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9 개강 준비 (1)
-서울 홀더 아카데미, 유은설 강사 영입 공식발표
-국내 최초 S급 강사 취임… 홀더 교육 대격변 오나
-유은설, “국내 암살자 계열, 한번 키워보고 싶었다.”
-A급 홀더 정선영, 유은설 따라 단기 강사 취임 결정!
-재단이사장 탁윤재, “아카데미는 끊임없이 변화할 것.”
갖은 종류의 와인들이 넘실거리는 방.
탁자 위 작은 태블릿에 수없이 많은 기사의 헤드라인이 문자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엔 심플한 디자인의 유리잔이.
그 아래엔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방 안엔 부드러운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음-”
차수연은 진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기사를 훑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
그 흥겨운 리듬에서, 그녀의 들뜬 기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부장님. 부르셨습니까.”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빌런> 클랜 내 아카데미 지부.
그 안 핵심 클랜원에 해당하는 지윤재였다.
차수연은 태블릿에 향해 있던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여전히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윤재 왔니?”
“예. 지부장님.”
“음음- 재밌는 일이 좀 생겨서.”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차수연의 얼굴.
그리고 태블릿에 고정된 듯한 시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윤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 명령입니까?”
“응. 그것도 꽤 재밌는.”
차수연은 태블릿 내 기사를 휙휙 넘기며 말했다.
“유은설이 아카데미 강사로 오는 건 들었니?”
“예. 오면서 기사로 읽었습니다.”
“후후, 재밌는 일이야. 무려 S급 홀더가 애들을 가르치러 온다니.”
아.
뭔가 생각났다는 듯 차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윤재, 너랑 같은 계열 아니니?”
“그렇습니다.”
유은설은 암살자 계열 S급 홀더.
당연히 맡게 될 강의도 암살자 계열일 것.
그리고 지윤재는 아카데미 1학년 중, 암살자 계열 차석에 해당하는 학생 홀더였다.
“오… 한번 들어봐. S급 홀더의 강의, 어떨지 궁금한데.”
“…혹시 그게 이번 명령입니까?”
“응? 그건 아닌데?”
한창 읽던 태블릿을 잠시 치운 후.
차수연이 유리잔의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번에 강남 애들이 워낙 삽질해서 그런가? 대형 클랜들이 전부 합심해서 우리를 찾으려 들고, 수뇌부도 그 문제로 꽤 골치 아픈 모양이야.”
지윤재는 바짝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원래 차수연은 이렇듯 세세한 클랜 상황이나 작전 내용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그가 뭘 해야 할지.
명령의 하달만 내릴 뿐.
그런데 이런 걸 설명할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는 건, 지금의 그녀가 어지간히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못 듣고 작전 수행을 어그러뜨리면, 또 처벌받는 건 자신이니까.
“음음- 그래서 우리한테 다시 기회가 왔단다. 마침 유은설이라는 대어도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이목이 모이니까 터뜨릴 수 있는 것도 많고 말이야.”
<불의 심판>을 겨냥했던 강남 지부의 대실패.
그에 따라 각 클랜의 경계가 심해지고 <빌런>을 향한 척살 의지에 또 한 번 불이 붙으면서, 클랜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싶어했다.
그 첫 방향이 아카데미 지부였다.
때마침 유은설이라는 S급 홀더도 들어오고, 한창 아카데미에 파란을 일으켰던 ‘안도권 사건’ 등도 관심도가 떨어진 상황.
이보다 적당한 때는 없었다.
차수연은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지윤재를 봤다.
“이번엔 나도 직접 현장으로 간단다.”
“…예?”
지윤재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차수연의 말에서, 그게 제대로 들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음음- 유은설을 따라 영입되는 강사 명단에 포함됐거든. 계열이 다른 건 좀 아쉽네? 전에 윤재가 말했던 도재현이라는 아이도 직접 가르쳐보고 싶은데.”
차수연이 아카데미 단기 강사로 온다.
이건 확실히 파격적인 투입이었다.
사람을 포섭하는 것과 직접 나서는 데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앞으로 클랜의 작전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지부장급 인사가 현장에 투입돼있다는 건 클랜원들의 활동 폭이 훨씬 넓어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차수연이 와인을 한 모금 더 들이키며 말했다.
“참. 마법사 계열엔 그 강우현의 딸도 있었지? 후후, 잘 됐다. 걔도 언제 한 번 망가뜨려 보고 싶었는데.”
국내 3대 클랜 <불의 심판>의 후계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망가뜨려 보고 싶다고 말하는 차수연.
그런 지부장의 나긋나긋한 광기를 보며…
지윤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빌런> 소속 클랜원으로 정상은 아닌 사람이지만, 이 여자는 정말 사이코패스였다.
상관만 아니라면.
절대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음음- 재밌겠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얼룩진 암석 더미’의 공략이 끝난 후.
며칠 뒤 기사에선 정말 ‘유은설의 아카데미 강사 취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S급 홀더인 유은설을 던전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한데…
그 던전의 공략을 끝까지 함께하고, 웬 특수 이중 던전의 파티 제안을 받고, 심지어는 그녀가 아카데미 강사로 취임까지 했다.
그 결정적인 이유에 내가 있다는 건.
더욱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원래는 계속 거절하셨었다. 긍정이나 부정을 떠나서, 아예 아카데미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지. 그런데 도재현 널 한 번 보고 나니, 곧바로 승낙하더군.
영입을 추진했다던 탁원호 교수의 말이었다.
