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5 불의 심판 (1)
다음 날.
<불의 심판> 인턴으로 들어온 후 첫 출근.
난 클랜 타워 엘리베이터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안녕? 바로 또 보네.”
“…….”
오늘도 돋보이는 붉은 머리의 단발.
신유나는 뭔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인사도 안 받아주는 거야? 나 무안한데.”
“안녕….”
대련할 때의 말 많던 신유나는 어디로 간 걸까.
역시 도발할 땐 사람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웃음이 나오는 걸 느끼며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눌렀다.
“25층 맞지? 사냥 5팀 부서.”
신유나는 말없이 내 행동을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너 몇 살이야? 듣기로는 아카데미 학생이라던데.”
“나? 스무 살인데, 왜.”
“…근데 왜 자꾸 반말하는 거야? 난 스물셋에 아카데미도 졸업한 선배인데.”
뭐야, 꼰대였어?
그녀의 말에 난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세 살 차이면 거의 친구지. 그리고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
거슬리면 먼저 존댓말 했어야지.
권오준처럼 첫 만남부터 물어본 것도 아니고.
이젠 반말이 입에 붙어서 존댓말 하라고 해도 안 나온다.
정론에 할 말을 잃은 신유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몇 초 있다가 또 말을 꺼냈다.
“먼저 반말했던 건 미안해. 대련에서 도발하려다가 그게 입에 붙었나봐.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아, 됐어 됐어. 우리끼린 그냥 반말하자. 너도 그게 편하잖아-”
잠시 입을 오므리던 신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른 클랜원들한텐 존댓말 해야 해. 대부분 우리보다 선배고, 그분들도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니까.”
“권오준 팀장님은 반말하던데?”
“그건….”
“농담이고. 그 정돈 알지. 걱정 마.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이런 이야기는 충분히 받아들일 만했다.
솔직히 신유나와도 첫 단추가 잘 꿰매졌다면.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선배 대우를 해줬을 텐데….
첫 만남부터 서로 도발하고 치고박고 싸우는 대련으로 시작했으니, 이젠 존댓말을 하는 게 오히려 어색해져 버렸다.
신유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호칭은 홀더님으로 통일하면 돼. 일반 클랜원과 선임 클랜원이 구분되긴 하는데, 직위에 상관없이 거의 홀더님으로 불러.”
“팀장님은? 저번에 보니까 팀장님으로 부르던데.”
일전에 신유나가 권오준을 팀장님이라고 부른 게 생각나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질문에 답했다.
“팀장님이나 본부장님처럼 특수 직책에 있는 분들은 직책으로 불러도 괜찮아. 팀장님도 공식적인 직위는 선임 클랜원이라서… 부르는 호칭 자체는 크게 상관이 없어. 대신 마스터나 부마스터는 꼭 직책으로 불러야 해.”
“님 자도 붙이면 안 돼?”
“응. 마스터, 부마스터. 다들 이렇게 불러.”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우리는 클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제까지 그렇게 싸워대고 도발하던, 그리고 방금까지 어색하던 사이가 맞나 싶다.
신유나의 표정도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
아마 이것저것 가르치는 모양새나 문답에서 내가 신입이라는 게 확 와닿은 모양이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진 그녀가 막내였을 텐데…
새로운 막내가 들어온 것만으로 재밌을 것이다.
살짝 신이 나 보이는 신유나가 내게 물었다.
“저기, 또 궁금한 건 없어?”
“궁금한 거? 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따로 해야 하는 거라도 있나? 아무래도 첫 출근이라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내 자리도 모르는데.”
“음. 아마 출근 첫날은 OT를 들을 거야. 운영OT랑 업무OT, 두 분야로 나눠서.”
“오리엔테이션?”
“응. 보통은 사수를 지정 받아서 배우거든. 클랜 일도 회사 일 비슷하게 배울 내용이 꽤 많아서. 근데 넌 인턴이라서 사수가 어떻게 지정될지 모르겠네….”
띠링-
그리고 이런 고민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부서에 도착하자마자 금세 해결됐다.
25층.
사냥 5팀 사무실.
그 안 중앙에 자리한 팀장실.
