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3 뱀이 뒤덮은 숲 (7)
전이.
특정 관념이나 물질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
보통은 발현된 후 추가로 발생하는 걸 말하지만, 지금의 전이는 ‘기존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현상’만을 일컫는 것 같았다.
당장 야산의 이무기가 처음 등장했던 몸은 고목이 되어 썩어버렸고, 우리의 뒤편 쪽에서 새로운 몸으로 나타났으니까.
‘룬은 아니야.’
기억상 이런 특수 능력을 지닌 룬은 없었다.
게다가 정보창으로 나타난 던전 정보까지 취합해 보면, 던전의 특수 ‘기믹’에 해당하는 능력임을 알 수 있었다.
전투 중 마음대로 몸을 바꾸는 기믹이라니….
상대의 전투 능력조차 측정이 안 된 상황인데, 이렇게 까다로운 능력은 분명 우리에게 악재였다.
캬오오오-!!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었다.
야산의 이무기가 거침없이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자유롭게 몸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일까.
녀석은 물리적 돌격에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방패를 들고 최전선에 섰다.
권오준과 최동욱은 이미 거리가 꽤 벌어진 상태.
신유나의 [육탄방어]론 보스의 근력을 버틸 리 없었다.
내가 막아야 했다.
‘무조건 막아야 해.’
왼손의 [홉고블린의 청동 방패]가 마력에 휩싸인다.
내 한계를 넘어선 방어 스킬.
[철벽수비]의 발현이다.
캉- 캉-!!
콰아아앙!!
“끄, 끄아압…!!”
“도재현!”
하지만 상대는 최소 A급 이상의 보스 괴수.
평범한 전투처럼 물리 공격만을 막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머리를 들이미는 놈의 박치기는 막아냈지만, 마력 공격까지 방어하진 못했다.
‘대지!’
놈은 대지를 이용하는 땅 계열의 마력 공격을 활용했다.
갑작스럽게 균열을 일으킨 땅에 의해 내 방어 자세는 무너졌고, 놈의 꼬리는 매서운 속도로 내 허리를 강타했다.
때문에 난 후방에 있던 인원들에게 추락하듯 떨어졌다.
마법을 준비하던 강주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앞을 봤다.
마치 야산의 이무기를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미친. 뒤지게 아프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곧바로 이상을 감지하고 [단단해지기]를 사용했다.
덕분에 강렬한 통증은 있어도,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꼴이 이렇긴 한데 어쨌든 죽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안 좋아….’
그러나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보유스킬 중 벌써 2개나 써버렸고, 이런 공격을 몇 번이나 더 막아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머리가 까마득해진다.
특히 야산의 이무기가 지닌 기믹.
몸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특수한 능력은, 녀석을 물리친다 해도 또다시 싸워야 한다는 절망을 안겨줬다.
“타올…!!”
“안 돼!”
마법의 시전 준비를 모두 마친 후.
분을 못 참은 강주연이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나는 다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타올라라.
궁극스킬인 [인페르노]를 쓰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야, 강주연.”
“…그치만.”
“냉정하게 생각해. 너 똑똑하잖아.”
야산의 이무기가 이미 한 번 선보인 기믹.
멋대로 고목으로 몸을 바꿔치기한 능력.
그걸 보고 이상함을 느낀 건 나뿐일 리 없었다.
강주연을 비롯해 권오준, 최동욱 등 파티의 대부분 인원이 모두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의 보스를 다시 처치한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때문에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쩌저저적-
야산의 이무기.
녀석의 몸이 또다시 베어진 나무처럼 괴이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자리로 복귀한 권오준과 최동욱의 합동 공격, 민채환의 지원 사격이 다시 한번 쏟아진 결과였다.
당연히 이번 시체도 갈라진 고목.
전이가 끝난 가짜 시체였다.
“도재현. 일어설 수 있겠냐.”
언제 또 다른 고목으로 변해 찾아올지 모르는 보스 괴수.
그 때문에 날카롭게 주변을 살핀 후.
권오준이 내게 물어왔다.
나는 서둘러 몸을 털고 일어섰다.
“네, 문제없습니다.”
“야산의 이무기. 녀석의 등급이 어떻게 되는 것 같냐.”
예상 밖의 질문에 눈이 커졌다.
권오준은 오늘 파견이 시작되고 난 후.
