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뱀이 뒤덮은 숲 (9)
‘죽다 살았네, 씨바꺼….’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기믹으로 몸을 바꿔치기하던 놈이 갑자기 전이를 멈추고, 또 다른 기믹으로 다중 마력 공격을 활용한다?
상대하던 입장에선 쌍욕이 나오는 까다로움이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검법들의 룬이 오르며 궁극스킬들의 제한이 풀려 망정이지, 대책없이 맞섰다면 그대로 개죽음당할 뻔했다.
‘교수님들이 스승이라 다행이다.’
정말 갑작스럽게 사용제한이 풀렸지만…
나는 침착하게 [유수활검]을 펼쳐 목조 뱀들을 막아냈다.
그 기반엔 오래도록 궁극스킬을 연마했던 기나긴 훈련 시간들이 있었다.
[파상천검]과 [유수활검]은 각각 탁원호 교수와 김명현 교수의 주력 궁극스킬이고, 두 사람의 전속 제자인 나는 스킬의 발현부터 작용, 그에 맞는 움직임, 응용 등 관련된 활용법을 모두 연구할 수 있었다.
두 교수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으며.
나 혼자서도 훈련을 많이 했다.
덕분에 겨우 두 번째 쓰는 궁극스킬인데도, 어색함 없이 능숙하게 스킬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제 전방 쪽을 도와줘야 해.’
분열된 파티 인원들이 혼란에 빠진 상황.
야산의 이무기가 날뛰기 딱 좋은 조건이다.
때문에 나는 빠르게 판단을 마쳐 후방 인원들에 오더를 내리고, 강주연과 함께 녀석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주연. 아직 인페르노 안 쓴 거지?”
“……!”
강주연의 페이스에 맞춰 달려가며, 그녀의 현 상황을 물었다.
그런데 강주연의 반응이 이상했다.
대답은커녕,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 그녀의 무표정을 고려하면.
뭔가 상당히 놀란 것 같은 얼굴.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인페르노 벌써 쓴 거야?”
“…아니. 안 썼어.”
당연히 안 썼겠지.
산불 작전을 하느라 궁극스킬을 쓸 여유도 없었을 테니까.
그냥 확인 질문 차 물어본 거였는데, 반응이 달라 놀랐다.
‘상황이 안 좋으니까 강주연도 긴장한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완성형 천재에 B급 홀더인 그녀라곤 하지만,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린 던전 공략은 ‘아카데미 지하 던전’ 이후 처음일 테니까.
나는 별다른 생각을 지워버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내가 신호를 줄 때 인페르노를 써 줘. 저 단단한 이무기를 잡으려면 네 마력 공격이 꼭 필요해. 저번처럼 내가 인페르노의 틈을 만들어볼게.”
“…응.”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비로소 전방에 도착했다.
상황은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최동욱은 목조 뱀의 공격을 무리하게 막아내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쓰러진 상태였고, 권오준은 그 속에서 홀로 보스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나는 무구교체술로 빠르게 가방에서 검을 꺼냈다.
방패는 필요없다.
지금은 내 몸이 아작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에게 공격을 쏟아 틈을 만들어야할 때였다.
던전 기믹이 다 클리어돼 몸의 바꿔치기가 불가한 상황.
이제 놈을 잡으면 던전의 공략은 끝난다.
야산의 이무기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팀장님! 잠시 물러나십시오!”
나는 권오준에게 외친 후.
곧바로 야산의 이무기에게 달려들었다.
이수미의 [큐어]와 [레스트]로 회복한 몸.
게다가 달려오면서 [전투치유]의 [응급처치]까지 썼다.
지금의 내 몸 상태는 처음 싸울 때에 반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을 컨디션이었다.
“몸을 본체로 바꾸면서 더 강해졌다! 조심해라, 도재현!”
권오준은 역시 경험 많은 홀더다웠다.
갑작스러운 나와 강주연의 등장.
이후 무모한 내 돌격과 주제넘은 오더.
이러한 상황들에 전혀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자신의 전투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있었고, 그런 상황 속 내가 지원을 오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투에서 물러났다.
작전 방향을 완전히 내게 맡긴 것이다.
내 대외적인 위치가 C급 인턴 클랜원이라는 걸 고려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신뢰였다.
나는 그 믿음에 보답하듯 괴수를 향해 뛰어올랐다.
‘방향은 놈의 뒤!’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시도한 건, 곧바로 [질주]를 활용해 이무기의 뒤쪽 점거였다.
언제든지 놈이 고개를 돌리면 날 볼 수 있겠지만, 당시의 녀석은 권오준을 상대하느라 고개를 돌릴 틈이 없었다.
즉, 지금의 나는 괴수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은신…!!’
일렉트로포러스를 처치하며 얻었던 [은신].
[은신]은 특정 지점이나 사물에 숨을 때 기척을 지우도록 보조하는 룬이다.
