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85화 (85/353)

EP.85 부탁 (2)

강원도, 설악산 필드.

분포한 괴수들의 등급이 워낙 다양하고 발굴된 던전도 상당히 많은 탓에, 등급에 상관없이 홀더들이 자주 찾는 결계 밖 필드다.

서울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외지의 필드지만, 워프 게이트를 통해 장거리의 불편함이 사라진 홀더들에겐 크게 개의치 않을 요소였다.

덕분에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설악산 필드는 사냥을 온 홀더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꼭대기.

무소속 홀더들로 구성된 한 파티가, 각자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아우우우-!!

“젠장! 신성 계열, 디버프를!”

“아까 치유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요! 시간이 부족해요!”

“마법 지원은 언제 되는 거야!”

“그게 쓰고 있는데… 펜리르의 내성이 높은지 거의 무효화 됩니다…!!”

“유은설 홀더님! 이건 무리입니다! 앞선을 서 줄 전사 계열이 너무 부족합니다!”

아비규환의 목소리들이 산꼭대기를 울렸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소리치는 파티원들.

그들의 시선은 대부분 두 군데로 몰려 있었다.

하나는 꼭대기에 와서야 마주할 수 있었던 S급 괴수.

펜리르.

등반 도중 늑대 계열 괴수들을 계속 만나긴 했지만, 그 끝에 이런 무지막지한 S급 괴수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그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 파티를 이끈 장본인.

국내 유일 S급 암살자 계열 홀더, 유은설.

새하얀 백색 도복을 입은 채 무장을 한 그녀는,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듯 보였다.

유은설은 차분하게 전장과 펜리르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왠지 모를 실망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품에서 두 자루의 소검을 꺼냈다.

그리고 이내 고운 입술을 떼며, 파티원들에게 고했다.

“물러나세요.”

S급 홀더가 주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비록 클랜에 소속되지 않은 유은설이지만, 그녀가 내리는 지시나 작전은 평범한 홀더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명령에 가까웠다.

앞선을 서던 홀더들도, 마법을 준비하던 홀더들도 모두 전장에서 벗어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우우우-!!

스스- 스스슥-

“아…!!”

뒷선에서 전장을 바라보던 한 홀더가 감탄을 흘렸다.

펜리르의 지독한 울음소리가 또다시 울리고, 후방으로 도망치던 홀더들이 그의 이빨에 찢기나 싶었지만…

어느새 유은설은 펜리르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아마 암살자 계열 특유의 보법류 룬.

그러나 그 수준이 얼마나 고강한 것인지, 움직이는 모습과 속도가 다른 홀더들의 눈에 잡히지조차 않았다.

그건 마치 순간 이동을 보는 듯한 움직임.

혹은 있다 없다 갑론을박이 심한…

[이형환위] 스킬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우우우-!!

삭- 삭- 사삭-!

“저, 저걸 어떻게…!!”

움직임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소검에서는, 눈에 담기만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단검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돌아서는 그녀의 움직임은 겨울의 눈과 같고, 펜리르의 약점 곳곳을 찔러 들어가는 두 소검은 안에 꽃 피운 매화와 같았다.

[설중매화].

[단검]에서 파생되는 검법 룬중, 최고로 꼽히는 에픽룬.

부드럽고 아름다운 유은설의 이미지와 너무도 잘 맞아, 홀더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고 정보가 많이 알려진 검법 룬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S급 괴수를 저렇게 간단히….”

멍하니 그녀의 전투를 지켜보던 한 홀더가 중얼거렸다.

파티 내 홀더들을 모두 찢어발길 듯하던 기세의 펜리르가, 고작 소검 두 자루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였다.

S급 홀더가 나서면 S급 괴수의 사냥은 훨씬 수월해진다.

이건 홀더 계에서 상식처럼 여겨지는 말이지만, 이를 실제로 체감하는 홀더들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S급 홀더는 국내에 다섯 명밖에 없고, 평범한 홀더들이 그들의 전투를 직접 감상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운 좋게 이를 직접 보게 된 파티원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S급 홀더의 전력을 다한 전투.

직접 확인한 그 위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한 떨기 꽃을 피워라.”

그리고 그 일방적인 전투 끝에.

마침내 유은설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설중매화]의 궁극스킬.

[설원유섬낙화]였다.

아름다운 눈의 꽃이 하늘과 땅 사이 곳곳을 수놓는다.

꽃송이들은 유은설의 검집에서, 자루에서, 검 끝에서.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눈부시게 피어난 후.

펜리르의 몸에 흩날리듯 떨어진다.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나 달아나는…

검을 든 무희의 움직임.

설원을 부드럽게 쓸어내는 낙화였다.

* * *

한 바탕 사냥이 끝난 후.

설악산 필드 입구 어딘가.

“…….”

유은설은 고운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꽝이다.

이번 설악산 필드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난다.

지금껏 던전, 필드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파티를 꾸려왔음에도, 아직 자신이 원하는 홀더는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운 좋게 S급 괴수인 펜리르를 마주하고 처치하며, 마력석 및 부산물을 획득하긴 했지만… S급 홀더인 유은설에게 이러한 보상들은 크게 매력적인 건 아니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용의 기운을 지닌 특별한 홀더.

