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 부탁 (1)
의문이 풀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전포고]의 쿨타임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내게 상태 이상을 걸 수 있는 룬이나 스킬은 하나밖에 없었다.
‘경직의 눈동자!’
뱀이 뒤덮은 숲을 공략하며 얻었던 또 하나의 룬 보상.
[경직의 눈동자].
A급 괴수인 바실리스크가 보유하고 있던 룬이며, 전설급 룬인 [석화의 마안]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레어룬이다.
보유 파생스킬은 없지만, 전투 도중 눈을 마주치면 아주 낮은 확률로 상대를 ‘경직’ 상태에 빠뜨린다는 상태 이상 특수효과를 지니고 있다.
즉, 레드 드레이크는 이 효과의 발동으로 몸을 멈춘 것.
어지간한 물리력으로도 멈출 수 없는 놈의 돌격을 상태 이상 하나로 돌려세운 걸 보면, [경직의 눈동자]의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 낮은 확률이라길래 없는 룬 취급했는데….’
사실 [경직의 눈동자]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솔직히 마력을 5 올려주는 것으로 가치를 다 한 룬이었다.
그 마력 증가 때문에 마력 수치가 30이 되며 궁극스킬의 제한이 풀렸었으니까.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적절하게 룬의 효과가 나타났다.
지금껏 사냥하며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바꿔 말하면 놈의 정신 수치가 낮다는 거지.’
[경직의 눈동자] 특수효과의 확률은 룬 레벨, 그리고 상대의 정신 수치에 영향을 받는다.
그저 운이 좋다고 넘길 게 아니라, 레드 드레이크의 정신 수치가 과하게 낮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나는 그런 점들을 빠르게 머릿속에 담으며…
양손으로 쥔 검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투 대상이 난데없이 상태 이상에 걸린 상황.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넋 놓고 날릴 순 없었다.
“흐읍…!!”
스스스-
팟- 파아앗-!!
[참회자의 검]에 고강한 마력이 모인다.
푸른 빛으로 쌓이던 마력은.
이내 하얀색으로 색깔이 변해갔다.
그 색이 너무 깨끗한 탓에, 검에 모인 마력에선 고결한 느낌마저 나는 듯했다.
이어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마력.
그 생김새는 마치 곡도처럼 참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레드 드레이크의 경직이 풀리고, 모양이 마무리된 순간.
“신나게 달렸으니까 이제 좀 맞자.”
완성된 참격은 빛과 같은 속도로 놈에게 쏟아졌다.
[참회자의 검]에 내재된 스킬.
[디바인 슬래쉬]의 발현이었다.
콰, 콰아아-!!
-그륵! 그르으…!!
강렬한 마력의 참격이 레드 드레이크를 덮쳤다.
경직 상태에 빠져 별다른 방어 자세를 취하지 못했던 녀석은, [디바인 슬래쉬]에 담긴 강렬한 마력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디바인 슬래쉬]는 마력을 신성력으로 덮은 후.
참격의 형태로 상대에게 쏘아내는 스킬이다.
언데드 계열 혹은 저주를 다루는 상대에게 효과적인 스킬이지만, 지금처럼 마력 공격으로도 충분히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었다.
특히 레드 드레이크처럼 공격에만 치중된 탓에, 마력 공격의 내성이 약한 괴수에겐 더더욱.
-그르으으…!!
한 차례의 마력 공격을 버텨낸 후.
레드 드레이크가 또다시 돌격의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디바인 슬래쉬]의 타격이 꽤 컸던 걸까.
아까처럼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느낌은 나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검을 쥐며 놈을 노려봤다.
‘분명 정신 수치가 낮았던 것 같으니까…’
[경직의 눈동자] 효과에 당했다는 것.
이는 곧 놈의 정신 수치가 낮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정신 수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룬.
이는 내게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르으…?
달리려던 레드 드레이크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간단한 저주].
홉고블린 주술사를 처치하며 획득했던 룬.
