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부탁 (5)
문가은은 터질 듯한 심장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바로 옆.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걷고 있는 남자.
아니, 남자가 아니라 친구…
도재현 때문이었다.
‘저, 정신 차려, 문가은.’
진짜 남자친구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해 줄 남자친구 역할이다.
그의 행동에 놀랄 일도, 의미부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듯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 박동이 요란해지는…
그럴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손을 잡다니….’
다만, 도재현이 뜬금없이 스킨쉽을 해왔기에.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손잡고 걷기’를 시전했기에…
몸과 마음이 놀랐을 뿐이었다.
사귄 지 100일이 넘은 커플이 손을 잡는다.
이런 건 문가은의 연애 지식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지식이 거의 없긴 했다.
언제부터 스킨쉽을 해야하는 건지도 잘 몰랐으니까.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고, 관련 지식은 모두 드라마로만 쌓아왔었다.
현실에서의 연애 감각이 부족한 게 당연했다.
강주연이 ‘너도 연애 못 해봤잖아’를 시전했을 때, 아무 말 못 한 이유는 그런 탓이었다.
‘근데 그게 다 진짜였다고…?’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첫눈에 반해 번호를 묻고 고백하거나,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거나, 운명처럼 마음이 맞아 사귀게 된다거나…
문가은은 그런 것들이 판타지라고만 생각했었다.
모두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껏 자신에게 번호를 묻는 사람들도 무시했었다.
그들이 드라마를 보고 따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게 현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오던 도재현의 행동이 그를 방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문가은은 한 가지.
더욱 충격적인 사실에 생각이 닿을 수 있었다.
‘그, 그럼 키, 키스도…’
사귄 지 100일이 넘은 커플.
철저한 성공을 위해 문가은 스스로 계획한 설정.
그에 따르면, 자신과 도재현이.
무려 ‘키스’까지 해도 되는 커플이라는 뜻이다.
뭔가 포옹이라던가 뽀뽀라던가.
몇 단계 스킨쉽을 지나쳐 버린 상상이지만…
이미 실타래가 하늘 끝까지 풀어진 문가은의 머릿속은, 온통 망상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그건 진짜 안 돼!”
문가은이 입구에 들어서다 말고, 갑자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도재현이 되물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순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지 잊은 걸까.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버린 문가은이 같이 당황했다.
“어… 어?”
“진짜 안 된다며. 뭐가 안 되길래 그래.”
아무래도 속으로 말하던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아, 괜찮아. 그냥…”
문가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수습하려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시선에 도재현의 입술이 들어오는 걸 느꼈다.
한 번도 자세히 쳐다본 적 없던 남자의 입술.
이는 의외로 짙은 색과 선명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날카로운 그의 인상처럼 투박한 입술이었다.
그러니까 저 입술이랑 자신의 입술이…
‘미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문가은!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제바알!!’
문가은이 또다시 자신의 머리를 마구 쳤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곳곳에 침투한다.
아빠를 속이기 위해 준비한 계획인데…
오히려 들어가기 전부터 넘어야 할 관문이 많았다.
* * *
‘또 이러네.’
얘 정말 괜찮은 걸까.
혼자 자신의 머리를 마구 치고 있는 문가은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분명 준비할 땐 나보다 더 철저하고 꼼꼼했었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긴장이 많이 되는 모양이다.
별수 있나.
문정혁 앞에서는 최대한 긴장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어서 오십시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문가은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레스토랑 직원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그에 마주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문정혁 홀더님 예약으로 왔는데요.”
“네. 안쪽 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감사합니다.”
커다란 홀 내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방이 있었다.
방 규모도 꽤 커서 두 가족은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다.
직원은 방까지 우리를 소개한 후.
가볍게 인사하며 물러섰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턴 긴장해야 했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될 테니까.
‘문가은은… 아직 안 돌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다.
뭐, 방에 들어가고 아빠 얼굴 보면 달라지겠지.
나는 가볍게 방 입구를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
중후한 목소리가 밖까지 울려 퍼졌다.
저번 강우현을 만날 때도 느꼈지만, 이름 있는 고위 홀더들은 전부 목소리가 좋은 것 같다.
듣기만 해도 위엄이 전해지는 강렬한 목소리.
카리스마는 이토록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차분하게 물을 마시는 문정혁이 보였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과 시계.
그리고 중년치곤 젊어 보이는 외모가 돋보였다.
‘저건….’
그러나 안에 들어오니, 다른 게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정혁이 앉은 자리 뒤편.
그 벽면엔 훈장처럼 거대 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에픽 장비, [풍랑궁]이었다.
‘포스 장난 아니다….’
과연 국내 궁수 계열 중 원탑이라고 불리는 홀더답게, 보유한 장비마저 웅장함과 기개가 느껴졌다.
내가 잠시 감탄하고 있을 사이.
문가은이 먼저 문정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 우리 왔어.”
특유의 밝은 기운을 되찾은 그녀의 목소리.
잠시 패닉이었던 아까 상태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나 역시 문가은을 따라 문정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문정혁 홀더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재 서울 홀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C급 홀더,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식사가 거의 준비됐으니, 우선 편히 앉게. 가은이 너도 앉아라.”