여기엔 이미 검증된, 확실한 카드가 있다.

<용광검로> 클랜의 마스터, 송도혁.

그는 분명 유은설 자신이 찾는 파트너에 적합할 것이다.

‘송도혁은 안 돼.’

하지만 유은설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기엔 꺼려지는 게 많았다.

송도혁이 국내 3대 대형 클랜의 마스터이기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는 점도 그렇고, 무소속인 그녀가 대형 클랜과 공략을 함께하면 예기치 못한 불이익이 닥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S급 홀더에게 고개숙여 들어간다는 것.

그게 가장 거부감이 느껴지는, 솔직한 이유였다.

“하아….”

답이 없는 상황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계속 혼자 고민해봐도 별다른 답이 나오진 않았다.

결국 오늘도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입구 밖을 나가려던 찰나.

“안녕하십니까, 유은설 홀더님.”

최근 들어 지겹게 본 얼굴이…

또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부정적인 수식어처럼.

당연히 유은설의 반응도 좋을 리 없었다.

“…제가 그만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찬 채, 그녀의 앞을 막아선 중년.

날카로운 인상에 딱딱한 얼굴.

그에 맞지 않게 친근한 태도로 건네는 인사.

서울 홀더 아카데미 소속 A급 홀더, 탁원호 교수였다.

탁원호는 쌀쌀맞은 유은설의 응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이번에도 같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관심 없어요, 아카데미 교수직은.”

“교수직이 아니라 강사직입니다. 단기간이죠.”

“같은 이야기예요.”

몇 번을 거절했던 이야기인데, 탁원호도 참 끈질겼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굳이 또 설악산 입구까지 오다니.

유은설도 어지간해선 나름 홀더 계에서 명망 있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중요한 일.

그 역할이 교수든, 강사든.

그녀는 아카데미에 묶여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서로 시간 낭비예요.”

유은설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조금 세게 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나마 탁원호이기에 이 정도 예의를 차린 것이다.

다른 홀더가 계속 이렇게 찾아왔다면, 유은설도 이 정도로 넘어가진 않았다.

그러나…

“특별한 홀더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뚝.

탁원호의 그 한마디에 유은설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등을 돌리자, 탁원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설악산 필드, 대관령 필드, 한계령 필드… 최근 강원도 내 주요 상급 필드에 임시 파티를 꾸려 사냥을 나가시는 것으로 압니다. 전원 B급 이상, 그리고 매번 다른 홀더들로.”

유은설의 최근 행보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S급 정도 되는 홀더가 뜬금없이 강원도 주요 필드 지역에서 임시 파티를 꾸려 사냥을 나서는데, 당연히 홀더 계에서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별다른 목적이 없고 단순히 사냥만 한 후 파티는 해산되기에, 이후 큰 관심이 쏟아지지는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유은설은 클랜이 없는 무소속 홀더.

전부터 임시 파티를 꾸리는 건 종종 있던 일.

딱히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가 없었따.

그러나 유은설을 영입하려는 탁원호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솔플로도 대부분의 필드 사냥이 가능한 S급 홀더가… 사냥을 위해 임시 파티를 꾸린다는 게 특이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홀더님을 영입하려고 준비하던 때에는 더욱이.”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그게 제 영입과 관련이 있는 이야긴가요.”

여전히 쌀쌀맞은 유은설의 말에.

탁원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카데미에 유은설 홀더님께서 찾고 계신 홀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간 학생 홀더에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

유은설은 말없이 그의 제안을 생각해봤다.

전자는 신뢰가 안 가지만, 후자는 맞는 말이었다.

지금껏 학생 홀더에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에 하나 그들 중 자격이 되는 이가 있다고 해도, 자신과 함께 공략을 나설 실력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C급에서 허우적대는 학생 홀더를 데리고 뭘 하겠는가.

적어도 A급, 아무리 낮게 잡아도 B급.

그 정도가 유은설이 허용 가능한 한계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유은설에게, 탁원호는 말을 덧붙였다.

“한번 확인이라도 해보시죠. 유은설 홀더님께서 찾는 홀더가 있을지 없을지. 그 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확인 후에도 거절하신다면, 더는 찾아뵙지 않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설악산의 거센 바람이 곳곳을 덮쳤다.

정중함이 담긴 탁원호의 말에.

유은설 역시 조금씩은 흔들리고 있었다.

* * *

강남의 한 카페 안.

나는 지하 던전 사냥을 마친 후.

가볍게 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부재중 전화 네 번에,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낸.

내 친구 한 명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문가은과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얘기하는 문가은의 이야기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뭘 해달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게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데.

하지만 잔뜩 풀이 죽은 문가은의 표정은.

간절해 보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울상이었다.

그녀는 바닐라 라떼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남자친구….”

제대로 들은 거 맞네.

아니, 이것조차 잘못 들은 건가.

요즘 들어 괴수 사냥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문가은답지 않게 수치스러워 하는 저 모습에서, 지금의 부탁이 진짜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 부탁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 마디를 건넸다.

“너 요즘 뭐 외로워?”

아.

이건 좀 심했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2주 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듣는 부탁이…

남자친구 역할 대행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얘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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