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제안 (2)
대한민국 3대 대형 클랜.
<불의 심판>.
거대 클랜이라는 위명답게.
이곳의 정식 클랜원이 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클랜원으로서의 충분한 능력을 갖춰야 하고, 괜찮은 아카데미 성적과 던전 경험 등의 다양한 스펙도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그 앞 단계인 인턴 클랜원 역시 마찬가지.
대형 클랜은 인턴 합격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 인턴 계약 제안이…
아직 1학년인 내게 온 건 큰 기회였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만큼, 쉽게 결정할 문제도 아니었다.
“기간은 어떻게 되는데?”
키위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시고, 강주연에게 물었다.
인턴 클랜원의 계약 기간은 다양하다.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1년.
심지어는 2년으로 책정하고 계약하는 클랜도 있다.
그 정도면 거의 정식 클랜원이지 않나 싶지만…
이런 제도를 악용해 정식으로 클랜원을 받진 않고, 인턴으로 부려 먹기만 하는 악덕 클랜들도 꽤 많았다.
“아마 3개월일 것 같아. 방학이 대충 그 정도 되니까.”
3개월의 인턴 클랜원.
종강부터 다음 학기 개강까지.
빡세게 시간을 잡으면 얼추 맞는 기간이다.
하지만 홀더가 되고 난 후 맞이하는 첫 방학을 모두 인턴 활동으로 쓰기엔, 나도 시간적으로 부담되는 측면이 있었다.
“혹시 두 달로 할 수 있을까?”
“…두 달?”
“응. 아무리 방학이어도 세 달은 너무 타이트한 감이 있어서. 나도 방학 전후로 해야 할 일들이 조금 있거든.”
<불의 심판> 상대로 딜을 거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할 일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번 학기가 끝난 후.
곧 동해 앞에 출현할 S급 괴수, 스월 레비아탄.
녀석의 마력석을 획득하기 위해 포항에 가야 했다.
포항까지 가 사냥에 참여하고, 이후 경매장이 열리는 대구에 가고, 중간중간 쉬면서 놀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걸리는 시간만 어림잡아도 일주일이다.
아무리 인턴이라도 클랜에 들어가자마자 그런 개인 활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 계약 기간을 줄여 입단 시기를 늦춰야 했다.
다행히 그렇게 무리한 제안은 아니었는지.
강주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아.”
“진짜?”
“응. 어차피 1학년을 인턴으로 채용하는 것부터 이례적인 특채라서… 이 정도 요구는 괜찮을 것 같아.”
허락을 받았는데도 괜히 불안하다.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거대한 클랜이라.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그… 네 맘대로 그렇게 막 결정해도 돼?”
“…나 클랜 마스터 딸이야.”
그 한마디에 나는 바로 납득했다.
강주연이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게다가 날 인턴으로 채용하는 걸 처음 제안한 것도 강주연이라고 한다.
던전에서 활약한 내 모습이, 그녀에게 어지간히 괜찮게 보였던 모양이다.
‘너무 좋은데.’
어쨌든 이런 조건들만 충족된다면 나로선 나쁠 게 전혀 없는 제안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 미리 클랜을 경험할 기회이고, 두 달간 <불의 심판> 클랜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훈련하며 부족한 실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클랜원 활동으로 들어오는 월급은 덤이었다.
“그럼… 들어오는 거지?”
“응. 앞으로 두 달간 잘해보자. 강주연.”
“…응.”
나는 웃으며 가볍게 강주연과 악수했다.
그렇게 7월 초부터 두 달간.
<불의 심판>으로 들어가는 인턴 계약을 맺었다.
임시적이긴 해도, 내 첫 클랜 계약이었다.
* * *
[흐르는 물결의 기운을 더 깊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부드러운 당신의 검에 유수의 묘리가 더욱 짙어집니다.]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연과 무기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의 색깔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룬의 성향으로 마력을 1 획득합니다.]
[유수검법]과 [마력제어]의 레벨이 올랐다.
속력 수치는 30을 넘어선 이후로 어지간해선 획득이 쉽지 않다.
관련 룬인 [유수검법]이 5레벨이 됐는데도 속력의 추가적인 획득이 없었다.
하지만 마력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단계.
[마력제어] 레벨이 오르니 가볍게 마력 수치도 얻을 수 있었다.
간만에 훈련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이제 좀 고르게 레벨이 올랐네.’
저번 김효원과의 대련에서 [격투]도 5레벨에 오르면서, 그간 내가 활용하던 룬들의 레벨이 나름 고르게 상승했다.
능력치 상승을 위해 일단 마구잡이로 획득해놨던 룬들.
그 룬들이 꽤 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평가로 새로운 룬들도 얻었다.
김효원을 잡고 나서 얻은 [단단한 지구력]과.
안도권을 잡고 나서 얻은…
[무자비한 돌격]이었다.
<룬 정보>
◎이름: 무자비한 돌격
◎등급: 에픽(Epic)
◎레벨: 1
◎새겨진 부위: 머리
◎특수효과
: 돌격 시 마력이 담기지 않은 물리적 공격을 모두 무시하고, 근력 수치의 두 배에 가까운 힘으로 상대를 가격할 수 있다. 이 효과는 반드시 이동과 관련된 룬의 보조를 받을 때만 활성화되며, 돌격이 끝나면 효과가 끝이 난다.
: 속력 +1
◎파생스킬: -
◎세부정보
: 질주하는 자의 속도가 가속되면, 그 성격은 분노에 가까워진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자의 돌격엔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지닌 룬이 아닌, ‘광폭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얻게 된 룬인데도 선택이 가능했다.
