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 얼룩진 암석 더미 (7)
정보창들은 우선 잠시 미뤄뒀다.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많긴 했지만,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 전투를 대신해준 홀더와의 대화였다.
거대 늑대를 사냥한 후.
가만히 소검을 든 채 서 있는 여자.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
“예?”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짧게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정중한 그 한마디를 뱉으며…
그녀는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왜 그녀가 ‘잠깐 기다려달라’고 말한지 알 수 있었다.
아우우-?!
아우, 아우우-!!
[파워 브레이크]에 휩쓸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그레이 울프들.
거의 빈사 상태나 다름없지만, 그대로 놔두면 얼마든지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괴수들.
그녀는 그 잠재적인 위험을 모두 철저하게 제거했다.
거대 늑대를 10초 만에 암살할 정도로 뛰어난 홀더가, 부상 입은 괴수들을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다.
차근차근 바위산을 타며 사냥을 시작한 그녀는…
마침내 모든 괴수를 처치하고 나서야 돌아왔다.
이제는 던전에서 퇴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안전이 보장된 상태였다.
“따로 다친 데는 없나요?”
그리고 그녀가 우리의 앞에 서서 말을 걸었을 때.
백색 도복과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
온통 눈으로 덮인 듯한 차가운 분위기.
그 속에서 꽃처럼 피어난 아름다운 외모.
그녀의 외관을 직접 눈에 담았을 때.
나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은설 홀더님….”
“저를 아시는군요.”
당연한 이야기.
모를 리가 있을까.
국내 유일 S급 암살자 계열 홀더, 유은설.
그녀는 원작에서도 꽤 비중 있게 다뤄진 인물이었고, 이곳 세계에 온 후로도 워낙 유명한 탓에 기사나 신문 등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봤던 홀더다.
암살자의 정점에 다다른 여자.
클랜 없이 홀로 최고를 거머쥔 홀더.
국내에서 활동하는 홀더가 그녀를 모른다면 간첩이나 다름없었다.
“와, 와… 유은설 홀더님이다….”
내 뒤에서 감탄을 흘리고 있는 김채은.
당장 그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유은설은 그런 우리의 감탄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혹시 늑대들 공격에 당해 입은 내상이 있나요? 포션은 충분하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녀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건지.
어떻게 우리를 구해준 건지 알 순 없지만…
중요한 건 전투가 끝났고, 그 후 처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다행히 부상을 입기 전에 전투가 끝났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은설 홀더님.”
“마, 맞아요! 저도 다친 덴 없습니다아-”
내가 감사 인사로 고개를 숙이자, 김채은도 따라 숙이며 답했다.
손을 들며 그를 받아준 유은설이 말을 이었다.
“우선 최초 발견자들의 동의 없이 따라 들어와 미안해요. 우연히 보게 됐는데, 2인 파티가 던전을 공략하려는 것 같아 위험해 보여 들어왔어요.”
유은설이 가볍게 사과를 건넸다.
사실 던전의 발견과 공략은 소유권에 관련된 문제이기에, 발견에 관여하지 않은 제3자가 입장하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협회 내에서 규정까지 마련된 내용.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일 때의 이야기다.
방금처럼 위기 상황에서의 구출은 논외였다.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유은설 홀더님이 아니었으면 탈출이 어려웠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최대한 예를 갖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김채은이 눈이 동그래진다.
이렇게 격식 차리는 모습을 처음 보나?
나도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익숙하다.
인턴 클랜원 생활을 한 달 가까이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홀더로서의 예의가 꽤 몸에 배고 있었다.
유은설은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무소속 S급 홀더 유은설이라고 해요. 혹시 두 분의 소속을 물어도 될까요?”
그 질문에 김채은이 눈을 빛내며 먼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유은설 홀더님! 저는 서울 홀더 아카데미 소속 학생, C급 홀더 김채은이라고 합니다-!”
김채은은 이번 던전 공략을 오기 전.
2주간 협회 심사를 마치며 C급으로 승급했다.
그 덕에 설악산 필드의 등급 규제에 걸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답했다.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소속 학생, C급 홀더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유은설 홀더님을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미사여구 몇 개를 빼면, 달리 흠이 없는 깔끔한 소개.
