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86화 (86/353)

EP.86 부탁 (3)

<로열> 클랜 내에서 문가은의 위치는 애매한 편이다.

클랜 마스터의 딸에 홀더 등급마저 B급인 강주연과 달리, 문가은은 클랜 후계자도 아니고 등급 역시 C급.

다른 클랜원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진 않았다.

물론, 아빠인 문정혁이 <로열>의 개국공신 간부이자 클랜 마스터 황건욱의 매제인 터라, 클랜 내에서 가지는 권력은 압도적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빠의 권력이지, 문가은의 권력은 아니었다.

선임 클랜원도 아닌, 일반 클랜원.

그게 문가은이 <로열>에서 가진 직위였다.

‘그래도 뭐, 다들 대우해주니까.’

그렇다고 핵심 간부의 딸 직함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일반 클랜원으로서 별다른 업무 수행을 하지 않는 문가은이지만, 아빠의 위신 덕에 <로열> 내에서 어지간한 대우를 모두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이는 <로열>이 특별한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컸다.

클랜 마스터인 황건욱이 자식을 낳지 않았기에, 문정혁 집안은 그 권력을 어느 정도 공유 받는 편이었다.

강주연에 이어 ‘도재현 영입’을 시도할 수 있던 것도, 그런 대우와 인정에서 나오는 힘 덕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문가은 홀더님.”

“네, 좋은 아침이에요. 신입인 김동현 홀더 맞죠?”

“마, 맞습니다. 어떻게…”

“사냥팀은 어지간하면 다 알죠.”

그래서 문가은은 방학 동안, 꾸준히 클랜에 출근하며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받는 넘치는 대우에 안주하지 않고…

아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권리는 언제나 책임에서부터 나온다.

그게 문가은이 생각하는 권위에 관한 철칙이었다.

“주말에 다시 약속이 잡혔다. 이번엔 꼭 갔다 와라. 우리 말괄량이 딸 때문에, 내가 석양의 꽃 마스터를 볼 면목이 없어.”

…하지만 아빠인 문정혁은.

그런 철칙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클랜 내 아빠의 개인 사무실.

갑작스러운 콜에 서둘러 왔는데, 돌아온 말이 이거였다.

문가은은 지겨운 도돌이표 제안에 한껏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좀! 선 자리 안 나간다고 몇 번을 말해!”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난다.

학기 도중부터 방학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빠는 쉬지도 않고 소개팅을 주선했다.

혹여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멤버도 꾸준히 바꿔가며.

참 여러모로 열정이 대단한 아빠다.

“네 또래 친구 한 명 만나는 게 무슨 선 자리냐. 새로운 인맥을 쌓는 거지.”

아빠의 말에 문가은은 곧바로 반박했다.

“새로운 인맥을 무슨 레스토랑에서 단둘이 쌓아? 게다가 정현석 홀더는 전에 업무차 왔어서 클랜에서 본 적 있잖아. 이미 쌓인 인맥을 왜 다시 쌓아.”

<석양의 꽃> 후계자, 정현석.

아카데미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 홀더이자, 올해에 벌써 B급으로 승급해 홀더 계에서 촉망받는 유망주 중 하나였다.

반듯하게 생긴데다가 집안도 좋은 탓에 인기가 넘치는 그였지만, 문가은은 관심도 없었다.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연인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빠는 정현석이 맘에 든 것인지, 벌써 그와의 두 번째 자리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는 거다. 저번에 정현석 홀더가 널 보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더구나. 한눈에 반한 모양이야. 청춘인 거지.”

“난 만나기 싫다고!”

언성이 더 높아졌다.

문가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듯 커지면, 아빠 역시 세게 나온다는 걸 안다.

이런 식으로 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처리하던 서류도 내버려 둔 채 소리를 높였다.

“스무 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우리 딸이 답답해서 그런다! 남자친구 좀 만들어주려는 아빠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거야! 좀 만나면 어디가 덧나니?”

또 이 이야기였다.

도대체 딸의 연애를 왜 아빠가 걱정하는 걸까.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변명처럼 지긋지긋한 말.

다시 말싸움으로 번진 아빠와의 대화.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화가 난 문가은은…

순간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나 남자친구 있어!!”

…….

그 말을 끝으로.

언성이 높아지던 사무실이 고요에 물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정적이었다.

누군가 얼음 계열 마법이라도 펼친 걸까?

숨 막히게 차가운 침묵.

이는 서리처럼 방안을 덮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

그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문가은은…

상황을 인지하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망했다.’

순간의 감정에 너무 휩쓸렸다.

보통이면 실수라고 말하며 주워 담을 수 있겠지만, 이런 대화를 주도한 아빠에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아빠의 얼굴은 묘한 표정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남자친구가… 있었어?”

저 한 마디가 왜 이리 무서울까.

문가은은 크게 당황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다.

“아, 아빠. 그러니까 그게…”

“하하하. 그럼 그렇지. 우리 딸이 이 나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봤을 리 없지. 그것도 가장 뜨거울 나이인 스무 살 청춘에 말이야. 하하. 그래, 어떤 친구랑 사귀고 있니. 혹시 아빠도 아는 사람이냐?”

