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92화 (92/353)

EP.92 얼룩진 암석 더미 (4)

홀더의 전투에서 파티 내 역할군은 명확하다.

전사 계열은 탱커, 마법사 계열은 딜러.

나머지 계열은 보조를 맡거나, 딜러가 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전사 계열이 탱커를 맡는다는 점이다.

이 안에서 방패를 사용하는 퓨어 탱커와 딜탱을 동시에 담당하는 브루저로도 역할이 나뉘기는 하지만, 어쨌든 둘 다 파티의 탱커를 맡는 건 확실하다.

‘나도 브루저 형태의 탱커였었고.’

그동안 내가 전투에서 맡았던 모든 역할은 탱커였다.

아카데미 지하 던전에서 5인 파티를 이룰 때도 그랬고, 스월 레비아탄을 사냥할 때도, 뱀이 뒤덮은 숲을 공략할 때도…

심지어 김채은과 2인 파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역할을 스위칭하며 딜러 포지션이 바뀔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앞선의 탱커 역할은 내 몫이었다.

‘…너무 신났잖아.’

그런데 방금 전투에선 너무 많은 걸 보여줘 버렸다.

돌격 콤보를 통해 특수 계열인 기병대의 느낌을 보여줬고, [침투하는 뇌기]를 통해 번개 계열 마법사의 힘을, 다양한 무기 활용으로 복합 전사 계열의 모습을…

나아가 [디바인 슬래쉬]를 쓰며 성기사의 모습까지 보여줬다.

‘…채은이는 가만히 있는데 끝나버렸네.’

반면 김채은이 사용한 스킬은 [프로즌 포그] 하나.

위력은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괴수들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보조 스킬이다.

그녀가 지닌 [아이시클 샷]이나 [콜드 크러쉬] 등의 핵심 공격 스킬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금세 전투가 끝나버린 것이다.

아마 지금 김채은의 눈엔 C급 홀더였던 탱커 홀더 친구가, 갑자기 혼자서 C급 괴수 10마리를 다 쓸어버린 걸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게 정확하게 맞다.

“방금 그 번개는 뭐야? 그 신성력 같은 건 또 뭐고?”

김채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시 물어왔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아, 그게….”

“재현이 너, 마법도 쓸 줄 아는 거였어?”

“음… 마법까진 아니고….”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변명이 떠올랐다.

특수 아이템을 쓴 거다, 던전 공략 보상으로 우연히 룬을 얻었다, 고급 장비에 내재된 스킬들로 한 거다… 등등.

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굳이 다 숨겨야 하나?’

변명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미 박진우나 강주연 등 몇몇 친구들은 대략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인 김채은에게 이를 숨긴다는 게 괜히 껄끄러웠다.

물론, [룬 사냥꾼]에 대한 걸 모두 말할 수는 없다.

적당한 거짓말은 필요하겠지.

다만, 최소한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앞으로 가지게 될 룬들에 대해서만큼은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화르르륵-

손끝에서 불꽃 하나를 피어 올렸다.

[이글거리는 불꽃]의 활용이다.

김채은에게 그를 보여주며 말했다.

“마법 쪽 스킬은 쓸 줄 몰라. 내가 마력제어에서 배열이나 발현 쪽은 아예 안 배워서. 근데 이렇게 단순 속성 계열 마력 공격으로는 쓸 수 있어. 관련 룬들을 가지고 있거든.”

김채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를 바라봤다.

“우와- 신기해. 뭐야? 화염 룬인 거야?”

“비슷해.”

파츠- 파츠츠-

이번엔 [침투하는 뇌기]를 보여줬다.

작은 불꽃은 사라지고, 손가락엔 지직거리는 전기가 맴돌았다.

“이게 아까 늑대들 잡을 때 쓴 거. 번개 계열 속성 마력룬.”

“와… 대단하다. 나 속성 계열 멀티 홀더 처음 봐.”

김채은이 연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내 손을 봤다.

마법사 계열 홀더들은 보통 하나의 속성을 주력룬으로 얻는다.

각성 시 [화염]을 얻는 홀더는 불 계열 속성을, [뇌전]을 얻는 홀더는 번개 계열 속성을 주력으로 삼게 되는 것.

가끔 두 개 이상의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 계열 내 멀티 홀더를 ‘속성 계열 멀티 홀더’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의 대표적인 홀더가, <석양의 꽃> 클랜 마스터 정윤찬.

물 계열 마법과 번개 계열 마법.

둘을 동시에 다루는 A급 홀더로 유명했다.

‘로열에는 성나연 홀더도 있고.’

검(무기)과 바람(마력)을 동시에 다루는 성나연.

물(마력)과 번개(마력)를 동시에 다루는 정윤찬.

이들은 멀티 홀더 사이에서도, 유난히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며 고위 홀더의 자리를 차지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무기도 다양하게 다루고 속성 마력도 여러 개 다루니…

이건 뭐, 혼종 중에서도 혼종이라고 볼 수 있었다.

“헤헤. 이거 기사 나면 다들 난리 나겠다. 성나연과 정윤찬을 합친 멀티 홀더, 도재현! 이런 느낌으로.”

“윽. 좀 봐주라. 그 사람들하곤 비교도 안 돼.”

“왜애- 재현이 너도 엄청 빨리 성장한 편이잖아.”

김채은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 밝은 모습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아까까지 고민하던 내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채은아.”

“응?”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룬이 있는지 안 궁금해? 네 말처럼 홀더 계에 밝혀진 적 없는 케이스잖아.”

“응! 안 궁금해.”

김채은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재현이가 말 안 했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원래 룬은 자기 스승님한테도 가르쳐주지 말라고 하잖아. 스승님들이야 어차피 다 알긴 하겠지만, 헤헤.”