“아카데미… 라고요?”
그런데 유은설의 표정이 묘했다.
미세하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그렇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카데미와 뭔가 트러블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빌런> 클랜과 문제가 있으면 있지, 아카데미완 접점이 별로 없는 그녀였다.
“아니, 아니에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유은설은, 이내 다시 우리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같이 던전을 공략해도 될까요? 같이 다니며 묻고 싶은 것들이 좀 있는데. 던전 소유에 관한 권리는 모두 포기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파격적인 제안이다.
S급 홀더, 그것도 국내 유일 암살자 계열.
그런 호칭을 가진 유은설과 함께 던전을 공략할 기회.
이건 절대 쉽게 오지 않는다.
본래라면 오늘 공략을 포기하고, 내일 다시 힘을 채워와 공략했겠지만… S급 홀더가 같이 있다면 당장 1시간 내에도 공략이 가능하다.
게다가 지금은 원작과 달리 갑작스러운 늑대 떼와 거대 늑대가 나타나, 본격적인 공략에 차질이 생긴 찰나.
이런 상황에서 파티에 참가하는 S급 홀더는, 존재 자체만으로 든든한 아군이었다.
‘소유권까지 포기하신다고 하고….’
지금의 우리는 이 던전을 공략할 힘이 없다.
우리가 이대로 던전에서 퇴장하고 유은설이 홀로 던전을 공략한다면, 아마 소유권은 그대로 유은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걸 포기하겠단다.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는 점인데…
뭐, 그게 뭐든 다 대답해줘야지.
무려 유은설이 물어보겠다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되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두 분이 허락한다면, 같이 공략하고 싶어요.”
툭툭.
뒤에서 등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김채은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기는 대찬성이라는 의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선영을 볼 때도 그렇고, 이번 유은설도 그렇고.
고위 홀더를 만나면 유독 좋아하는 김채은이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유은설에게 말했다.
“그럼 사양 않고 동행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그렇게 우리의 동행이 시작됐다.
홀더가 된 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S급 홀더와의 파티 사냥이었다.
* * *
김채은을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고.
거울로 내 얼굴을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첫인상이 실제 이미지와 다른 경우는 꽤 많은 것 같다.
김채은은 언뜻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누구보다 따뜻하고 밝은 성격을 지녔고, 나 역시 샤프한 외관과는 반대로 무던한 성격인 편이다.
다가가기 힘들 것 같다는 예상과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건 유은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말투가 딱딱하긴 했지만, 의외로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잘 답해줬다.
“아세나… 라고요?”
“네. 설악산 필드 내 던전에서 종종 출몰하는 A급 괴수예요. 늑대 계열 괴수들을 무리로 구성하는 습성을 지녔고, 그들을 이끌고 아주 가끔 사냥을 나서요. 학계에서는 이를 중간 보스 괴수라고 부르죠.”
A급 괴수 아세나.
우리가 던전 초입에서 마주했던 거대 늑대의 정체였다.
‘그게 중간 보스였구나….’
당연히 나도 중간 보스에 대해선 알고 있다.
보스룸에 도달하기 전에 마주하는, 일반 괴수들보다 강력한 괴수.
그들은 던전 내 지형지물에 숨어있을 때도 있고, 특수한 조건을 만족해야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처럼 다수의 일반 괴수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군주 형태의 괴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평범하게 던전을 공략하다가, 아세나에게 당한 홀더들이 꽤 많아요. 그래서 설악산 필드 내 던전을 공략할 땐, 반드시 A급 이상의 홀더를 리더로 둬야 해요. 언제 아세나가 늑대 무리를 이끌고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녀석은 평소 서른 마리가량의 늑대 괴수들을 이끌고 다니며, 던전 내 몇몇 지점들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드문’ 공격을, 던전 입장에서부터 당한.
지독히도 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아우우우-!!
“전투 준비할게요.”
그렇게 몇몇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늑대 계열 괴수들이 또 한 번 등장했다.
이번엔 그레이 울프와는 다른 종.
