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새로운 효과 (4)
거대한 파도가 실내 연무장을 덮친다.
물병의 적은 물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방대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많아진 양.
이 정도면 새끼 스월 레비아탄 정도는 강림한 거 아닐까?
하지만 파도의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어렵네.”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는 4레벨의 에픽룬이지만,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룬은 아니다.
레벨은 꽤 높아도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룬을 활용해 물을 다루는 것도, 파생스킬인 [뉴 웨이브]를 조종하는 것도.
모두 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거기에 박진우는 속력에 치중된 전사 계열.
단단함보단 스피드에 집중되어 있고, 방어보단 회피를 잘하는 홀더다.
내가 지은 날쌘 개구리라는 별명답게, 처음 보는 마력 스킬에도 당황하지 않고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
그리고 중간중간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 비겁한 새끼! 전사들의 싸움에서 마력 공격이라니!”
“나 암살자 계열인데?”
“씨발! 암살자가 무슨 파도를 일으켜. 존나 빌어먹을 계열이네.”
상당히 억울함이 많아 보이는 외침.
박진우는 그렇게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내 공격을 피해냈다.
분명 물 내성이 없어 공격이 들어가기만 하면 데미지가 클 텐데, 워낙 속력도 높고 날랜 룬을 많이 보유한 녀석이라 잡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쓰자.’
나는 [소용돌이를 삼킨 파도]의 활용을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어거지로 이 룬을 써봤자 큰 효율이 없었다.
마력 공격 룬에선 아직 [이글거리는 불꽃]이 더 익숙하다.
물 계열 룬은 던전에서 더 숙련도를 높이고 대련에서 쓰는 게 나아 보였다.
마음을 고쳐 먹고,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든다.
이어 곧장 박진우에게 던지는 네 자루.
[쿼터 나이프].
박진우는 그 경황 없는 와중에도 단검을 모두 피해냈다.
“지독한 놈. 거기서 또 단검을 날려?”
“그걸 피한 너도 대단하다.”
무구 교체술 덕에 내 손엔 다시 양손검이 들려있었다.
나는 박진우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며, [파상검법]의 묘리를 이용해 그대로 검을 찔렀다.
캉- 카강!
또 한 번.
박진우의 검과 내 검이 부딪혔다.
여기서 나는 직감했다.
사실상 끝이라고.
박진우는 시작부터 [회전 연격]을 회심의 일격으로 썼지만, 내 [철벽 수비]에 막히면서 유효타를 입히지 못했다.
[쫓을 수 없는 쾌검]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를 자랑하긴 해도, [회전 연격]이 아니면 지금의 내게 별다른 타격을 줄 수 없다.
방어 룬이나 스킬도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에 카운터를 먹일 반격기도 다양하기에.
게다가 속도를 추구하는 박진우가 검으로 검을 막았으니, 얼마나 지금 불리한 상황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글거리는 불꽃.’
대련을 마무리짓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을 타고 피어오르는 불길.
[이글거리는 불꽃]의 발현이다.
이렇게 서로 가까워진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불 계열 마력 공격은 전사 계열에게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그 자신만만하던 신유나도 당해내지 못했으니까.
검과 검을 타고 넘어가는 불길.
뜨거운 그을림이 박진우를 덮치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쫓아라.”
“뭐?”
아니, 씨발.
언령이라고?
욕이 절로 나온다.
나는 당연히 이 언령에 대해 알고 있다.
‘쫓아라’는 [쫓을 수 없는 쾌검]의 궁극스킬인 [비월참]의 언령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아니, 진짜 말이 돼?
[회전 연격]을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궁극스킬을 사용하는 거야.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박진우의 검은 순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내 허벅지 앞에 도달해 있었다.
‘미친… 단단해지기!’
한계를 넘어선 속력의 끝.
그 안에서 대처할 방법은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도마뱀의 비늘] 파생스킬인 [단단해지기]로 내구를 높이고, [육탄방어]로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하지만 궁극스킬이 괜히 궁극스킬일까.
[비월참]은 극한의 속력을 활용해 대상을 총 17번 베어내는 스킬이다.
고도로 집중된 속도는 내구의 한계마저 넘어서며, 기어코 내 피부를 뚫어냈다.
“끄읍…!!”
씨발….
뒤지게 아프네.
다행히 최대한 빨리 [단단해지기]를 사용한 덕에 막대한 피해까진 막을 수 있었지만, 허벅지 쪽에 깊은 자상이 남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더 이상의 대련은 불가.
그걸 깨달은 박진우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야…야, 괜찮냐…?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이거… 그, 빨리 치료소로…”
“괜찮아, 새끼야.”
나는 괜히 말을 거칠게 하며 박진우를 안심시켰다.
박진우가 순간 너무 몰입한 탓에 대련의 정도를 넘어선 공격을 가하긴 했지만, 그 정도 실수는 내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스스스-
연녹색 기운이 담긴 내 손길이 허벅지에 닿는다.
