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6 복귀와 점검 (1)
한현민이 무너졌다.
10억 단위로 경쟁하던 가격에서 갑자기 70억을 지른 걸 보면, 아마 남아있던 클랜의 지원금을 모두 쓴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그의 자금을 덜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내가 그의 성향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양의 꽃 소속, 한현민. 원작에서 한 번 다뤄진 적이 있지.’
한현민은 승부사다.
누구보다 침착하게 경매에 임하면서도,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지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경쟁자들을 절대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처음 본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고, 상대가 누구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경매장의 승부사.
전장보다 경매장에서 더 빛나는 홀더였다.
‘처음부터 빌드업을 잘 짰어.’
나는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경매의 시작부터 독특한 경매 방식을 선보였다.
경매의 모든 품목에 첫 호가를 담당했고, 이후 경매엔 참여하지 않는 방식.
덕분에 미감정 아이템을 5개나 가져왔다.
대박 수준의 성과까진 아니어도, 확실히 평범하진 않은 낙찰 방식이다.
그리고 이는 한현민에게 특별한 인식을 심게 했다.
풋내기 홀더인 내가, 경매에서는 능숙한 경험자?
와 같은 인식을.
그는 아마 오래도록 내 경매를 지켜봤겠지.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가 가격 경쟁에 참여할 때.
확신했을 것이다.
분명 내게 미감정 아이템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룬이나 아이템이 있다고.
‘그딴 게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사실은 좆도 아무것도 없는 허세였다.
한현민은 경매에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기본적인 것들을 많이 놓치고 있었다.
어찌 됐든 내가 풋내기 홀더라는 점.
소화할 수 있는 자금의 풀은 그리 넓지 않다는 점.
원격 감정 스킬 같은 건 지금껏 경매에서 나온 적이 없다는 점 등…
잘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여길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름 모를 미감정 아이템에.
70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돈을 썼다.
경매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자신감에 취해, 자신의 판단은 모두 옳다고 느낀 것이다.
일종의 자승자박에 빠진 셈이었다.
덕분에 나는 마력석 경매의 가장 큰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한현민은 심지어 스월 레비아탄 사냥에도 참가했거든.
지독한 놈.
녀석은 특별경매권을 따고 싶어서, 목숨 걸고 재난 괴수 사냥까지 오는 놈이었다.
“재현아.”
“응?”
그러던 와중.
옆자리의 김채은이 조용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왜 더 안 질렀어? 돈은 더 있었잖아.”
70억.
엄청난 액수의 돈이지만, 사실 나도 그만큼의 돈을 쓸 수 있다.
이번 경매에 참여하기 전.
김채은으로부터 약 40억 원을 빌리는 계약서를 썼었으니까.
김채은의 돈은 최대한 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40억으론 원하는 물건을 못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는 내가 원한다면 그냥 줄 수도 있다는 큰일 날 소리를 했지만, 내가 극구 만류하며 설득한 탓에 계약서를 작성했었다.
…얘, 나중에 한번 거하게 사기당하는 거 아닌가몰라.
어쨌든 덕분에 내 수중엔 80억 원의 탄알이 있었다.
5개의 미감정 아이템을 구매하고도 남은 액수다.
“괜찮아. 어차피 살 생각 없었어. 말했잖아. 난 마력석을 사려고 한다고.”
혹시나 누가 들을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방금의 작전으로 마력석 구매의 확률이 더 높아졌다.
사냥에 참여했던 A급 홀더들은 괴수의 부산물보단 일반 경매에 더 관심이 많았고, B급 홀더들은 80억을 넘어서는 금액으로 마력석을 구매하기에 부담이 있었다.
C급 홀더들은 뭐,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높고.
S급 마력석이라는 희소성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이 정도의 고위 마력석은 연구자 혹은 제작자들에게나 가치가 있지, 직접 전투 홀더들에겐 큰 쓸모가 없었다.
-세 번 호가하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57억, 57억, 57억… 축하합니다. 서른네 번째 경매품은 57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예스! 성공이다.’
이후 경매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스월 레비아탄의 마력석.
S급 마력석은 57억 원이라는 거액에 내 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스월 레비아탄의 아가미, 가죽 등 다양한 부산물이 경매되었고, 정선영은 원하던 아가미를 가져갈 수 있었다.
나는 남은 돈으로 하나의 경매품을 더 샀다.
[서리가 낀 스태프].
얼음 계열 마법사 홀더에게 매우 효과적인 레어급 지팡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선뜻 빌려준 김채은에게 고마워서 주려는 선물이었다.
“S급 마력석, 서리가 낀 스태프, 그리고 미감정 아이템 총 다섯 종류. 수령자 확인했습니다.”
경매가 끝난 후.
우리는 6층의 수령 데스크에 와 경매품들을 모두 받았다.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러 내가 찾던 마력석이 맞는지 확인을 했다.
[잊혀진 아룡의 마력석이 채워집니다. 석판이 묘한 힘의 기운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됐다!’
그리즐리 드레이크의 마력석 때처럼.
이번에도 정보창이 뜨며 이 마력석이 정답이었음을 알려줬다.
