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얼룩진 암석 더미 (1)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가 모두 끝이 났다.
시작부터 황당한 질문을 받긴 했지만, 그럭저럭 그를 넘긴 뒤의 대화들은 평범했다.
문정혁은 예상했던 것보다 우리의 연애 과정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클랜에 관한 이야기나 요즘 홀더 계의 동향, 아카데미 생활은 어떤지 등의 평범한 홀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사귄 지 며칠째라든지, 만났던 장소가 어디라든지…
그런 디테일한 요소까지 외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식사가 끝난 후 가벼운 술자리를 제안했다.
…나와 단둘이서.
“아빠! 재현이 좀 그만 괴롭혀. 스무 살이랑 둘이 술 먹어서 뭐하려고.”
당연히 문가은은 반발했다.
같이 있는 식사자리도 좌불안석이었는데, 그녀가 없는 자리에선 불안감이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문가은이 ‘도재현’이라고 안 하고, 자꾸 ‘재현이’라고 하니까 기분이 묘하긴 하다.
이래서 첫 호칭이 중요한 건가?
“하하. 너무 그러지 마라. 아빠가 재현 군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니까. 식사자리처럼 평범한 이야기만 할 거야.”
“그래, 문가… 아니, 가은아.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
나는 불안해하는 문가은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정말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아까처럼 ‘결혼은 언제 할 건가?’ 같은 질문이 나오면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그 때 한 번이었고 설사 나온다 해도 어떻게든 얼버무릴 순 있다.
일단 강우현과는 달리, 딸의 남자친구에게 호의적인 문정혁이었기에 대화 자체가 불편하진 않았다.
문가은은 문정혁과 나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게 문가은이 돌아간 후.
문정혁과 나는 근처에 자리한 고급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안쪽은 의외로 평범했다.
화려하지 않은 조명과 심플한 분위기.
와인바 치곤 수수한 장식이 매장 안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고급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 같다.
“혹시 여기도…”
“하하. 시끄러운 건 질색인 편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레스토랑에 이어 와인바도 전세를 낸 모양이다.
문정혁은 꽤 자주 오는 가게인 듯.
자리에 앉으며 능숙하게 와인을 오더했다.
나 역시 딱히 가리는 술은 없어 그의 주문에 맡겼다.
“평소에 술은 자주 하는 편인가?”
문정혁이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엔 마십니다.”
“하하. 아까도 느꼈지만, 자네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재주를 가진 것 같아.”
그는 건배하듯 잔을 부딪쳤다.
“그런 성향이 가은이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기 좋네.”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거 사실 가짜 연애예요.
목구멍에서 삼킨 말들이 양심을 쿡쿡 찌른다.
진심으로 좋아하시는 것 같아 더 마음에 걸렸다.
“아까는 곤란한 질문을 해서 미안했네.”
“아닙니다. 충분히 궁금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몇 살쯤에 하고 싶냐던 질문.
다행히 아직 스무 살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런 걸 고려하고 연애하지는 않는다는 정론이 통했다.
문정혁도 ‘당장 우리 가은이와 결혼하게!’와 같은 막무가내 아버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했던 것도.
이렇게 나와 따로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가은이 세 살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네. 원인 모를 심장마비로.”
적당히 술이 들어가며 분위기가 풀어질 무렵.
문정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대충은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문가은은 나름 원작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고, 당연히 대략적인 가족 관계 정도는 나왔었으니까.
다만, 그사이에 얽힌 복합적인 집안 사정은 처음 들었다.
“슬픔을 잊으려 일을 했었네. 스스로를 챙길 여유도, 가족을 돌볼 자신도 없었어. 15년 간 일, 또 일. 정신없이 일만 하면서, 결국 클랜을 키워내긴 했지만… 아버지로서 딸에겐 몹쓸 짓이었지.”
다행히 문가은은 올바르게 자랐다.