그 주술 중 ‘둔화’에 해당하는 효과였다.
[저주받은 주술서]를 통해 익힌 몇 안 되는 주술 중 하나인데, 어떻게든 익혀 놓으니 써먹을 데가 있었다.
“이게 먹히네.”
정신 수치가 낮으니 2레벨의 저주도 먹힌다.
이건 뭐, 신성 계열 홀더가 디버프 하나 걸어줬으면 공략이 엄청 쉬웠을 것 같다.
-그르르…!!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돌격을 피하는 건 쉬웠다.
나는 [날렵한 몸놀림]을 통해 놈의 돌격을 피한 후, 가벼운 움직임으로 놈의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마력은… 딱 궁극스킬을 쓸 정도.’
아까처럼 번개나 불 계열의 속성 마력을 함께 사용하고 싶지만, 마력이 부족하다.
보스룸에 들어온 이후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했다.
나는 [파상천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분 마력을 남겨놓고, 물리 공격만으로 녀석을 상대했다.
캉- 캉-!!
-그르르으…!!
A급 괴수와의 육탄전은 쉽지 않았다.
정신 수치가 낮은 괴수지만, 육체 능력치는 과연 A급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위력을 자랑했다.
탄탄한 내구력은 [참회자의 검]으로도 잘 뚫리지 않았고, 근력과 속력은 나를 압도하는 탓에 전투 자체가 버거웠다.
‘그래도 그리즐리 드레이크보단 나아.’
이전 보스였던 그리즐리 드레이크보단 훨씬 수월하다.
그놈은 능력치와 룬이 모두 신체 강화에 치중되어 있고, 약한 상대와 싸울 때 더 강해지는 [위압]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반면 레드 드레이크는 돌격에 치중된 괴수.
어떻게든 놈의 돌격을 저지하니, 나름 버틸 만했다.
신체 강화와 관련한 룬도 없는지, 싸우면서 단순히 능력치만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내겐 [단단한 지구력]이 있다.
같은 조건에서 싸운다면, 체력에서 지치지 않는다는 뜻.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던 레드 드레이크는, 장기전으로 이어지자 예상대로 여러 틈을 보였다.
한 방을 날릴 마력을 남겨두고 있던 내게 있어…
그 틈들은 싸움을 끝낼 확실한 찬스였다.
“터져라.”
콰-
콰아아앙-!!
순간 레드 드레이크의 목덜미에 꽂은 검.
그 안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까지 아껴뒀던 [파상천검]의 발현이었다.
이미 내 수많은 마력 및 물리 공격을 허용했던 레드 드레이크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담긴 [파상천검]을 버텨내지 못했다.
내구 면에서 야산의 이무기는커녕, 그리즐리 드레이크에게도 미치지 못했던 녀석은… 모든 마력을 쏟은 궁극스킬에 그대로 즉사하며 전투의 끝을 알렸다.
푹-
녀석의 시체에 다가가 확인사살까지 한 후에야…
오래도록 이어진 전투가 끝이 났음이 실감났다.
“하… 겨우 잡았네.”
나는 그대로 보스룸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보스 괴수까지 사냥하려던 건 욕심이었다.
솔직히 처음 던전에 왔을 땐 저번 공략의 보상들을 확인하려는 마음뿐이었는데, 룬과 아이템들의 성능이 너무 좋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났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때려잡긴 했지만…
A급 괴수를 홀로 사냥하는 건 아직 버거웠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룬 사냥꾼의 신묘한 힘으로, 상대방의 룬 하나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할 룬을 선택해주세요.]
[1.분노의 질주 2.무자비한 돌격(선택불가) 3.집중력 4.민첩성 5.도마뱀의 비늘(선택불가)]
[룬 사냥꾼]의 정보창이 승리를 축하하듯 나타났다.
일단 첫 정보창에 ‘기여도’가 없는 게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일대일 결투 승리 결과.
