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동행 (1)
나는 그동안 [룬 사냥꾼]에 대해 자주 연구를 했었다.
결투의 기준이 무엇인지, 승리의 기준은 무엇인지.
또 룬이 하향되는 단계는 어느 정도인지.
[룬 사냥꾼]은 내가 가진 룬 중 가장 핵심적인 룬이었기에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알아낸 점들이 몇 가지 있다.
‘결투의 기준은 후하면서도 빡빡해.’
단순 일대일 결투가 아닌, 다대일 전투까지 결투로 인정해준다는 점에선 시스템의 기준이 후하다.
하지만 결투 그대로의 의미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오직 ‘전투’만을 결투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로 승패를 결정하거나 동전 앞뒤 맞추기 같은 것은 결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밤의 결투 이딴 것도 안 된다.
오로지 전투.
그것도 괴수 혹은 홀더를 상대로, 룬을 활용해 싸우는 전투만이 적용된다.
두 번째는 승리의 기준.
고의적인 승패 조작이 들어가지 않는 선이라면.
승리의 기준은 꽤 후한 편이다.
‘기여도가 있으니까.’
다대일 전투 상황에서 내가 막타를 치지 않더라도.
기여도만 높다면 충분히 승리가 인정된다.
그동안 그러한 기여도 시스템으로 많은 룬을 얻어왔고, 아카데미 지하 던전에서의 파티 플레이로 그를 증명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숟가락만 얹으면 기여도가 인정되느냐?
그건 또 아니다.
분명 파티 플레이를 했을 때도.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괴수들의 룬은 얻지 못했었다.
홀더 시스템이 판단하기에 기여도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룬 사냥꾼]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간 나왔던 문구도 언제나 ‘높은 기여도’였다.
‘그런데 이건 왜….’
나는 멍하니 정보창을 바라봤다.
한 게 별로 없는데도 [룬 사냥꾼]이 발동됐다.
‘애매한 기여도’라는 말 같지도 않은 단어로 포장된 후.
절반의 승리를 인정받고, 랜덤으로 룬이 얻어졌다.
‘물 탄환을 두 번 막은 게 큰 역할을 했나?’
유일한 가능성은 거기였다.
홀더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을 확률은 절대 없었고, 아마 [철벽수비]와 [유수활검]을 활용해 두 번이나 괴수의 물 탄환을 막아낸 게 주효한 것 같았다.
특히 공격대의 핵심 딜러였던 정선영.
내 주된 방어의 목적이 그녀를 지키는 데에 있었기에, 그런 점들이 기여도로 인정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내 입장에선 공짜로 룬 하나를 얻은 셈이다.
‘이게 웬 떡이냐….’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
S급 괴수의 룬인데다가, 심지어 에픽룬이다.
괴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룬.
그게 무작위 획득에서 나오다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룬 정보를 살펴봤다.
<룬 정보>
◎이름: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
◎등급: 에픽(Epic)
◎레벨: 4
◎새겨진 부위: 입
◎특수효과
: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바다에서 물 마법을 사용하거나 ‘파도’, ‘소용돌이’와 관련된 스킬을 사용할 경우,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 물과 관련된 모든 룬에 성장 증가 및 효과 증폭의 보정을 받는다.
: 물내성+4 마력+3
◎파생스킬
[뉴 웨이브]
◎세부정보
: 온 땅을 덮을 듯한 파도의 물결 속엔 맹렬한 소용돌이가 담겨 있다.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 그 거친 물결을 다룰 줄 아는 자는 곧 물과 바다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이거 진짜 랜덤으로 받아도 되는 룬이야?
뭔가 양심에 찔릴 정도로 효과가 너무 좋았다.
하나 하나 뜯어 보면, 버릴 효과가 전혀 없다.
일단 가장 먼저, 물을 다룰 수 있게 됐다는 점.
[이글거리는 불꽃]과 비슷하게,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는 물을 다루고 물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관련 룬이다.
아직 마법 발현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 파생되는 마법은 없지만, 마력적으로 물을 활용해 공격수단으로 쓸 수는 있었다.
또한 강이나 바다, 혹은 물이 있는 어떤 곳에서든 자유롭게 물을 움직일 수 있다.
이로써 나는 불과 물.
상반되는 두 성질을 다룰 수 있게 됐다.
‘거기에 물 관련 모든 룬에 성장 증가, 효과 증폭? 미친.’
두 번째 특수효과.
이게 진짜 사기다.
얼핏 봤을 땐 물 관련 룬이 없으면 아예 쓸모없는 룬처럼 보이지만.
내가 누군가.
[룬 사냥꾼]을 보유한 홀더 계의 카카시 아닌가.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물 관련 룬을 획득할 기회가 있고, 관련 룬을 얻으면 얻을수록 이 효과는 배가 되어 커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당장 내가 지닌 룬들도 물 관련 룬이 있다.
[파상검법]과 [유수검법].
두 룬은 검법에 관한 룬이지만, 앞에 붙은 명칭처럼 물의 묘리를 검에 담은 룬이기도 하다.
만약 두 검법도 물과 관련된다는 판정이 된다면.
내 핵심룬들을 성장시킬 확실한 기회였다.
‘이건 나중에 실험해봐야겠다.’
언제 한 번 날 잡고 실험해보면.
그 효과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 웨이브]라는 파생스킬.
마법 구현이 안 되는 내게도 생긴 스킬인 걸 보면, 아마 마법의 형태가 아닌 마력 스킬인 것 같다.
조금이라도 물이 있는 곳이라면, 거대한 크기의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스킬이라는데…
아쉽게도 쿨타임이 하루다.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쓰는 스킬.