거기서 마주한 권오준은 별거 아니란 얼굴로 말했다.
“그거? 유나 네가 사수 역할을 해주면 돼.”
“사수요? 제가요?”
옆에 있던 신유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당황해 물었다.
“어. 어차피 재현이는 인턴이라서 장기간 부사수 교육 자체가 어려우니까, 단기간으로 유나 네가 맡아주면 된다. 이건 아가씨도 동의한 내용이야.”
‘인턴이라서’라는 단어에 괜히 흠칫했지만, 강주연도 동의했다니 부당한 업무 처리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두 달간 클랜원으로 활동하는데, 해당 클랜에서 활동하는 모든 장점을 흡수해 가겠다는 것도 오만한 생각이다.
난 그저 짧은 기간 동안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대형 클랜이 운영되는 프로세스만 체득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저도 신입 클랜원인데…”
“어, 알아. 그래서 맡긴 건데? 원래 신입 마음은 신입이 제일 잘 알잖아. 특히 재현이는 특별 채용이라 아무것도 모를 거야. 잘 이야기해줘라. 운영OT만 하면 되니까 너무 부담가지진 말고.”
권오준의 시니컬한 말에 신유나가 되물었다.
“아, 업무OT는 제가 안 하나요?”
“당연하지. 그건 사냥이나 작전 나가서 해야 하는데, 신입한테 그것까지 맡기겠냐. 아마 그땐 작전 맡는 선임 클랜원이 사수 역할 해 줄 거다.”
한 마디로 정식 사수까진 아니라는 뜻.
그 말에 신유나의 표정이 한시름 놓이는 게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내일 작전 회의 들어갈 때 어리바리 안 하게 잘 좀 교육해 놔. 아, 그렇다고 너무 빡세게 다루진 말고. 유나 너, 재현이한테 지잖냐.”
“그건…!!”
권오준이 ‘풉’하고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신유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팩트라서 반박도 못할 텐데….
괜스레 신유나가 불쌍해진다.
“나 바쁘다~ 나가라, 이제.”
거기에 반박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권오준의 축객령에, 우리는 팀장실을 나와 다른 사무실로 향했다.
여전히 부끄러운지 신유나의 표정이 안 풀린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가, 가끔 후배로 들어온 클랜원이 선배 클랜원들을 따라잡는 경우도 많아. 홀더마다 룬과 재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니까 그건 따라잡은 후배가 잘한 거지, 선배가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슨 속사포 랩을 하는 건가.
이 긴 말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알지, 알지. 실망하지 마. 너도 엄청 잘 싸웠어. 내가 만나 본 전사 계열 중에선 손에 꼽을 정도로 정석적이던데.”
“읏… 내 얘기 하는 거 아니야…!”
그녀는 끝까지 발뺌하며 부정했다.
패배가 꼭 부끄러운 건 아닌데, 나랑 했던 대련 결과가 어지간히 창피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가벼운 아침의 해프닝이 끝나고 난 후.
난 사냥 5팀 사무실의 신유나 자리로 와, 클랜과 팀에 관한 이런저런 내용을 배우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던 ‘운영OT’라는 이름의 오리엔테이션.
2시간이 넘어가는 지옥의 OT였다.
“ … …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클랜 수칙, 그리고 클랜 타워를 이용할 때의 주의사항이야.”
“…너무 많아.”
어느 오리엔테이션을 듣든지 마찬가지겠지만…
홀더 계의 규칙.
클랜 내 주의사항은 유난히 양이 많았다.
그만큼 홀더 간에 지켜야 할 예의도 많고, 클랜원 간에 조심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한참 동안 설명을 듣고 나서야 클랜에 관한 주제가 끝이 났다.
신유나는 내 푸념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심해. 거의 끝났으니까. 이제 우리 팀 인원 얘기만 하면 끝이야.”
“오케이, 준비 완료. 들어와.”
“풋-”
가볍게 던진 농담에 신유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나긴 설명과 인수인계에 그녀도 나름 지쳤던 모양이다.
이 정도 농담에도 웃는 걸 보면.
…그나저나 웃으니까 예쁘긴 하네.