B급 괴수 블랙 울프다.
중간 보스인 아세나도 없는 탓에, 이번 무리의 수는 다섯 마리로 평범했다.
“흡…!!”
나는 방패를 들고 먼저 늑대들의 공격을 막았다.
유은설이 추가된 우리 파티의 전투 구도는 평범했다.
내가 앞선에서 탱킹을 서고, 김채은이 가볍게 제어형 마법을 사용.
그리고 유은설의 공격으로 마무리.
전형적인 딜, 탱, 보조가 잘 버무려진 파티 구성이었다.
‘그 위력은 말이 안 되지만….’
그레이 울프나 블랙 울프는 사냥이 어렵진 않다.
아까처럼 아세나가 수십 마리를 거느린 게 아니라면…
김채은과 나, 둘만으로도 충분히 사냥이 가능하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딜러인 유은설.
그녀가 전투에 참여하니, 사냥 속도에서 차원이 달랐다.
슥- 스슥- 캉!
아우우?!
아우우-!!
마치 빛처럼 쏘아지는 그녀의 움직임을 눈에 담는다.
이번엔 몇 초지?
2초? 3초?
유은설의 보법류 룬과 단검 룬 활용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바람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몸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힘들었고, 비수가 몇 개 늑대에게 꽂힌 걸 확인하면 어느새 그녀의 소검이 불을 뿜어 다른 늑대를 도륙냈다.
그녀의 주력 룬이라는 [설중매화]를 볼 틈도 없다.
방패를 들고 공격을 한 번 막아내면, 전투가 끝나 있다.
효율과 속도 측면에서 우리와 비교하는 게 민망한…
너무 압도적인 수준의 사냥 속도였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결투에서의 높은 기여도로 인해 승리가 인정됩니다. 룬 사냥꾼의 신묘한 힘으로, 상대방의 룬 하나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복제할 룬을 선택해주세요.]
[뾰족한 송곳니를 선택하셨습니다. 9레벨의 레어룬이기에 레벨이 하락해 5레벨로 등록됩니다.]
[새로운 룬을 얻었습니다.]
[룬의 성향으로 근력, 내구를 각각 1씩 획득합니다.]
사냥이 끝나고, 또 한 번 정보창이 주르륵 올라왔다.
블랙 울프에게서 선택 가능한 룬은 [뾰족한 송곳니]밖에 없었는지, 선택의 기회 없이 그대로 룬이 등록됐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잠시 미뤄뒀던 정보창들을 바라봤다.
처음 유은설을 만났을 때 올라왔던 무수한 정보창.
그녀가 A급 괴수인 아세나를 비롯해 다수의 그레이 울프를 쓸어 버리며, 놈들이 보유한 모든 룬이 [룬 사냥꾼]에 의해 등록돼 있었다.
얼핏 생각나는 것만 [질긴 늑대 가죽], [민첩성]. [먹잇감 탐색] 등… 이번에 얻은 [뾰족한 송곳니]까지 합치면 상당히 많은 수의 룬이었다.
슬슬 이 룬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유은설 홀더님. 혹시 잠깐 휴식을 취해도 될까요?”
잠시 장비를 정비하던 유은설은, 내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사실 일반 파티 사냥에 비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우리도 잠깐은 쉬어줄 필요가 있었고, 유은설도 그걸 느꼈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던전 내 구조물은 모두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땅히 쉴 만한 곳이 없는 탓에, 유은설과 김채은은 적당한 바위를 찾아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나 역시 바위에 앉은 후.
장비를 점검하는 척하며 정보창을 확인했다.
던전 입장부터 지금까지 미뤄온 정보창들이었다.
‘보자… 일단, 그레이 울프한테서 얻은 것부터…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레이 울프와 블랙 울프.
그리고 아세나에게서 획득했던 룬들.
분명 그들을 확인하고자 불러온 정보창인데…
‘뭐야, 이거.’
웬 이상한 문구의 정보창 하나가.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건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적 있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 정보창이었다.
[현재 조합 가능한 룬이 존재합니다. 룬 사냥꾼의 신묘한 힘을 이용해 상위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