이내 깊게 베어진 허벅지의 자상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솟구치던 피도 점점 멎어갔다.
신유나와의 대련을 이기고 획득한 [전투치유]의 발현이었다.
볼 땐 짜증 났는데, 내가 직접 하니까 기분이 남다르다.
이 황당한 광경을 바라보던 박진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냐, 그건 또…?”
“이거?”
<룬 정보>
◎이름: 전투치유
◎등급: 레어(Rare)
◎레벨: 5
◎새겨진 부위: 오른쪽 손바닥
◎특수효과
: 전투 도중 대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다룬다. 이는 일반적인 치유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지만, 시전 시간이 대폭 줄어 빠른 활용이 가능하다.
: 신성 +4
◎파생스킬
[응급처치]
◎세부정보
: 신성술의 기초인 치유를 전투 도중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룬인데.
녀석에겐 안 보이겠지.
성능은 일반 [치유]보다 떨어지지만, 전투 도중 빠른 시전으로 급한 상처의 치료가 가능한 룬의 효과 덕에…
허벅지 자상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갔다.
게다가 파생스킬인 [응급처치]의 효과는 더욱 좋다.
스킬을 사용하고 치유를 썼을 때, 상처가 10초 안에 발생한 상처일 경우… 치유의 효과가 두 배로 늘어난다.
쿨타임은 1시간으로 꽤 길지만, 지금의 내겐 이 상처만 치료하면 게임 끝이었다.
어느새 허벅지의 상처는 모두 아물어 버렸고, 아까처럼 움직이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어졌다.
박진우가 실수까지 하며 날렸던 회심의 궁극스킬이…
[단단해지기]와 [응급처치]라는 두 스킬로 상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너 이제 궁극스킬 못 쓰지? 뒤졌다. 다시 덤벼.”
“…….”
미안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박진우의 표정에 생기가 사라졌다.
굉장히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억울하면 너도 힐러 하든가….
* * *
“젠장, 또 졌네.”
연무장에 대 자로 뻗은 박진우가 말했다.
그 옆엔 나도 기진맥진한 채 대 자로 몸을 뻗고 있었다.
“이제 31승 11패고요.”
“넌 대체 왜 싸울 때마다 강해지는 기분이냐. 좀 좁혀졌다 싶으면 멀어져 있단 말이지.”
“네가 할 소리냐? 뜬금없이 궁극스킬 배워와서 쓰는 놈이 무슨….”
“오우… 뒤지게 약한 거 봤잖아. 네 방어스킬 하나에 막히는 거. 숙련도 낮아서 써 먹기도 힘들어.”
맞는 말이긴 하다.
아무리 내 [단단해지기]와 [응급처치]가 좋은 효율을 보였다곤 해도, 한 홀더의 궁극스킬이 그렇게 바로 막혀버리는 건 쉽게 보기 힘들다.
아마 박진우가 [비월참]을 익힌 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탓에 숙련도가 너무 낮아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내가 사용제한 궁극스킬로 [파상천검]이나 [유수활검]을 얻은 것과 비슷한 케이스겠지.
“근데 너 진짜 사람 맞냐?”
옆에 누워있던 박진우가 물었다.
목소리에 장난이 끼지 않은 진지한 물음이다.
“뭔 개소리야, 그건 또.”
“아니, 그렇잖아. 전사 계열이라는 놈이…”
“암살자 계열.”
“그래. 암살자 계열이라는 놈이, 무슨 불도 쓰고 물도 쓰고 치유까지 쓰고. 그게 말이 돼?”
“멀티 홀더잖아.”
“그건 그렇지.”
역시 단순한 놈이다.
멀티 홀더라는 이유 한 번에 납득해 버리는 박진우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누구한테 말하진 마라. 내가 이 정도로 다양한 멀티 홀더라는 거 너밖에 모르거든.”
“김채은도 몰라?”
“갑자기 김채은은 왜 나와?”
뜬금없는 이름에 되물었다.
박진우는 누운 상태로 날 힐끔 보더니 말했다.
“너 김채은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냐?”
“뭐?”
이런 소문이 맴도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박진우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어쩌면 아카데미에 떠도는 악성 루머의 근원이 이 녀석일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
이런 완벽한 마무리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C급 승급이나 해놔.”
“오우… 귀찮아.”
“아오, 진짜. 좀 해놔. 어차피 너 방학에 할 것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박진우가 민망한 듯 얼굴을 긁었다.
<불의 심판> 인턴으로 들어간 나와 달리.
박진우는 방학 때 할 게 없는 백수였다.
C급 승급 안하는 것도 정말 귀찮아서가 이유일 거다.
“너 승급하면 내가 바로 던전 하나 찾아서 데려간다. 아카데미 지하 던전 급으로. 콜?”
나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구미를 당길 만한 제안을 던졌다.
훈련, 성장, 대련…
그리고 던전 공략.
이는 박진우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다.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러자 귀찮음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그리고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
“콜.”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단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