예상이 적중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거의 죽을 위기를 겪으며 개고생을 하고, 57억 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들여 겨우 한 아룡의 마력석을 채웠는데…
나머지 3개는 또 어떻게 채워야 할지.
게다가 스월 레비아탄과 다르게, 나머지 녀석들은 특별한 정보도 없다.
괴수의 등급도, 룬이나 특징도 모르니 솔직히 조금 막막하기는 했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전설룬을 그렇게 쉽게 얻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빌런> 소속인 지윤재도 성공했었다.
나는 그보다 더 상황이 좋다.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니?”
다시 데스크로 돌아오자.
정선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일전에 말했던 대로.
스월 레비아탄의 아가미만을 구매하고, 수령했다.
정말 연구 호기심 외엔 별다른 욕심이 없는 홀더다.
“네. 아마도요. 선배님은 어디로 가세요?”
“글쎄, 계획은 없었는데….”
정선영의 눈빛이 김채은으로 향한다.
김채은도 그녀를 마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뭐야, 이거.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귀여운 제자 한 명이 생길 것 같아서.”
“어? 채은이 전속 제자로 받으시려고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솔직히 이를 염두에 두고 같이 오기는 했었다.
어쨌든 정선영은 빙결 쪽에선 최고 수준의 실력을 지닌 A급 홀더고, 김채은도 재능에선 쉽게 밀리지 않을 홀더니까.
두 사람의 시너지는 좋다 못해 넘쳐 흐른다.
하지만 정선영은 클랜조차 가입하지 않은 무소속 홀더.
자유로운 느낌이 강해 붙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득이긴 하지.’
그래서 그저 인맥을 튼 선에서 만족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린 모양이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어째선지 김채은이 그녀의 제자가 되는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선영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전속 제자까지는 아니고, 일단은 방학 때만 잠시란다. 나도 재난 괴수 사냥이 아니면 지금은 휴식기라서, 시간은 나는 편이거든.”
“그럼 채은이는 선배님 따라서 가는 건가요?”
“응! 아빠한테도 미리 연락해뒀어.”
김채은이 뒤에서 말을 덧붙였다.
벌써 아빠에게까지 연락했다니.
역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땐 거침없이 직진하는 김채은답다.
“어쨌든 서울로 가는 워프 게이트는 재현이 혼자 가야 할 것 같네. 우린 잠깐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거라.”
“네. 그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서울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
이번 경매에서 얻은 물건들도 정리해야 했고, <불의 심판> 입단을 위해 준비할 것들도 꽤 있었다.
‘무엇보다 점검이 필요해.’
스월 레비아탄의 사냥과 경매가 끝난 후.
나는 전반적인 홀더 정보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홉고블린 부락’부터 시작해 스월 레비아탄의 사냥까지.
새로 얻은 룬과 성장을 거듭한 룬이 많았기 때문.
특히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는 특수효과가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그럼 슬슬 헤어질까?”
“네. 이틀 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고생은. 방패 들고 앞선에 있던 네가 고생했지.”
정선영에겐 고마운 일들이 많았다.
스월 레비아탄 사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준 것도 그렇고, 이후 대구까지 동행하며 경매를 함께한 것도 그렇고…
홀더 계의 선배로서 그녀는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 만한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임시적이라곤 하나, 김채은을 제자로 받아준 일.
희귀한 마법 계열인 [빙결]의 특성상.
정선영 같은 스승을 만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이 있는 김채은에게 이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근데 진짜 왜 받아준 거지?’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답이 안 나온다.
두 사람이 함께 방을 썼던 어젯밤에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저 싹싹하고 착한 김채은의 인품이 정선영의 마음을 흔들었을 수도 있다.
김채은은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격을 지녔으니까.
‘까먹은 건 없겠지? 아이템도 건네줬고.’
김채은에겐 [서리가 낀 스태프]도 미리 건네줬다.
값비싼 레어 아이템이라 그런가?
그녀는 아이템을 받은 후.
너무도 행복한 얼굴로 기뻐했었다.
마치 내 [요리]를 먹을 때의 표정.
…뭔가 PTSD가 올 것 같은데.
그래도 받는 사람이 좋아하니, 선물한 나도 기분이 좋았다.
“헤헤. 고마워, 재현아. 연락할게!”
“응. 너도 조심히 다녀와.”
그렇게 우리는 경매장 건물을 나선 후.
방향을 틀며 서로 갈라지기로 했다.
그런데 헤어지기 직전.
문득 정선영이 멀어지던 내게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선 내 귓가에 손을 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재현 씨.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여자는 지친단다.”
“…네?”
뜬금없이 뭔 소리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정선영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 조카 같아서 해주는 말이란다. 잘 한번 생각해보렴.”
그렇게 부산으로 떠난 두 사람.
혼자 남겨진 나는…
건물 난간에 가만히 걸터앉은 채.
정선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조카 같아서 해주는 말이라는데…
솔직히 너무 수수께끼 같잖아.
에라 모르겠다.
답은 안 나오고, 배는 고프다.
“…그냥 밥이나 먹을란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나는 대구 막창을 시원하게 혼밥으로 제끼며 주린 배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