정론에 가까운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딱딱 정해지지 않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을 보면 궁금해하기 마련이고, 내가 그 사람과 친분이 있다면 더욱 그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정상이다.

그런데 김채은은 그 마음을 꾹 참아내고 있었다.

‘친할수록 지켜줘야 한다는 건가?’

참, 뭐랄까…

김채은다운 배려심이었다.

* * *

‘멋있다….’

김채은은 넋을 놓은 채.

자신의 친구, 도재현을 바라봤다.

힘을 드러낸 도재현의 전투엔 거침이 없었다.

각종 룬과 무기를 자유롭게 활용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그가 지닌 다양한 무기는 공격에 변칙을 주는 도구였고, 여러 마력 룬은 공격에 위력을 더하는 기폭제였다.

‘마법은 못 쓰지만… 마력 공격 자체는 잘 다뤄.’

김채은이 생각하기에 도재현은 마력 룬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적재적소에 어떤 룬을 써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갈라진 대지의 정원]을 이용해 땅을 움직일 땐 전투 구도 자체를 유리하게 바꾸고, [이글거리는 불꽃]을 쓸 땐 나무에 불을 붙여 괴수들을 사냥한다.

특히 각종 신체 강화 보조룬과 [은신]을 활용할 땐, 기습으로 너무 쉽게 사냥이 끝나기도 했다.

김채은은 그 룬들의 내용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전투에 깊게 관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도재현의 재능이 뛰어나고,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룬이 많으면 좋은 거지…!’

사실 도재현의 다양한 룬에 대해.

그녀는 큰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애초에 홀더와 괴수부터 말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들의 존재부터 믿기지 않는 이런 세상에서…

더 특별한 룬, 더 특이한 룬 홀더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도재현이 그를 통해 더욱 강해지고, 그 덕에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게 그녀는 기뻤다.

‘다치는 건 싫으니까….’

아직도 기억난다.

도재현이 안도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줬던 날.

-이상한 생각말고. 손잡아.

너무도 고마웠고, 그 날의 그는 더없이 듬직했지만…

‘광폭화’한 안도권에게 그가 당할 뻔 했던 그 순간.

김채은은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자신 때문에 도재현이 잘못될까 봐.

자신을 지키려다 그가 다치게 될까 봐.

정선영에게 어떻게든 매달려 배우려 했던 것도, 그런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아우우….

아우, 아우우-

그 많던 늑대들이 또다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번엔 땅 계열 마력룬을 추가로 활용하긴 했지만, 역시나 방어 한 번 하지 않고 공격만으로 끝낸 압도적인 전투였다.

꽤 힘을 쓴 것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도재현.

“고생했어, 재현아!”

김채은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도재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살짝 눈을 찌푸렸다가, 점점 커지는 눈동자.

그의 눈빛은 김채은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채은아, 뒤…!!”

도재현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으르르…!!

전투가 끝난 줄만 알았는데, 수풀 속에 숨어있던 괴수가 있었다.

B급 괴수, 하이드 울프.

녀석은 늑대 계열 괴수 중 선공을 하지 않는 특이 형태의 괴수로, 암살자 계열의 공통룬인 [은신]을 보유하고 있다.

놈은 홀더와 괴수가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조용히 기다리고 기다리며, 최적의 공격 시점을 찾는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그 특성 때문에, 궁수 계열의 탐색류 룬이 없다면 쉽게 찾기 힘든 괴수였다.

‘마력 방어막을…!!’

김채은은 재빨리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하이드 울프의 달려드는 속도와 근력을 생각하면, 당장 [마력 방어막]을 만든다고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선 뭐라도 해야만 했다.

으르, 으르르-!!

지척까지 다가온 울음소리와 기세.

그리고 전혀 완성되지 않은 [마력 방어막].

놈의 매서운 발톱에 할퀴어지기 직전의 순간.

“어?”

김채은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을 느꼈다.

캉-

카강, 카가가-!!

어느새 방패를 손에 쥔 도재현이…

보법류 룬을 활용해 먼저 도착한 후.

그녀를 감싸 안고, [철벽수비]를 활용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에 맞춘 타이밍.

다행히 하이드 울프의 공격은 닿지 못했다.

또다시 도재현의 세이브였다.

‘아, 안았어…!!’

하지만 김채은은 그런 과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재현이 자신을 안았다!

머릿속엔 그 한 문장이 번뜩였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그 사실만이 뇌리에 박히고 있었다.

그동안 같이 요리할 때 어깨가 부딪힌다거나, 재료를 집을 때 손이 잠깐 닿는다거나, 음식 먹을 때 정말 정말 운 좋게 입가에 소스가 묻으면 닦아준다거나 하는 스킨쉽은 있었지만…

어깨를 끌어안아 지켜주는 스킨쉽은.

김채은의 상상 속에서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잊은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붙잡아야 했다.

“터져라!”

그런 마음을 달래주듯.

도재현의 분노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언령을 내뱉으며, 어느새 하이드 울프의 몸통에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이내 터져 나오는 응축된 마력.

[파상천검].

김채은으로서는 처음 보는, 도재현의 궁극스킬이었다.

“이 빌어먹을 늑대 새끼. 터져라, 터져.”

도재현은 김채은이 위험했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꽤 화가 났는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하이드 울프의 몸에 연신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평소 잘 안 하던 욕설까지 입에 담으며.

하지만 이미 눈이 몽롱해진 김채은에게 있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헤헤. 욕하는 것도 멋있다….’

김채은은 확신했다.

이번 설악산 필드 사냥은 분명.

자신의 생각대로, 등산 데이트가 맞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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