아마 결투가 승리로 끝나기 직전.
그가 마지막까지 활용했던 룬이었기 때문 아닐까.
무슨 이유든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벌써 4번째 ‘에픽룬’을 얻게 됐으니.
게다가 [무자비한 돌격]은 ‘돌격’에 필요한 룬 보조가 있어야만 했다.
애초에 특수효과부터 돌격 시에 적용되는 효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
다행히 나는 [질주] 룬이 있었기에 이러한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다.
역시 룬은 얻어 놓으면 어딘가 분명 쓸 때가 있다.
어쨌든 만족스러운 훈련 성과를 확인한 후.
나는 잠시 자세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짝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 내 훈련을 구경하고 있던 김명현 교수였다.
“움직임이 조금 달라졌네요. 룬 레벨이 올랐나요?”
그는 단숨에 내 검의 변화를 알아봤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그에게 받는 전속 강의 시간.
한동안 안도권 사건 등으로 처리할 일이 많아, 바쁘기 짝이 없던 그의 일정을 겨우 쪼개 얻은 귀한 시간이었다.
“네. 방금 훈련으로 유수검법이 5레벨에 올랐습니다.”
“확실히 빠르네요. 도재현 홀더는 최근 제가 본 재능 중 손에 꼽는 검의 재능을 지닌 것 같아요.”
“…아닙니다.”
김명현 교수의 감탄을 듣자 괜히 민망해진다.
제 재능이 뛰어난 게 아닙니다, 교수님.
[구도자의 땀방울]이 사기인 거예요….
그래도 내가 검에 재능이 있다는 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두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을 문제없이 따라가고, 5레벨이 되어야 얻는다는 [연격] 스킬도 3레벨에 획득했었다.
특히 고위 검법인 [파상검법]과 [유수검법]을 익히는 시간도, 남들에 비하면 상당히 빨랐던 편이니까.
나는 그런 점들을 직접 체험하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각성 때 룬이 전부가 아니구나.’
홀더가 각성할 때 얻는 룬이 해당 홀더의 재능인 건 맞지만, 각성 때 얻지 못한 룬이라고 해서 그 분야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다.
내 첫 룬은 [단검]이었지만…
실은 [검]의 재능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룬을 부여받지 못해 그를 개화하지 못했을 뿐.
멀티홀더로서 다양한 룬을 획득한 지금의 나는, 그러한 룬 재능들을 직접 체험하고 확인해볼 수 있었다.
숙련 과정이 너무 복잡해 시도해보진 않았는데…
어쩌면 마법에도 재능이 있을지 모른다.
“일전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어요. 이번에도 또 채은이를 구해줬다고.”
김명현 교수가 문득 저번 사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처음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마치 야차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분노했었다.
탁원호 교수의 교수실에서 두 교수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었는데… 차분함의 대명사인 김명현 교수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건 정말 처음 봤다.
딸을 살해하려고 했던 동기 홀더.
거기에 배후로 유력한 <빌런> 클랜.
그런 범죄 집단의 흔들기 수단으로 김채은이 희생될 뻔했다는 점에, 그는 교수이기 이전 한 명의 아버지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대화를 끝까지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김명현 교수는 이번 사건을 파헤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보였다.
“당연히 구해야죠. 채은이는 제가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친구니까.”
그 말에 김명현 교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도재현 홀더는 혹시 친구가 없나요?”
“예? 아뇨, 아뇨. 그러니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요.”
여기서 찐따 프레임을 씌워버리네.
역시 겉모습과 달리 무서운 교수다.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도재현 홀더에겐 매번 고맙다는 말만 하는 것 같네요.”
“저도 채은이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혹시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거리낌 없이 말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요. 이건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채은이 아빠로서 하는 약속이에요.”
이건 꽤 매력적인 약속이다.
A급 홀더의 몸값은 비싸다.
무슨 부탁을 하든, 그 정도 고위 인력의 도움을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다는 건 비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도재현 홀더가 도와준 거에 비하면 약과죠. 그럼 이제 다시 훈련할까요?”
“…네.”
쉬는 시간이 너무 길다 싶었다.
김명현 교수의 훈련은 대체로 크게 힘들진 않은 편인데, 요즘 탁원호 교수의 영향을 받았는지 훈련 강도가 점점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었다.
내 힘없는 목소리에 김명현 교수가 웃었다.
“그렇게 풀죽은 표정 하지 마세요. 오늘은 더 재밌는 걸 가르쳐 줄 테니.”
“재밌는 거요?”
매일 똑같은 훈련에 재밌을 거라는 게 있나?
김명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저번에 탁 교수에게 들었는데, 궁극스킬인 파상천검을 사용한 적 있다면서요?”
던전 공략에서 처음 사용에 성공한 [파상천검].
하지만 수준에 맞지 않는 힘에 바로 제한이 걸렸다.
탁원호 교수의 말대로라면… [파상검법]이 10레벨에 오르고, 마력이 30이 넘어야 그를 다시 쓸 수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 그게, 쓰긴 했는데… 조건이 안 맞아서인지 바로 제한이 걸리더라고요. 룬 레벨과 마력 수치를 조금 더 올려야 할 것 같아요.”
“어쨌든 써 본 적이 있다는 거네요.”
김명현 교수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천천히 꺼냈다.
“오늘은 유수검법의 궁극스킬을 가르쳐 줄게요. 사용 조건 자체는 파상검법과 비슷하겠지만… 일단 배워놓으면 도재현 홀더는 언젠가 쓸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웬 떡이냐.
[유수검법]의 궁극스킬, [유수활검].
드디어 김명현 교수의 비기를 배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