하지만 바로 근처에 있더라도, 대상의 시야에서만 사라질 수 있다면 [은신]의 활용이 가능하다.
나는 녀석의 뒤로 오자마자 [은신]을 활용했고, 순식간에 기척을 지웠다.
그건 다시 말해.
[은신]의 파생스킬인 [하이드 어택]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캬오오오-!!
야산의 이무기가 비명을 질렀다.
[하이드 어택]은 상대의 내구 수치를 일정 부분 무시하고, 추가로 내 공격 위력을 증가시킨다.
거기에 난 추가로 검에 마력을 듬뿍 담아 놈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기습.
그리고 비늘을 찢을 듯 들어온 유효타.
적잖이 당황한 게 놈의 비명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터져라.”
마력을 가득 담아 검을 찌른 이유.
찔러낸 검을 빼지 않은 이유.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발악하는 이무기에게서, 악착같이 붙어있던 이유.
오직 한 번의 찬스.
오직 한 번의 공격.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공격형 궁극스킬.
[파상천검]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캬, 캬오오오-!!
캬오, 캬오, 캬오오오!!
[하이드 어택]을 맞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비명이 들린다.
보스룸 입장 후.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놈의 비명.
야산의 이무기는 [파상천검]의 위력을 버티기 힘든 듯.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쳐대며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놈의 등에 딱 붙어있던 나 역시, 땅으로 거침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씨발. 추락은 익숙해지지가 않네.’
벌써 두 번째 추락이다.
땅에 처박힐 때의 통증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하지만 내 고통만큼.
성과가 확실했다.
놈의 등 한가운데에 박힌 검은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빛나고 있었고, [파상천검]이 온전히 닿은 부위는 마치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기어코 놈에게 ‘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있는 힘을 모두 쏟아 소리쳤다.
“강주여어언!! 지금…!!”
내 외침이 그녀에게 닿기 전.
이미 뜨거운 열기는 대지를 메우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강주연의 생각도 맞닿아 있었다.
이미 마법의 준비는 끝난 것이다.
“타올라라.”
강주연이 읊조렸다.
[꺼지지 않는 불꽃]의 궁극스킬 [인페르노].
불길이 들어갈 수 있는 틈만 있다면.
대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공격 마법이다.
[인페르노]의 화마는 이무기의 등부터 시작해 몸 곳곳을 덮더니, 이내 온몸에 붙으며 놈의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르륵-!!
캬, 캬오오….
쿠구구, 쿵!!
한참을 불길 속에서 발버둥 쳤을까.
고목이 쓰러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마침내 야산의 이무기가 쓰러졌다.
모든 걸 쏟아부으며 벌였던 사투.
오래도록 진행됐던 전투의 끝이었다.
나는 바닥에 다이빙하듯 쓰러지며 몸을 뉘었다.
“끝났다….”
힘이 쭉 빠진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잠만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다들 고생했다.”
드디어 야산의 이무기가 쓰러진 후.
뿔뿔이 흩어져 있던 파티원들이 한데 모였다.
그래도 꽤 시간이 흐른 덕인지, 팀원들의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가장 상태가 심각했던 최동욱도 이수미의 치료에 금세 안색을 되찾았다.
말을 꺼낸 권오준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나와 강주연이 있는 자리였다.
“특히 아가씨와 도재현. 두 사람이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도재현, 네 공로가 정말 컸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파티는 몰살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공략 내내 나와 신유나를 다그치기만 하던 권오준이, 특급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날 극찬했다.
…솔직히 몰살까진 과하다.
공략이 완전히 불가해진 순간.
어떻게든 피신해 보스룸에서 도망칠 순 있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죽거나 다칠 수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팀원들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강주연과 함께 보스 사냥을 마무리한 건 나도 스스로 칭찬하고 싶은 업적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이 믿어주셔서 가능했습니다.”
“믿어주는 것 말고 할 게 없더라. 미안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뒤에 있을 때 혼자 보스 상대하고 계셨으면서.”
권오준은 우리가 후방에서 목조 뱀을 막을 동안.
홀로 목조 뱀과 야산의 이무기를 동시에 상대했다.
아마 그사이에 자신의 궁극스킬까지 썼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보스 괴수의 사냥은 불가했던 일.
A급 홀더 팀장과 파견 작전 파티장.
무거운 두 직함에 충분히 들어맞는 활약이었다.
“아무튼, 보스룸 공략은 잘 마무리가 됐고…”
권오준이 잠시 말을 흐렸다.
그리고 최동욱을 보더니, 이내 민채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리할 건 마저 처리해야지.”
사사삭-
스릉-
그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허리춤의 소검 두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최동욱은, 권오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속으로 몸을 움직여…
민채환의 목에 소검을 들이밀었다.
1초 만에 무장 위협으로 제압된 민채환이었다.
“팀장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민채환이 노성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제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
물론, 나도 이해 안 된다.
보스 잘 잡고 나서 뭔 상황이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