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 A급 때려잡는 C급 (3)
보스 괴수가 달라졌다.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아닌, 레드 드레이크.
회색 갈기가 아니라, 붉은색 갈기를 지닌 괴수.
녀석은 보스룸의 불청객인 날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왜 바뀐 거지?’
던전 내부의 괴수들은 한 번 소탕하고 나면, 일주일 뒤에 다시 리젠된다.
마치 게임처럼 새로이 괴수가 생성되는 이 시스템에 대해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리젠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은 보편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최초 공략이 끝나면 ‘레스트 룸’이 더는 열리지 않는다는 점, 던전의 보스가 기믹을 지니고 있었다면 해당 기믹 또한 사라진다는 점 등… 이는 그간 홀더들의 던전 공략을 통해 밝혀진 일종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 어디에도.
보스 괴수가 변경된다는 건 없었다.
‘마력 면역’의 기믹은 사라져도, 보스는 그대로여야 했다.
‘혹시 아룡의 마력석 때문에…?’
꽤 합리적인 추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잊혀진 아룡의 석판]에 채워지는 마력석.
이들은 이름처럼 전부 아룡 괴수의 마력석이다.
그리고 아룡에 해당하는 괴수들은, 지금껏 홀더 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괴수들.
그리즐리 드레이크, 스월 레비아탄, 야산의 이무기.
모두 관련 괴수 정보 자체가 전무한 괴수들이었다.
즉, 그리즐리 드레이크가 아룡으로서 특수하게 처음의 던전을 차지하고 있었고, 레드 드레이크가 원래 이 던전의 보스 괴수였다면.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뱀이 뒤덮은 숲도…’
아마 보스 괴수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 던전은 내가 아닌 <불의 심판>에 소유권이 있으니, 나중에 따로 클랜에 요청해 파견을 나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르르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레드 드레이크의 몸이 움직였다.
내가 보스룸에 들어온 걸 확인한 후.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일으킨 돌진이었다.
나는 무구교체술로 [홉고블린의 청동 방패]를 들려다가…
이내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교체를 멈췄다.
‘너무 빠른데?’
레드 드레이크의 속도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빨랐다.
속력 능력치만으론 만들어낼 수 없는 빠른 속도.
그렇다고 보법류 룬이라고도 볼 수 없는 움직임.
나는 저런 형태의 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질주잖아.”
돌격류 룬인 [질주]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녀석의 움직임은 룬의 보조를 받은 ‘돌격’이었다.
아니, [질주]가 맞긴 한 걸까?
레벨이 얼마나 높은 건지, 녀석의 속도는 룬의 활용을 고려해도 너무 빨랐다.
어쩌면 [질주]보다 상위 단계의 돌격류 룬일지도 몰랐다.
‘일단 단검을…!’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허리춤의 단검부터 날렸다.
상대가 단순히 돌격류 룬만 보유한 것인지, 아니면 [무자비한 돌격]까지 보유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캉- 캉-!
‘어김없네.’
예상대로.
녀석은 [무자비한 돌격]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빠르게 날아간 내 단검들이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물리 공격이 무시됐다는 뜻이다.
레드 드레이크는 이후 그를 가속의 매개로 삼듯 더욱 빨리 달리며,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그르르으…!!
“흡…!!”
나는 타이밍에 맞춰 [날렵한 몸놀림]을 활용했다.
방패로 녀석의 돌격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괴수의 개체가 변경되긴 했지만, 어쨌든 레드 드레이크도 A급 괴수다.
근력과 속력에 있어 높은 수치를 자랑하고, 돌격류 룬의 보조를 받으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내게 방어룬들이 있고 관련 스킬이 있다 해서 이를 방패로 막아서려는 건, 꽤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콰아앙!!
-그르으으…
‘미친. 진짜 아작날 뻔했네.’
1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났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레드 드레이크의 돌격을 피해냈다.