사랑받지 못하며 자랐지만, 자신 안의 사랑을 베풀며 그 공백을 채웠고…
다가오는 이는 없었지만, 먼저 용기 내 다가가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갔다.
누구보다 밝고 활기찬 그녀의 성격이.
그간의 기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 자꾸 소개를 주선하셨던 것도…”
“하하. 그렇네. 자격 없는 아빠 주제에, 뒤늦게서야 딸의 짝을 찾아주고 싶었네. 가은이가 밝게 잘 자라줬지만, 연애를 안 하는 게 그런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는 문가은이 소개를 계속 거절하는 게,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문가은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냥 진짜 선 자리 같아서 싫어하는 것 같던데.’
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딸을 챙기려는 아빠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그간 자신이 못 해준 만큼, 그녀를 더욱 아껴주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주고 싶었겠지.
섣부른 결혼 이야기도 아마 그래서 물어봤을 것이다.
“어쨌든 자네처럼 괜찮은 친구와 만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일세.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야. 가은이는 이미 상처를 씻고 잘 지내고 있는데 말이지. 하하.”
“…가은이도 문정혁 홀더님의 마음을 충분히 잘 알 겁니다.”
왠지 모르게 씁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느껴져, 어색하게나마 위로를 건넸다.
그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의외로, 정말 의외로…
문정혁과의 이런 대화는 지루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불의 심판에서 강우현이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잠시 무거웠던 이야기가 끝나고, 문정혁이 물었다.
아.
강우현을 친근하게 부르는 그 모습에 드디어 생각났다.
문정혁과 강우현.
두 홀더는 생각해 보니 오랜 친구였다.
두 아버지가 친한 사이였기에, 강주연과 문가은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된 케이스였다.
‘생각보다 잘 챙겨준 것 같은데….’
딸을 돌보지 않고 일만 했다더니, 친구를 만날 땐 또 같이 데려갔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지금 인턴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하. 딸의 남자친구가 내 친구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참 재밌는 일이야. 주연이에게 스카웃을 받았나?”
“예. 가은이도 그렇고, 강주연 홀더도 그렇고… 다들 저를 좋게 봐 준 모양입니다.”
문정혁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겸손이 과하군. 자네 실력은 나도 익히 들었네. 보기 드문 다재능 멀티 홀더에, 동급 홀더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가은이 요청으로 우리 클랜 스카우트 팀장이 자네의 학기말 평가를 점검한 적도 있다네. 나도 그 보고서를 읽었었지.”
“아….”
일전에 강주연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내 영입을 위해 클랜의 스카우트 팀장에게 부탁해, 내 실력을 점검한 적이 있다고.
아마 <로열>에서도 그때 같이 탐사를 온 모양이었다.
“기회가 되면 로열에도 한 번 놀러오게. 자네에겐 영입 부담을 주고 싶지 않지만… 강우현이에게 무작정 자네를 뺏기는 건 나도 자존심이 좀 상하는군. 하하. 로열이 얼마나 괜찮은 클랜인지 한 번 느끼게 해주겠네.”
문정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내게 사람의 진심을 판별하는 눈 같은 건 없어도.
적어도 지금 문정혁에게서 보이는 마음만큼은, 따뜻한 선배 홀더의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가은의 부탁으로 가졌던 문정혁과의 자리.
비록 내 역할은 가짜였지만…
그와 나눴던 이야기들은 모두 진솔했다.
한 사람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긍지가 있는 홀더.
그게 내가 오늘 느낀, 문정혁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나는 덩달아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예, 영광입니다.”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하루였다.
* * *
콰가가가-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번개가 함께 내리쳤다.
밖에 나가기엔 굉장히 궂은 날씨.
덕분에 나는 황금 같은 일요일을 집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혼자는 아니었다.
상도에 자리한 내 자취 집.
혼자 살기엔 넓은 탓에 가끔 공허한 느낌도 드는 집.
이곳엔 익숙한 얼굴이 찾아와 있었다.
“서울, 복귀…!!”
김채은이 돌아왔다.