처음으로 내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제가 대답해도 되는 겁니까?”
“녀석의 공격을 정통으로 막아선 건 너밖에 없어. 시간이 없다. 빨리.”
캬오오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걸까.
야산의 이무기가 다시 한번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시간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빠르게 대답했다.
“무조건 A급은 넘어서는 괴수입니다. 하지만 S급이라기엔 애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매하다?”
“예. 녀석의 기믹이 너무 사기적이라 난공불락처럼 느껴질 뿐, 본연의 능력 자체는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당장 저도 버텨냈으니까요. A급과 S급 사이, 딱 그 정도의 괴수입니다.”
처음 접하기에 정확한 판가름은 어렵지만.
굳이 등급을 따지자면 A+급이라고 해야 할까.
그 대답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
야산의 이무기는 지척까지 다가오며, 땅 계열 마법으로 재차 우리를 흔들었다.
쿠궁-
쿠구구구-!!
순식간에 지면에 균열이 일어나고, 마법을 준비하던 이들의 집중력이 바로 깨졌다.
이번엔 민채환의 화살 공격도 영점이 흐트러져 공격이 빗나갔다.
놈의 분신을 사냥해야 하는 건 결국 또 권오준과 최동욱, 그리고 나까지 합류한 앞선이었다.
권오준의 창이 다시 움직여 놈의 머리를 가르고, 최동욱이 몸통 쪽을, 나는 꼬리 쪽을 베어갔다.
‘파상과 유수를 같이…!!’
[유수검법]을 활용해 베어내고, [파상검법]을 활용해 찌른다.
지금은 방어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우리의 공격 턴.
나는 두 검법 룬을 적절히 활용하며 녀석에게 타격을 줬다.
쩍- 쩌저저-
다시 무너진다.
괴수의 세 번째 가짜 시체가 고목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후.
땅의 균열로 흩어졌던 파티원들이 속속 한 데 모였다.
지금 상황에서 흩어지는 건 너무 위험했다.
“팀장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최동욱이 살짝 숨을 몰아쉬며 말을 꺼냈다.
“아무리 지구력이 있어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책은 이미 정해져 있어.”
권오준의 눈빛이 마법사 계열에 향했다.
“김성철, 그리고 아가씨. 두 사람의 힘이 필요해. 바람 마법과 불 마법을 동시에 활용해서 이곳의 나무를 모조리 쓸어버려야 놈을 잡을 수 있다. 아가씨, 할 수 있겠습니까?”
야산의 이무기.
놈의 기믹은 ‘나무’를 통해 몸을 전이하는 것이다.
보스룸 내부를 가득 채우다시피 한 엄청난 양의 고목.
이들을 모두 불태워야 한다.
그래야만 야산의 이무기가 전이를 멈추고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이는 파티원 대부분이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대책이었다.
“…다 태우려면, 10분은 걸릴 거예요.”
조용히 고목의 수를 살피던 강주연이 말했다.
항상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민감하던 그녀도.
지금만큼은 그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급한 상황이었다.
권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캬오오오-!!
다시 괴성이 울린다.
지긋지긋한 새끼.
저 놈 때문에 이제 뱀만 보면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다.
“최동욱, 도재현! 나와 같이 녀석의 공격을 전담한다! 마법사 계열들 집중력 안 깨지게 놈을 붙잡아둬야 해!”
“알겠습니다!”
“신유나는 민채환과 함께 후방 인원을 보호해라!”
“네!”
10분.
김성철과 강주연이 보스룸 내 모든 나무를 불태워버릴 때까지, 우리는 10분이라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이무기와의 끊임없는 사투가 시작됐다.
캬오오오-!!
쿵, 쿠구우웅!!
쩍, 쩌저적-
쩌저저적….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일곱, 여덟 번째.
고목들이 벌목되듯 바닥에 떨어진다.
계속해서 전이하는 야산의 이무기를 사냥한 결과였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우리 역시 지쳐간다.
‘끝이 없어.’
10분간 녀석과 육탄전을 벌이는 건 지옥에 가까웠다.
아무리 S급 괴수가 아니라곤 해도, 녀석은 분명 A급 이상의 괴수.
게다가 물리 및 마력 공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밸런스형 보스다.
변칙적으로 활용되는 놈의 땅 계열 마법에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고, 방대한 근력의 물리 공격은 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아파 뒤지겠네.’