괴수를 계속해서 잡아야 하는 던전 공략이나 필드 사냥 중엔 활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어쨌든 에픽룬의 파생스킬이니까 어딘가 쓸 일이 있겠지.
덤으로 물내성과 마력을 올려주기까지.
정말 모든 효과가 버릴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면 에픽룬 중에서도 탑급인 것 같은데.’
같은 등급이라고 해서 같은 수준인 건 아니다.
상대의 룬을 복제할 수 있는 [룬 사냥꾼]과 낮은 능력치의 상대로만 효과적인 [위압]을 동일선상에 둘 수 없는 것처럼, 같은 에픽룬이라고 해도 성능과 효과의 차이가 조금씩은 있다.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
S급 괴수가 지니고 있던 이 에픽룬은, 그러한 에픽룬들 중에서도 거의 최고급으로 평가받을 만한 탑클래스 룬이었다.
이런 룬을 랜덤으로 받다니.
역시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고생 많았어요.”
그렇게 혼자 헤벌쭉 입을 벌릴 때쯤.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번 괴수 사냥에서 내가 호위를 맡았던 딜러.
A급 홀더 정선영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건넸다.
“정선영이라고 해요.”
“아!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악수했다.
그러자 정선영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호칭도 오랜만에 듣네요. 맨날 누님, 언니 이런 소리만 들었는데. 도재현 홀더도 봤겠지만… 여기 오는 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아… 그런 것 같습니다.”
나를 비롯한 C급 홀더는 전부 풋내기였다.
하지만 A급 홀더와 B급 홀더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전투 감각이 돋보였다.
재난 괴수 사냥을 많이 해본 듯한 움직임.
게다가 각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적당한 친밀감도 있는 것 같다.
뭣도 모르고 새로 신청하는 C급 홀더들과 달리, A급 및 B급 홀더들은 이런 사냥을 자주 나서는 고인물들인 것이다.
“도재현 홀더의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혹시 아카데미 학생이에요?”
“아, 네. 지금 1학년으로 재학 중입니다.”
“1학년이라고요?”
정선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아니, 내 생각보다 너무 어려서요. 1학년치곤 전투를 너무 잘하던데.”
“정선영 홀더님께서 거의 다 하셨죠. 전 그냥 방패 들고 막은 것밖에 없습니다.”
“검 들고 궁극스킬도 막 쓰던데.”
그녀의 말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역시 봤구나.
못 볼 리가 없지.
대놓고 보라고 썼는데.
거기에 간지나는 언령까지.
그쯤 되면 궁극스킬인 걸 모르는 게 더 바보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알아요. 아마 능력치나 룬 레벨이 안 맞을 거니까. 쓰고 나서 사용제한 걸렸죠?”
“그걸 어떻게…”
“C급 홀더가 궁극스킬 쓰면 뻔하죠. 나도 그랬거든. 어쨌든 도재현 홀더가 엄청난 재능이라는 건 알겠네요. 그 나이와 그 능력치로 궁극스킬을 쓰다니.”
“…….”
한계를 넘어선 스킬 사용.
이건 나만 겪은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선영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뒤에서 도재현 홀더 싸우는 거 보면서, 꼭 한 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저도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혹시 이번 사냥 이후에 일정 있어요? 아카데미는 지금 방학이잖아요.”
포항에서 일어난 S급 재난 괴수.
스월 레비아탄의 사냥.
사실 이 괴수를 사냥하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 녀석을 사냥한 후.
놈의 마력석을 획득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잊혀진 아룡의 석판].
나는 그 아이템을 채울 다섯 개의 마력석 중 하나가, 녀석의 마력석이라고 추측했으니까.
뭐, 아니면 혼자 헛고생한 거지만.
“대구에서 열리는 경매장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경매 우선권을 놓치기는 좀 아까워서….”
“어. 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 나도 대구로 갈 생각인데.”
“예? 저랑 말입니까?”
“혼자 가기 심심했거든요. 오랜만에 만난 천재 후배님이랑 이야기도 할 겸 좋을 것 같은데. 왜, 별로예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다.
정선영은 홀더 계에서 잔뼈가 굵은 A급 홀더.
이론에도 빠삭하고, 경험도 많아 배울 점이 많다.
대구에서 지내는 2,3일 간.
그녀와 함께 지내면 분명 얻어가는 게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재현아-! 괜찮아-?”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한 홀더.
단짝 친구인 김채은.
나는 그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정선영은 얼음 계열 룬에서 거의 최고 수준에 다다른 홀더인 것 같다.
한국의 S급 홀더 중 [빙결]을 다루는 홀더는 없으니까.
그리고 김채은 역시.
[빙결]을 다루는 마법사 계열의 희귀 자원이다.
재밌게도 두 사람의 계열이 같았다.
같은 계열의 탑클래스 홀더를 만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기회.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정선영이 농담 하나를 던지더라도 김채은은 노트에 메모할 것이다.
나는 김채은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선영에게 물었다.
“혹시 제 일행이 한 명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여자친구?”
“아, 그건 아니고…”
“여자친구 맞네. 뭐, 내 앞에서 애정행각만 안 하면 괜찮아요. 시집 못 간 여자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화가 주체 안 될 수도 있거든요. 푸흐.”
어딜 가도 대우받는 A급 홀더에 딜러인 마법사 계열.
거기에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결혼을 못 했다기보다 안 한 것에 가깝지만…
이건 성격 좋은 그녀가 건네는 나름의 농담이었다.
나 역시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셋은 부산물 처리 중인 스월 레비아탄의 시체를 뒤로하고, 대구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