원래는 저번 일요일에 날 소개할 계획이었다는데, 우연히 던전에서 우리가 만나게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덕분에 유은설은 아카데미 강사직을 곧장 수락했고, 그날 바로 온갖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그 사실이 알려졌다.
S급 홀더의 아카데미 강사 취임.
홀더 계에 커다란 화두로 떠오른, 놀라운 일이었다.
“수강신청 빡세겠네.”
아카데미 내 암살자 계열.
S급은커녕, A급 강사조차 없던 곳이 암살자 계열이다.
교육의 수준이 질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내가 1학기 때 들었던 강의도 딱 하나.
<투척의 이해>라는 투척술 관련 수업뿐이었다.
그런 황무지에 유은설의 강의가 개설된다니…
암살자 계열 학생들의 열띤 환호와 더불어, 역대급 경쟁률의 수강신청이 될 게 분명했다.
“…뭐가?”
내 혼잣말에 앞에 앉아있던 강주연이 물었다.
나는 순간 멍때리고 있던 것에 아차하며 사과했다.
“아, 미안. 갑자기 아카데미 생각이 나서.”
“…아카데미?”
“응. 이번에 S급 홀더인 유은설 홀더님께서 단기 강사로 오시잖아.”
“아….”
“암살자 계열에선 엄청 드문 등급의 강사님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실 수도 있으니까… 수강신청 경쟁률 치열할 것 같아서.”
유은설의 강사 계약은 어디까지나 단기 계약이다.
이번 학기는 강사로 활동하지만, 다음 학기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특급 수강의 기회.
학생들의 관심도가 몰리는 게 당연했다.
아마 수강신청 날엔 서버가 터질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치이이-
준비한 요리들이 다 익어간다.
나는 조금씩 맛을 보며 음식들의 간을 맞췄다.
“거의 다 됐다.”
우리는 셀프 요리 컨셉의 한 음식점에 와 있었다.
<불의 심판> 인턴으로 들어오며 강주연에게 도움받은 일이 워낙 많았던 탓에, 언제고 한 번 그녀에게 요리를 대접해야겠단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를 자취 집에 들이기는 걸리는 게 많았다.
사회적인 지위도 그렇고, 강우현이 이 사실을 알면 또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래서 찾은 게 셀프 요리 음식점이었다.
영등포 쪽에 자리한 특이 컨셉의 음식점인데, 채소나 나물 등의 보조 재료는 물론, 각종 조리 기구와 조미료 등 요리에 필요한 재료 대부분이 구비되어 있었다.
“…지금 만드는 건 뭐야?”
“이건 갈비찜. 여기 이건 잡채. 아, 이건 표고버섯인데… 혹시 저번에 같이 갔던 한식집 기억나?”
“응.”
“그때 거기서 먹었던 표고버섯 참조해서 만들어봤어. 맛 한 번 비교해봐.”
<불의 심판>에 들어오고 나서 강주연과 식사를 했던 적은 많지만, 내가 직접 요리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구내식당에서 고기 한번 구워준 정도?
그래서 이번엔 날 잡고 제대로 식사를 대접했다.
메뉴는 한식.
저번에 갔던 한식집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나만의 코스 요리다.
냠-
강주연이 젓가락을 들어 표고버섯을 먼저 먹어봤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오물오물 버섯을 씹는 그녀.
내 [요리]의 수준이 이제는 어지간한 요리사들을 제칠 정도로 뛰어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긴장하며 물었다.
“어때?”
“…맛있어.”
다행히 결과는 베스트였다.
강주연에게서 고개를 끄덕이는 리액션이 아닌, 직접 ‘맛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정말 맛있는 거다.
나는 한 시름 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간 식당보다?”
“응. 더 부드러워.”
추가 설명까지 들어가는 극찬을 받고서야, 맘 편히 요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요리 대부분이 완성되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이어지는 이런저런 평범한 이야기.
대화 양상은 언제나 비슷하다.
내가 질문하고, 강주연이 대답하고.
강주연이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내가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걸 선호해서이기도 했다.
물론, 클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강주연이 대화를 주도할 때도 있다.
“이제 개강 2주밖에 안 남았네.”
“…그러게.”
이번 대화 주제는, 아까 유은설 얘기의 연장선인 ‘개강’이었다.
길었던 방학이 끝나고, 개강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뜻 깊었던 <불의 심판> 인턴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개강과 그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강주연에게 물었다.
“써클은 어디 들어갈 거야?”
써클.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동아리’와 비슷한 개념으로, 일반 취미, 룬, 계열 등 범위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관심사를 주제로 만들어진 아카데미 내 소모임.
1학년은 2학기가 되고 나서 들어갈 수 있고, 졸업 학기인 3학년까지 활동할 수 있다.
여느 학교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모임이고, 소설 같은 곳에서도 평범하게 등장하는 클리셰.
하지만 강주연에게 있어 써클은 꽤 중요했다.
그녀가 2학기 때 들어가게 될 써클, <염무>.
정확히는 그 써클의 회장인 3학년, 윤지아.
완숙한 불속성 B급 홀더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강주연은 차차 A급 홀더로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자 벽.
강주연에게 <염무> 써클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극 중반부 강주연이 성장하게 되는 커다란 계기였다.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염무>에 들어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요즘 들어, 원작과 다르게 전개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넌 어디 들어갈 건데?”
예상대로 다시 전개가 엇나갔다.
젠장.
또다, 또.
내가 들어갈 써클은 대체 왜 궁금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