진짜 죽을 것 같다.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
두들겨 맞은 몸은 가눌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에, [홉고블린의 청동 방패]는 거의 박살 나기 직전이다.
함께 앞선을 맡은 권오준과 최동욱도 정상은 아니었다.
모두가 지친 게 눈에 보였다.
타닥, 타다다-.
화르르륵-.
“거의 다 태웠습니다…!!”
하지만 결코 의미 없는 전투는 아니었다.
벌어준 시간 동안 확실하게 마법을 시전한 강주연과 김성철은, 그 많던 나무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불과 바람.
시너지가 잘 맞는 두 사람의 마법은 거대한 화마를 일으키며 보스룸 전체를 뜨겁게 달궜다.
‘산불 같네.’
산, 혹은 숲처럼 보이던 보스룸 내부.
이들의 고목이 모조리 불타고 있으니…
마치 산불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티, 팀장님!!”
그러던 와중.
후방에서 엄호사격을 하던 민채환이 소리쳤다.
뭔가 굉장히 위험한 걸 발견한 듯한 목소리였다.
불안한 기운이 맴돈다.
우리의 시선은 단번에 전방으로 돌려졌다.
스스스-
스스스스-!!
“뭐…야, 저게.”
마법사 계열의 산불 작전은 제대로 성공했고, 덕분에 야산의 이무기는 궁지에 몰렸다.
이대로 보스룸 내 고목이 모조리 불타면 놈의 전투는 급격히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그때부터 전이를 멈췄다.
더 몸을 바꿔봤자 의미가 없다고 여긴 듯한 판단이었다.
여기까진 계획한 대로였다.
녀석의 본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니까.
‘남은 나무를… 변형시켜?’
그런데 녀석은 이어 놀라운 일을 펼쳤다.
거대한 불길 끝에 남아있는 몇 그루의 나무.
그 나무들을 모두 조형해…
‘목조 뱀’으로 변환시키는 기형적인 능력을 보여준 것.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일까?
나무는 몇 그루 남지 않았지만, 잘게 나뉘어 조형된 목조 뱀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목조 뱀들이.
일종의 마력 공격으로 우리에게 날아든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흡…!!”
나는 그대로 [질주]를 활용해 후방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어떻게든 움직여야만 했다.
단순히 이 공격에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러한 변칙적인 마력 공격에 위험한 건 파티원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취약한 대상은 따로 있다.
후방에서 마법을 시전하며 보스룸의 나무들을 불태우고 있을 파티원들.
강주연과 김성철이었다.
‘후방을 지켜야 해.’
그들에겐 [마력 방어막]을 펼칠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그걸로 이 목조 뱀들이 막아질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 거침없는 [질주]는…
기어코 목조 뱀 공격이 들이닥치기 전.
후방의 파티원들이 있는 곳까지 나를 이끌었다.
‘그런데 뭘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마땅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온몸은 찢어질 것처럼 넝마가 됐고…
방패 역시 박살 직전의 내구도에 몰려 있다.
내게 남은 건 공격뿐.
더 이상의 방어는 어려웠다.
스스스-
스스스스-!!
기형적인 목조 뱀들은 그걸 비웃듯.
허공을 까맣게 물들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 공격을 허용하면…
파티의 모든 작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크게 다칠 거고,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당하는 건가?’
하얘진 머릿속엔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목조 뱀들은 모두 마력 공격이기에.
[백병전 선언]도 의미가 없었다.
당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
그 안에서 나를 반긴 건.
죽음이 아닌.
다섯 개의 정보창이었다.
[부서질 것 같은 실전에서 더욱 빛나는 검! 당신의 검과 물이 일체의 수준에 다다라,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이루어냅니다. 유수와 파상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파상검법’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유수검법’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궁극스킬 ‘파상천검’의 사용제한이 풀립니다.]
[궁극스킬 ‘유수활검’의 사용제한이 풀립니다.]
다 읽을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오직 한 문장.
[유수검법] 룬의 레벨이 올랐다.
그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꽉 쥔 검에 힘을 준다.
그리고 입술을 터질 것처럼 베어 문 채.
나는 온 힘을 다해 읊조렸다.
“흘러라.”
그 순간부터.
수십 개의 목조 뱀들은 더 이상 내 상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