내 주력 능력치들이 대부분 40을 넘으며 B급 평균 능력치 50에 가까워지긴 했어도…
여전히 A급인 레드 드레이크와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때문에 엄청난 속력을 자랑하는 녀석의 돌격류 룬.
이를 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빨리 해결책을…’
나는 돌격을 피해내면서도 재빨리 방법을 강구했다.
가장 좋은 전략은 일전에 ‘야산의 이무기’를 처치했을 때처럼, 내가 지닌 핵심 스킬 콤보를 먹이는 것이다.
[은신]의 [하이드 어택]으로 내구를 깎으며 유효타를 먹인 후, 궁극스킬 [파상천검]으로 확실한 추가타를 넣는 것.
당시에도 그랬지만 제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이는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지금은 [은신]을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보스룸 공간이 좁아 숨을 공간이 없고, 레드 드레이크가 나를 보는 족족 돌격으로 따라붙는 탓에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힘들다.
그때처럼 도와주는 동료도 없기에, 녀석에게 쉽게 콤보를 먹이는 건 어려웠다.
‘선전포고는… 젠장, 아까 썼구나.’
[위압]의 [선전포고]를 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안타깝게도 쿨타임이 돌고 있다.
아무래도 B급 괴수들의 몰이 사냥을 연달아서 하다 보니, 모든 스킬이 준비된 최상의 몸상태는 아니었다.
‘땅 계열 마력룬을 써야 해.’
남은 방법은 결국 하나.
[갈라진 대지의 정원]을 이용해 땅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땅을 가르거나 움직여 경로를 비틀게 되면…
놈의 돌격은 멈춰질 수밖에 없고, 그땐 공략의 길도 열린다.
지금의 내게 부족한 건 회피나 탱킹이지, 딜이 아니니까.
-그르으으…!!
레드 드레이크가 다시 몸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돌격 준비를 했다.
‘불 써서 빨간 게 아니라, 불 나게 달려서 빨간 거였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레드’라는 수식어에서 당연히 시즐링 샐러맨더처럼 불을 활용하는 괴수일 줄 알았는데, 녀석은 오히려 B급 괴수 켄타우로스처럼 돌격을 활용하는 괴수였다.
다행히 그리즐리 드레이크를 상대할 때의 ‘마력 면역’ 기믹은 없지만…
돌격의 파괴력과 저지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의외로 그리즐리 드레이크보다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그르르르…!!
녀석이 다시 달린다.
높은 속력과 돌격류 룬 레벨을 활용한 돌진.
조금만 지체하면, 아까처럼 금세 내게 도달할 것이다.
‘돌출부를…!!’
나는 재빨리 [갈라진 대지의 정원]을 활용했다.
목표는 놈의 돌격 경로에 자리한 땅의 돌출.
암석이나 바위를 만들듯, 지면의 일부를 위로 솟구치게 만드는 것.
구그그그-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 녀석의 바로 앞을 돌출시키진 못했지만, 경로상 도달할 법한 부분의 지면을 돌출시켰다.
이대로 돌격이 지속된다면.
레드 드레이크는 돌출부에 부딪혀 멈춰질 게 분명했다.
그 틈을 노려야 한다.
나는 이후의 공격을 연계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그르르으…!!
“어?”
돌았다.
정신이 돌거나 뭐 이런 게 아니라…
실제로 돌격 중에 녀석이 돌았다.
레드 드레이크는 경로상 돌출부 절반을 회전하듯 움직이며 돈 후, 다시 내게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뭐야.
저게 말이 돼?
‘돌격 도중에 경로 변경이 가능하다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녀석이 보유한 룬은 [질주]가 아니었다.
내가 보유한 [질주]는 돌격 경로를 변경할 수 없다.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그 즉시 [질주]의 돌격 보조가 끊긴다.
