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부탁 (4)
팟-
파바밧-
거대한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먹잇감을 물어뜯는 야수처럼 주변을 훑던 냉기는, 이내 목표 지점인 바위에 닿으며 한데 집중되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훨씬 큰 크기의 거대 바위.
바위는 냉기에 잡아먹히며, 하나의 얼음 덩어리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위인지 얼음인지 알 수 없는…
일종의 얼음 동상을 제작하는 것 같았다.
쩌저저적-
이윽고 바위가 얼음에 완전히 잠식된 후.
그를 바라보던 한 여자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선생님! 저 성공했어요! 꺄아…!!”
한쪽으로 예쁘게 땋은 머리와 작은 핀 하나.
손에는 푸른 보석이 크게 박혀 있는 스태프.
오랜 훈련 때문에 복장은 헝클어졌지만,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2주 전 부산으로 내려온 후.
꾸준히 특별 교육을 받는 중인 김채은이었다.
그리고 그 옆.
그녀를 일대일 전담으로 가르치던 정선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앞쪽의 얼음 바위를 바라봤다.
‘진짜 2주 만에 해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방금 김채은이 펼친 기술은 [얼티밋 프로스트].
[빙결]로 펼칠 수 있는 단일 대상 스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최소한 B급 홀더 정도는 되어야 활용 가능하다는 고위 스킬이다.
정선영이 보유한 [얼어붙은 전장]의 궁극스킬 [블리자드]보다는 위력이 약하지만, 애초에 노멀룬의 일반스킬과 에픽룬의 궁극스킬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김채은이 방금 성공해낸 스킬은…
지금 그녀의 홀더 등급을 고려했을 때, 믿기지 않는 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괜찮은 재능 정도가 아니잖아….’
지난 2주간 특별 교육에 집중했던 결과.
정선영은 한 가지 결론에 닿을 수 있었다.
김채은이 단순히 얼음 계열뿐 아니라, 마법사 계열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만한 엄청난 재능을 지닌 홀더라는 것.
마법사 계열의 공통룬인 [주문강화]와 [마력증폭]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은 물론, 발현과 응용 방식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드리안 주문] 룬도 꽤 숙련된 경지를 보여줬다.
거기에 미숙하기는 해도 [고속영창]까지 가끔 시도한다.
이 정도 룬 세팅과 숙련도면 이미 학생 수준을 넘어섰다.
어지간한 클랜 소속 홀더, 그중 거의 B급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혼자 신나 펄쩍 뛰던 김채은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정선영을 보며 물었다.
정선영은 멍한 얼굴로 김채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채은아. 너 정말 주력룬이 노멀룬이니?”
“네? 아, 네. 빙결이 주력룬이에요.”
홀더의 보유룬은 암묵적인 비밀이지만, 수련을 위해 모든 걸 터놓은 사제간에는 크게 거리낄 게 없었다.
그리고 김채은의 확답.
주력 마력룬으로는 [빙결]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홀더의 재능은 곧 룬의 재능.
재능이 뛰어난 홀더라면, 으레 처음부터 레어룬이나 에픽룬을 보유하고 각성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스무 살에 미숙하게나마 [얼티밋 프로스트]를 구현하는 김채은이, 노멀룬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잠깐 고민하던 정선영은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채은이 넌 후천적 재능인 것 같다.”
“후천적 재능이요?”
“그래.”
각성 시 노멀룬만 보유했다고 해서, 해당 홀더가 평생 노멀룬만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아이템이나 던전 보상을 통해 룬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고, 홀더의 수련이나 성장 도중 깨달음을 통해 새로 룬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정선영이 생각하기에, 김채은은 후자의 케이스였다.
“미숙하게나마 얼티밋 프로스트를 구현했다는 건… 채은이 네 나이와 등급에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란다. 마력 배열까진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응용과 발현에서 다들 벽에 부딪히거든.”
후천적 재능의 홀더들은 각성 시 대부분 노멀룬을 얻는다.
대신 재능이 뛰어나고 이해의 깊이가 남달라, 그 수준을 극강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때문에 높은 수준의 룬 활용을 통해 나중에서야 관련 파생 룬, 혹은 레어 이상의 주력룬들을 추가적으로 얻곤 했다.
그리고 그간 지켜본 결과.
김채은은 이러한 후천적 재능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의 결과가 설명되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생각을 잠시 마음에 담았다.
어쩌면.
이대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면.
항상 홀로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주력룬 [얼어붙은 전장] 또한, 김채은이 얻게 될 지도 몰랐다.
정선영은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김채은을 바라봤다.
“이제부턴 스승님이라고 부르렴.”
“네? 스승님이요?! 그럼…”
“그래. 채은이 네가 내 전속 제자가 됐으면 한단다.”
“와, 와…!!”
전속 제자.
그 한마디에 김채은이 뛸 듯이 좋아했다.
믿기지 않으면서도, 날아갈 것처럼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얼티밋 프로스트] 시전에 성공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정선영도 선선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처음 받는 전속 제자지만, 신중하게 고른 첫 제자인 만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제자였고, 그럴 열정이 샘솟는 귀여운 제자였다.
“그리고 이제 서울로 가자. 부산에선 더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어? 정말요?”
스태프를 들고 총총 뛰어다니던 김채은이 멈춰섰다.
서울로 가자는 말에 반색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정선영은 그런 그녀를 짓궂게 바라봤다.
이번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으니?”
“헤, 헤헤….”