말을 이어갈 기회는 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조금의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아빠는 후속타를 몰아쳤다.

그런 아빠의 얼굴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걸 보니 갑자기 또 화가 난다.

자신의 소개팅을 주선하던 것.

그게 다른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정말 순수하게 딸이 연애하기를 원하는 아빠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서.

아니, 자신이 그렇게 연애를 못 해 보이나?

만약 그렇다 해도, 그게 티가 나나?

그런 의문이 문가은의 머릿속에 닥칠 때쯤.

아빠의 오해는 점점 이상한 쪽으로 쌓여갔다.

“아! 혹시 저번부터 계속 영입을 추진하던 그 친구냐? 그… 도재현이라고 했지, 아마?”

오해다.

이건 정말 큰일 날 오해다.

까딱하다간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질 수 있었다.

문가은은 재빨리 손을 흔들며 부정하려 했다.

“아, 아빠. 아니야. 걔는 그냥…”

“하하하. 이 응큼한 딸내미를 봤나. 웬 학생 홀더를 영입하자길래 뭔가 했더니, 자기 남자친구를 클랜에 데려오려고 해? 하하. 청춘이구나, 청춘이야.”

끝났다.

이미 딸의 연애를 확인한 아빠는 막을 수 없었다.

이 이상 자신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언제 한 번 아빠 앞에 데려와라. 아빠가 그 친구한테 밥 한번 사고 싶어지네. 밥만 먹을 거니까 이상한 걱정은 하지 말고.”

“…….”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려다가…

더 큰 문제가 생겨버린 상황이었다.

* * *

“…이렇게 된 거야.”

경위를 모두 설명한 문가은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상응해 내 얼굴도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아니, 뭐 이런 엽기적인 상황이….

나는 이해가 안 가 문가은에게 되물었다.

“진짜 아니라고 제대로 설명해봤어?”

“안 믿어줘. 내가 참다 참다 진심을 말했다고 생각하나 봐.”

“…모양새가 그렇긴 하네.”

특히 진심으로 딸의 연애를 원하는 아빠라면 그럴 만도 했다.

순수한 의도로 소개팅을 주선했던 건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니까.

‘근데 이런 아버지도 있구나….’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문정혁은 강우현과 정반대 성향의 아빠다.

강우현은 혹여나 내가 강주연의 남자친구일까 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 만약 그랬다면 클랜에서 내쫓을 생각이었다고 할 정도로 딸을 아끼는 팔불출이었지만…

문정혁은 딸의 연애를 권장하는 아빠였다.

딸을 데려갈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제발 딸 좀 데려가라고 직접 자리까지 마련하는 아빠라니.

이런 아빠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뭐가 정답이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 덕에 나와 문가은이 곤란해진 건 사실이었다.

“근데 날 영입하려고 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문득 의아한 점이 들어 물었다.

영입 제안을 받았던 건 강주연의 <불의 심판>뿐이었다.

<로열>의 영입 제안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자 문가은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거… 원래는 로열에서도 널 영입하려고 했거든.”

“언제부터?”

“완전 처음부터! 근데 주연이가 도둑고양이처럼 먼저 채간 거야. 으으… 우리가 먼저 데려올 수 있었는데.”

문가은이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양 주먹을 쥐고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이미 부탁하려던 건 다 잊고, 영입전에서 진 것만 생각나는 모양이다.

“푸흐-”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내가 아는 문가은답다.

그녀는 늘 지금처럼, 맥락에 상관없이.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그래서 아빠와도 자주 싸웠던 거고…

와중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을 해버린 거겠지.

“웃지 마, 나 진지해.”

문가은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면서 바닐라 라떼는 꼭 쥐고 있다.

바닐라 라떼가 그렇게 좋을까?

어려운 상황에도 커피는 잘만 들어가나 보다.

“나도 진지해. 지금부터 문가은의 남자친구가 돼야 하는데, 가벼운 마음가짐으론 안 된다고.”

웃음기를 머금고 내가 말하자…

문가은이 눈을 번쩍 뜨며 나를 봤다.

“도, 도와주는 거야?”

“그럼 안 도와줄까. 이미 아버지가 나로 알고 계시다며.”

“고마워! 진짜진짜 고마워, 도재현…!!”

격한 감사를 표하는 그녀를 보니 또 웃음이 나온다.

오늘 문가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다.

항상 장난칠 생각만 하던 친구가 맞나 싶다.

강주연도 이걸 같이 봤어야 했는데.

“아버지랑 같이 식사 가는 거. 그거 한 번이면 되는 거지?”

“응응! 그것만 아니면 부탁할 일도 없었어.”

“날짜는 아직 안 정해진 거고?”

“응. 너 편한 날로 정하면 돼.”

“오케이. 그럼 우리도 제대로 준비해서, 허점 없이 가자.”

솔직히 식사자리 한 번쯤은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

팔자에도 없던 남자친구 행세가 쉽지 않겠지만…

뭐, 무기한으로 도와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강우현처럼 어지러운 화법으로 함정을 파놓는 아버지면 모를까, 문정혁은 핀트만 맞으면 충분히 말이 통할 법한 사람이다.

적당히 이야기를 맞춰주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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