처음 마주하는 문정혁의 목소리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특히 그의 시선이 우리가 맞잡은 손에 닿은 후.
더없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변해갔다.
…이거 점수 딴 거 맞지?
딸의 연애를 적극 권장한다더니, 확실히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식사는 이곳 수석 셰프에게 맡겼네. 이탈리안 코스 요리로 나올 텐데, 혹시 못 먹거나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주게.”
“아닙니다. 이탈리안 푸드는 저도 즐겨 먹습니다.”
“아빠. 여기 오는 것 자체가 불편해. 무슨 상견례 하는 것도 아니고, 아빠가 내 남자친구를 왜 보겠다는 거야.”
자리에 앉던 문가은이 틱틱대며 말했다.
참고로 이것도 계획된 거다.
아빠와의 친분을 이용해 말을 많이 한 후.
최대한 대화 상대를 그녀 자신으로 끌고 가는 것.
혹여나 내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나와의 대화를 줄이는, 우리만의 특별한 전략이었다.
문가은은 확실히 긴장이 풀린 건지, 아까보다 훨씬 여유 있는 모습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크흠. 같은 홀더에 아카데미 학생이라니 궁금해서 그렇지. 아빠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잖냐.”
“거짓말. 그냥 내 말 못 믿은 거면서. 전에 내가 재현이 로열로 영입하자고 했을 땐 듣는 척도 안 했잖아.”
“흠흠. 에피타이저 나오는구나. 일단 먹자.”
문정혁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대화의 첫 포문으로는 꽤 성공적인 시작.
나는 문가은을 살짝 바라보며 ‘나이스!’라는 느낌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문가은은 어쩐지 살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아까부터 왜 이래, 진짜.
“잠시 요리 설명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번 코스의 첫 번째 단계인 안티 파스티입니다. 안티 파스티는 고객님들께서 흔히 알고 계신 에피타이저로…”
아까 마주쳤던 직원이 에피타이저 요리를 가져오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코스의 에피타이저는 무난한 크로스티니.
살짝 구워진 빵과 그 위에 치즈, 야채, 작은 닭고기 등이 얹어져 있었다.
적당한 재료들이 조화롭게 자리한 크로스티니는, 어지간한 샐러드만큼의 상큼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보통 레스토랑에선 식전 빵을 먼저 주곤 하는데, 이곳은 에피타이저로 크로스티니를 내며 식전 빵 단계는 생략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만들어봐야겠다.’
요즘 식당에 가기만 하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가.
어쩌면 내 [요리]에 맛을 들인 후, 점점 다양한 메뉴를 요구하는 김채은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시 크로스티니의 비주얼에 시선을 뺏긴 와중, 직원이 설명을 마치고 떠났다.
그리고 문정혁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 도재현 군, 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가은이가 자네와 사귄다고 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많았네. 아무래도 딸의 첫 남자친구다보니 말이지, 하하.”
“아빠…!!”
뜬금없는 모태솔로 고백에 문가은이 소리쳤다.
왜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냐는 듯한 얼굴이다.
나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아까 그런 거구나.’
그제야 문가은의 ‘100일 스킨쉽 이론’이 이해가 갔다.
연애 경험과 지식이 없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문가은이 모태솔로라는 건 의외다.
저 얼굴과 몸매에 한 번도 연애 경험이 없다니…
특히 성격도 무던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그녀기에, 그런 그녀가 지금이 첫 연애라는 건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니지. 지금 나랑 사귀는 건 가짜잖아.’
아무래도 너무 역할에 몰입한 모양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문정혁은 문가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성격이 급해 가장 궁금했던 걸 좀 물으려 하는데… 혹시 괜찮겠나?”
도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런 뜸을 들일까.
살짝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저도 가은이 아버지이자, 로열의 개국공신인 문정혁 홀더님과 대화하는 게 무한한 영광입니다.”
“하하. 이 친구, 내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하는군.”
아부성으로 들리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문정혁은 A급 홀더 중에서도 유독 실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고위 홀더 중 한 명이다.
굳이 등급을 새로 매겨야 한다면 A+급 정도.
그간 공략해 온 던전이나 괴수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유구한 홀더 계 역사에 이름을 새긴 업적도 많았다.
특히 국내 5명의 S급 홀더 중, 궁수 계열은 한 명도 없다.
즉,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궁수 계열.
이는 비공식적으로 문정혁인 것이다.
<로열>의 개국공신 간부로 자리를 잡은 게, 단순히 황건욱의 매제였기 때문만은 아님을 말해주는 사실들이었다.
문정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다른 게 아니라…”
그는 문득 크로스티니를 썰던 나이프를 멈춘 채.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 혹시 결혼을 한다면 몇 살쯤에 하고 싶은가?”
“푸, 푸우-”
“아빠…!!”
마시던 물에 사레가 들린다.
옆의 문가은은 또다시 소리쳤다.
…잘못 들은 건가?
아무래도 평가를 정정해야겠다.
전엔 분명 강우현보다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문정혁은 절대 그에게 뒤처지지 않는, 여러모로 막강한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