레드 드레이크를 혼자 잡았음을 방증하는 정보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괜히 뿌듯한 느낌이 든다.
“이건 뭐… 선택의 여지가 없네.”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분노의 질주]를 선택했다.
선택지의 대부분이 내가 보유했거나, 상위격 룬을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룬 세팅을 보고 나니…
녀석이 얼마나 돌격에 진심인 괴수인지 보인다.
모든 룬이 돌격 보조에 집중되어 있고, 신체를 강화하는 룬은 거의 없다.
그 흔한 [사족 격투]조차 보유하지 않았다니.
돌격 저지 후 전투가 쉬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분노의 질주를 선택하셨습니다. 11레벨의 레어룬이기에 레벨이 하락해, 6레벨로 등록됩니다.]
[룬의 성향으로 속력을 1 획득합니다.]
<룬 정보>
◎이름: 분노의 질주
◎등급: 레어(Rare)
◎레벨: 6
◎새겨진 부위: 무릎
◎특수효과
: 속력+1
: 돌격 도중 방향을 변경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꺾거나 역주행을 하더라도, 룬의 보조가 끝나지 않는다.
◎파생스킬: -
◎세부정보
: 더 빠르고 저돌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된다. 분노에 가득 찬 질주는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질주]보다 상위격 룬인 [분노의 질주].
최소 레어룬일 거라는 예상이 맞았다.
별다른 파생스킬이나 특수효과는 없지만, 돌격 도중 방향을 변경하거나 역주행이 된다는 건 의외로 메리트가 많아 보였다.
당장 나만 해도 아까의 전투에서 크게 당황했었으니까.
잘만 사용하면 특정 상황에서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자, 이제.”
한숨을 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A급 보스 괴수를 솔플로 때려잡는데 성공했지만…
솔직히 주말에 이게 뭔 개고생인가 싶다.
얼른 집에 가 씻고 쉬고 싶었다.
“그래도 마력석은 캐야지.”
던전 최초 공략이 끝나 레스트 룸이 사라진 지금.
물질 보상으로 얻을 만한 건 마력석 밖에 없었다.
가죽 같은 부산물도 아마 꽤 돈이 되긴 할 텐데…
도축 관련 룬도 없어, 제대로 획득할 자신이 없다.
억지로라도 결투 상대 잡아서 도축 관련 룬 얻어야 하나?
부우웅-
그렇게 레드 드레이크의 마력석을 캐던 중.
방금 꺼낸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가은]
잠깐 확인해보니, 문가은에게서 온 톡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보자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문가은도 안 본 지 꽤 됐네.”
아카데미가 방학에 접어들고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꾸준히 연락은 주고받긴 했지만, 포항과 대구를 함께 갔던 김채은이나 클랜에서 같이 활동 중인 강주연과 달리 직접 만난 지는 벌써 2주가 넘어간다.
박진우도 가까운 동네라 자주 대련하곤 했으니까…
지하 던전 파티원 중 제일 보기 힘든 게 문가은이었다.
부우웅-
부우웅-
부우우웅-
“아, 본다 봐. 왜 이래 갑자기.”
그새를 못 참고, 톡이 세 번을 더 왔다.
나는 잠금 패턴을 풀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부재중 전화도 네 통이나 찍혀 있었다.
[부재중 전화] 문가은 (4)
…
…
[문가은]
도재현. 완전 비상. 나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라. 완전 급해. 완전 곤란한 상황 ㅠㅠ 제발 도와줘. 들어줄 거지? 응? 제발 ㅠㅠ
…
…
[문가은]
도재현, 뭐해. 바빠?
…
…
[문가은]
똑똑똑. 도재현 있나요.
…
…
[문가은]
도재현, 도재현, 도재현. 살아있어? 뭐해 ㅠ
…
…
“…….”
문자 폭탄을 읽고나자 머리가 띵해진다.
…이 정도면 광기인데.
얼마나 급하면 이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