 유리한 대로 적은 점수를.
저기 옆에서 ‘제발 마법사 계열…’이라고 빌고 있는 학생처럼, 굳이 계열 상성을 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거겠지.
-첫 번째 경기입니다. 궁수 계열 상급반의 문가은 홀더, 그리고 마법사 계열 상급반의 엄차식 홀더입니다. 두 학생은 시험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 이름이 엄차식이라고?
순간 멈칫했지만…
어쨌든 첫 경기는 문가은의 대련이었다.
평가 시작부터 상급반끼리의 대결.
하지만 경기는 생각보다 일방적이었다.
문가은은 우리 앞에서 우는 시늉을 했던 것과는 다르게, 경기에선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본 실력을 뽐냈다.
[돌고래의 음파]를 활용해 상대 홀더의 마법을 재빨리 간파하고, 우월한 속력을 이용해 그대로 카운터 공격을 날리는 것까지.
마무리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스킬인 [익스트림 샷].
[윈드 아쳐] 룬을 보유한 홀더답게.
수준 높은 궁수 계열의 경기를 보여준 문가은이었다.
“역시 문가은은 다르네.”
“저 정도는 되어야 궁수 계열 원탑인 건가.”
“문가은도 졸업하면 바로 로열 클랜 직행이겠지?”
주변의 동기들도 그녀의 경기에 모두 감탄했다.
강주연이 워낙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탓에 잠시 잊히곤 하지만, 문가은 역시 상급반에서 손에 꼽을 만한 엘리트였다.
“잘한다.”
“…그러게.”
칭찬에 박한 강주연도 이렇게 동의할 정도였다.
그렇게 첫 경기를 필두로 평가 대련이 계속 이어졌다.
상급반과 상급반, 상급반과 중급반.
중급반과 중급반, 중급반과 하급반 등…
계열과 반 등급의 매칭은 랜덤이었다.
하지만 상급반과 하급반은 격차가 너무 심하기에 매칭 설정에서부터 제외한 채 선정이 됐다.
-열한 번째 경기입니다. 암살자 계열 중급반의 도재현 홀더, 그리고 전사 계열 상급반의 김효원 홀더. 두 학생은 시험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아! 아쉽다.”
내 이름이 불리고, 옆에 있던 박진우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직 박진우는 대련 매칭이 잡히지 않은 상황.
자신의 상대가 내가 아닌 게 아쉽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아쉽긴 하다.
김효원이라는 홀더에 대해 잘 몰라도, 상급반 꼬리 정도의 실력이라는 건 대강 들어 알고 있다.
내 입장에선 조금 더 강한 상대와 붙고 싶다.
중급반 홀더와 붙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내 실력을 체크할 수 있는 강한 상대와 맞붙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룬 사냥꾼]을 고려하면 그래야 더 좋은 룬을 얻기도 하고.
‘예를 들면 지윤재 같은…’
내심 맞상대로 지윤재나 안도권과 붙게 되기를 희망했다.
지윤재는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해보고 싶었고…
안도권은 살짝 위험한 상대긴 해도, 괜한 동기 한 명이 죽는 것보단 내가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도 어쨌든 상대가 정해진 이상.
최선을 다해야 싸워야 했다.
“두 홀더, 서로 인사 후 경기 준비하십시오.”
감독관의 말에 따라 나와 김효원은 간단히 악수했다.
그런데 이 김효원이라는 홀더는 생각보다 더 활발한 성격인 것 같다.
악수에 이어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페어플레이 해보자, 도재현.”
“…어? 어, 어.”
친화력이 박진우 급으로 좋은 녀석이다.
대련으로 붙어야 할 상대와 이렇게 친근하게 굴다니.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며 곧장 전투를 준비했다.
허리춤의 단검과 등 뒤의 롱소드.
주력 무기들은 모두 준비가 돼 있다.
내가 멀티홀더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사실.
여기서 두 무기를 동시에 사용한다 해도…
딱히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감독관이 우리의 준비가 끝난 걸 확인 후.
그대로 사인을 내며 시작을 알렸다.
“경기, 시작.”
팟, 파아앗-!
활발한 성격대로 전투 성향도 거침이 없다.
김효원은 시작 사인이 울리자마자, 자신의 검을 들고 그대로 내게 달려왔다.
거침없이 달려 오는 모습이 한 마리 짐승 같았다.
내겐 나쁠 게 없는 전투 구도다.
탐색전 없이 선공을 와준다면 나로서도 환영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등 뒤의 검을 꺼내들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최유민이 만들어 준 단단한 재질의 롱소드가.
꺼내자마자 갑자기 녹아내리듯 형태를 잃어갔다.
마치 녹슨 철검처럼.
검신이 부식되어 산화되고 있었다.
‘뭐지…?’
나는 멍한 상태로 검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이 안 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곧장 생각해냈다.
‘아까 악수할 때!’
김효원은 악수를 넘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뜬금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네길래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그 순간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아마 특수 아이템을 사용해 등 뒤에 있는 내 검을 부식시킨 것 같았다.
내가 비록 암살자 계열이더라도, 듣는 강의로 보나 보여준 퍼포먼스로 보나 [검]을 주력 룬과 무기로 사용한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김효원은 그걸 캐치하고 내 검을 망가뜨린 거다.
상대가 마법사 계열이었다면 쓸 일이 없었겠지만, 어쨌든 나는 전사에 가까운 암살자 계열이고…
그러한 무기 파괴가 먹히는 타입이니까.
상당히 치밀한 전투 준비였다.
“끝이다, 도재현…!!”
김효원이 기합을 내지르며 지척까지 다가왔다.
…페어플레이 하자며, 씨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