한 방향으로만 돌격할 수 있고, 끊긴다면 다지 돌격 태세를 취한 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레드 드레이크는 돌격 도중 경로를 바꾸면서, 심지어 속도까지 크게 늦춰지지 않는 상태.
[질주]보다 더 상위의 돌격류 룬인 게 분명했다.
‘방패라도 들어야 해.’
이미 회피는 타이밍을 놓쳤다.
게다가 아까의 경우를 생각하면, 회피 도중에 녀석의 돌격에 휘말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지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 돌격에 맞서야 했다.
무구교체술로 [홉고블린의 청동 방패]를 불러왔다.
곧바로 이어서 펼치는 스킬 [철벽수비].
그게 끝이 아니다.
‘공격은 곧 최고의 방어…!’
회피와 방어만을 반복하면 역전의 기회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방패를 들면서도, 방패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글거리는 불꽃]과 [침투하는 뇌기].
두 개의 속성 계열 마력 공격이 방패를 타고 양옆에 흘렀다.
왼쪽엔 불, 오른쪽엔 번개.
혹시 몰라 더블로 준비한 마력 공격이다.
이대로 방패에 부딪힌다면.
아마 레드 드레이크의 몸 역시 성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르르, 그르으…!!
캉, 카카가-
콰아앙!
“커, 어억…!!”
방패가 뭉개지며 엄청난 파괴력이 내 몸에 닿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
그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무자비한 돌격 효과…’
[무자비한 돌격]에는 돌격 시 물리 공격 무시 효과만 있는 게 아니다.
돌격에 성공하면 근력의 두 배에 달하는 위력을 상대에게 퍼부을 수 있다는 효과 또한 있었다.
여러 제약이 있기에 사기적인 효과까진 아니어도, 성공만 한다면 굉장히 파괴적인 효과였다.
게다가 A급이라는 막대한 능력치의 괴수가 이를 활용하니 그 위력이 배였다.
[철벽수비]까지 뚫으며 내게 타격을 줬으니 말 다 한 셈.
덕분에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그르르으….
물론, 레드 드레이크도 온전히 정상은 아니었다.
내가 미리 준비해 둔 두 개의 마력 공격이 효과가 있었다.
녀석의 갈기는 불꽃에 타들어 가고 있었고, 신체는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거리며 제약된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마력 면역 기믹도 없고, 돌격 및 공격력에 치중된 괴수라 그런지 마력 공격에 취약했다.
-그르으으…!!
레드 드레이크가 또다시 내게로 달려든다.
나는 녀석의 움직임을 똑바로 두 눈에 담았다.
[도마뱀의 비늘]과 [단단해지기]가 남긴 했지만, 직접 몸으로 녀석을 막아내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방금 방패로 막아보며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게든 막긴 해도 타격이 엄청날 것이다.
결국 회피해야 했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어떻게든 끝자락에서 회피한 후, 마력 공격과 궁극스킬을 활용해 놈을 끝장내야 한다.
내 예측이 맞다면 한번.
이대로 한 번만 더 제대로 공격을 먹이면…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와라, 도마뱀 새끼야.”
그를 위해 똑바로 녀석을 쳐다봤다.
돌격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
마지막의 마지막에 확실히 피하기 위해.
-그르, 그르르으…!!
그렇게 레드 드레이크가 날 보며 미친 듯이 돌격하고.
나는 그대로 녀석의 멈춘 움직임을…
어?
…멈춘 움직임?
“뭐야.”
갑작스러운 정지 때문에 발생한 먼지 더미와 돌 파편 따위가 레드 드레이크의 주변을 덮었다.
갑자기 멈췄다.
‘돌았다’에 이어, 멈췄다.
말 그대로.
녀석의 맹렬하던 돌격이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
그리고 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경직’ 상태라도 걸린 것처럼.
“이 새끼 뭐야?”
너무도 황당한 그 모습에.
반격도 잊고 잠시 혼잣말이 나와버렸다.
이거 대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