대구에서의 경매 후, 바로 부산으로 떠났으니까…
거의 2주 만에 돌아온 그녀다.
김채은은 못 보던 옷과 렌즈까지 낀 채, 자신이 돌아왔음을 과시했다.
내가 줬던 [서리가 낀 스태프]도 손에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그 선언을 꼭 내 집에서 해야 할까?”
마치 등산이라도 온 듯 ‘야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채은.
…이런 건 보통 자기 방에서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김채은이 허리에 손을 짚으며 눈을 흘겼다.
“뭐야, 그 태도? 나 안 반가워?”
“아니, 당연히 반갑지. 근데…”
내 시선이 김채은의 손.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뒤집개로 향했다.
“네 손에 들린 그 기구가 좀 무서워서 그렇지.”
“무서울 게 뭐 있어. 내가 파전 해준다니까.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에 막걸리! 기대해. 이번 요리는 꼭 내가 널 이겨보겠어.”
“…….”
기대하라고?
…그게 무섭다는 건데.
김채은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으로 놀러 왔고, 때마침 비가 쏟아지자 파전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준비해왔다.
‘복귀 축하 파티로 파전을 해줄게!’라는 명목으로.
아니, 복귀 축하 파티니까 당연히 축하해주는 내가 음식을 하는 거 아니야?
그런 논리를 펼쳐봤지만, 이미 요리에 진심모드가 된 김채은을 말릴 순 없었다.
치이이-
천천히 반죽을 후라이팬에 부으며 요리를 시작하는 김채은.
오랜만에 파전의 비주얼을 보니, 어쩐지 맛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멍하니 그걸 보다가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다시 교육받는 거야?”
그간 얼굴은 못 봤지만 연락은 계속 했었다.
때문에 김채은의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다.
정선영과 함께했던 훈련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점을 높게 산 정선영이, 그녀를 전속 제자로 들였다는 것.
[빙결]과 관련해선 따라올 자가 없는 정선영의 실력과 위치를 생각하면, 이는 김채은에게 상당히 잘 풀린 일이었다.
“아마 8월쯤? 7월엔 더 수업이 없대.”
“그럼 2주간 휴식이야?”
“응! 훈련만큼 휴식도 중요하다고, 푹 쉬라고 하셨어.”
그 이야기를 듣자, 잠시 미뤄뒀던 던전 공략 계획이 생각났다.
‘얼룩진 암석 더미’.
C급에서 B급 괴수들이 주로 출현하는 중상급의 던전.
설악산 쪽에 자리한 던전으로, 아직 공략된 적이 없는 미발견 던전이다.
원작에선 후반부 박진우가 홀로 찾아내고 공략하는 던전.
때문에 박진우와 같이 공략하려 했던 던전인데…
이 게을러터진 자식이 아직도 C급 승급을 안 했다.
도대체 이 널널한 방학에 그것도 안 하고 뭘 하는 건지.
“그럼 주말에 날 잡아서 필드 사냥 한 번 갔다 올까?”
“필드 사냥?”
“응. 너 실력도 많이 올라왔고, 나도 전보다 꽤 늘었으니까… 난이도 좀 높여서 설악산 쪽으로 가자.”
그래서 난 이를 김채은과 공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연히 대놓고 말할 순 없고, 설악산 필드를 공략하다가 우연히 찾게 되는 식으로 해야 할 것 같았다.
“…둘이?”
“어? 어, 당연하지. 어차피 고등급 괴수들 있는 높은 곳까진 안 올라갈 거야. 걱정하지 마.”
파티 인원 부족에 대한 걱정을 덜어줬다.
이미 솔플로도 던전 공략 경험이 있기에, ‘얼룩진 암석 더미’ 정도는 김채은과 둘이서 공략이 가능할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채은은 다시 파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화장실을 가려 등을 돌렸다.
그런데…
“…단둘이, 등산 데이트… 기회….”
파전을 굽는 김채은에게서.
뭔가 이상한 중얼거림이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