붉은색 머리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렇지, 신유나 역시 아카데미 시절 몇 번이나 대시를 받았을 법한 미인이었다.
“우리 사냥 5팀은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계열 대분류 별로 총 2명씩의 클랜원들이 있고, 이번에 너랑 강주연 홀더님이 들어오셔서 14명이 됐어.”
“14명? 팀인데 인원이 그렇게 많아?”
“응. B급과 C급으로 세분화되어 있거든. 계열별, 등급별로 인원이 1명씩 있는 거지.”
그러니까 계열 대분류 상 여섯 개의 각 계열에 2명씩이 있고, 거기서 다시 B급과 C급으로 세분해 인원을 선별했다는 뜻이다.
신유나는 그중 C급에 해당하는 전사 계열 인원이고.
하나의 ‘팀’ 치고는 상당히 많은 인원이지만, 계열과 등급으로 구분하니 그리 많은 인원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불의 심판> 클랜의 핵심 전투 인력이니까.
나는 문득 궁금증이 들어 곧장 질문했다.
“그럼 작전 나갈 때도 그렇게 딱딱 나눠서 나가? C급은 C급대로, B급은 B급대로?”
“아니, 그건 아니야. C급 파티에 인도자가 필요하거나 교육 인원이 포함되어 있으면 B급 클랜원이 들어오기도 하고, 반대로 B급 파티에 인원이 부족할 때는 C급에서 선발해 가기도 해.”
“아… 항상 6명이 파티로 가는 건 아니구나.”
“응. 애초에 정석 파티의 최소인원도 5인이니까.”
이건 내게 호재다.
모두 C급만 포함된 파티의 작전에 끼면, 지금의 내 수준보다 조금 떨어지는 던전 공략이나 필드 사냥을 나갈 수도 있다.
두 달간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가야 하는 나로서는, 적당히 어려운 난이도의 작전에 끼는 걸 선호했다.
신유나가 문득 책상을 뒤지더니 잘 코팅된 책자를 꺼내 내게 건넸다.
“자, 이거.”
“이게 뭐야?”
“도재현, 네가 앞으로 외워야 할 사냥 5팀 선배님들과 클랜 내 주요 홀더들. 팀장님이 내일 작전 회의한다고 했으니까, 내일까지 꼭 외워 와야 해.”
“…….”
변수인데?
아카데미 동기들도 몇몇 빼고 거의 모르는 나인데, <불의 심판> 클랜원들을 다 외워야 한다니.
이건 마치 회사 생활을 하는 기분이잖아.
…클랜 생활이니까 비슷한 건가.
“꼭 다 외워야 해?”
“응. 내일 아침에 검사할 거야. 이건 네 사수로서 지시 내리는 거니까, 꼭 해야 해…!!”
사수로서 지시는 무슨.
아까까지만 해도 신입인 자기가 사수를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으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곤 코팅 책자를 건네받았다.
인턴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바로 던전 투입! 결계 밖 필드 사냥!
…과 같은 걸 꿈꿨었는데.
역시 클랜 생활이란 건 녹록하지 않았다.
이론적이고 사무적인 처리가 모두 끝나야 실전에 투입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어느 집단을 가나 똑같은 과정이긴 했다.
문득 신유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끝났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오, 점심시간.”
기대하던 시간에 고개를 들었다.
[요리]에 숙달된 후로 다른 이들의 음식이 입에 안 맞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음식과 맛집을 찾는 건 늘 즐거운 묘미 중 하나다.
<불의 심판> 내 구내식당.
여기 밥은 얼마나 맛있는지 확인을 좀 해봐야겠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팀 동료들이 먼저 나가고, 그렇게 나와 신유나도 사무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쾅!
웬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나며 누군가 우리 앞에 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다소 다급해 보이는 표정.
어제 봤던 그대로의 옷과 여전히 고급스러운 분위기.
…강주연이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걸까.
옷을 다 차려입은 걸 보면 늦잠 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숨을 몰아쉰 후.
날 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밥… 같이 먹어.”
“…….”
점심 같이 먹자고?
이 말 하려고 사무실 문 박살 낼 기세로 달려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