“돌아가면 예쁘게 단장할 준비나 하렴. 잘 보일 사람이 있을 거 아니니? 8월까진 수업 없을 거니까, 그 걱정은 말고.”
전속 사제 관계는 제자만 배우는 단계가 아니다.
스승인 정선영으로서도 준비해야 할 게 상당히 많았다.
임시로 가르쳤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본격적이고 정식 관계로 가르치는 거니까.
그를 위한 2주간의 휴식 선언.
김채은은 아무렴 좋다는 표정이었다.
“넵.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 새로운 교육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 돌아가는 것도 기쁜 그녀였다.
서울엔,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에.
* * *
문정혁과의 식사는 다음 주말로 결정됐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우리는 질질 끌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불의 심판> 인턴 일도 그리 바쁘지는 않았다.
‘뱀이 뒤덮은 숲’ 공략이 워낙 대형 프로젝트였던 터라, 그를 끝내고 나니 사냥 5팀 내에서의 업무도 꽤 널널했다.
덕분에 문가은과 나는 일찌감치 만나, 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장소를 어디로 하기로 했지?”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
나는 순간 중요 사실을 잊어 문가은에게 물었다.
문가은은 매서운 얼굴로 내 등짝을 때렸다.
“혼날래? 벌써 까먹으면 어떡해. 임시반 선정 대련 있던 훈련장이잖아.”
“아, 맞다 맞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로 호감이 있었던걸로?”
“응. 사귄 거는 그 한 달 뒤. 3월 27일.”
그때부터 한 달 후에 사귄 거면…
지금 방학이니까 네 달째 사귄 건가?
그걸 또 날짜로 환산하면 며칠인 거지.
분명 다 공부했던 건데, 망각이라는 녀석이 참 무서웠다.
“사귄 지 112일. 100일 넘은 지 얼마 안 된 커플이야.”
내 상황을 눈치챈 건지, 문가은이 궁금증을 풀어줬다.
와…
순간 감탄이 나왔다.
이걸 미리 계산해놓고, 벌써 외웠어?
“문가은, 너 연애할 때 철저한 스타일이구나?”
“이잇… 네가 먼저 허점 없이 하자고 했잖아!”
짝-
또 한 번 문가은의 스매쉬가 내 등을 때린다.
혼날 짓을 하긴 했다.
다른 것들은 다 잘만 외워지는데, 날짜나 장소 같은 디테일한 건 왜 이렇게 안 외워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직접 입으로 중얼거리면서까지 날짜를 외워갔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어 문가은에게 물었다.
“아, 맞다. 나 불의 심판 인턴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설정상 나는 문가은의 남자친구고, 그녀는 <로열>로 나를 영입하려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불의 심판> 인턴에 다니는 상황.
공과 사는 구분되는 게 맞지만, 혹여나 문정혁이 이를 의심쩍게 여길 수도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널 남자친구라서 영입하려 한 게 아니라, 진짜 재능 있는 홀더라 스카웃한걸로 할 테니까. 실제로 그게 이유기도 했고.”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나야 좀 낯간지럽긴 하겠지만, 그런 이유라면 <불의 심판>에서 날 영입한 것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호칭은 어떻게 할 것인지(이건 평범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사귀는 사실은 왜 비밀로 한 것인지 등… 의문을 품을 법한 자질구레한 것들에 입을 맞춰갔다.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 앞에 도달해 있었다.
“와… 예쁘게 잘 꾸몄다.”
역삼동에 자리한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요즘 강남에서 인기를 끄는 레스토랑답게,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깔끔한 아웃테리어가 가장 먼저 시야를 장식했다.
현대 건물임을 나타내는 화려한 느낌과 중세 유럽의 건축 양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외부 디자인에만 꽤 많은 돈을 썼을 것 같다.
게다가 맛도 떨어지는 집이 아니다.
듣기로는 미슐랭 가이드 3스타 선정 음식점이라던데, 나 역시 [요리] 룬 덕에 입맛이 높아질 대로 높아졌기에 상당히 기대가 갔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가기 전.
뭔가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없네?”
매장 안에 사람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분명 인기도 많고 예약도 꽉 차 있을 음식점인데, 레스토랑 내부는 이상하리만치 한산해 보였다.
그 기이한 모습에.
문가은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하아… 아빠가 오늘 하루 전부 빌렸나 봐.”
과연.
단번에 이해가 됐다.
국내 3대 클랜 간부에게 이 정도 음식점을 전세 내는 건 푼돈에 가깝겠지.
이제야 잘 나가는 친구의 아빠를 만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것도 남자친구로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때라는 걸 느꼈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
“응! 어… 어?”
레스트랑 안으로 같이 들어가려던 찰나.
문가은이 순간 깜짝 놀라 나를 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결연했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굴색도 잔뜩 붉어져 있다.
“뭐, 뭐, 뭐야? 왜, 왜 손을 잡아?”
아.
이것 때문에 놀란 건가.
자연스럽게 문가은의 손을 맞잡으려고 했던 건데…
이건 그녀의 계획에 없었는지, 다급히 손을 빼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우리 지금 연인이잖아. 아버지 제대로 속이려면 손 정도는 잡고 들어가야지.”
내가 애인 대행 같은 걸 해본 적은 없지만…
스킨십도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던 건가?
그러나 문가은은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말에 겨우 답했다.
“그, 그런가? 그, 근데 100일밖에 안 됐는데 소, 손잡아도 되는 거야?”
“…….”
살짝 머리가 아파 오려고 한다.
…이거 앞으로 더 험난해지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