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2 나도 그 강의 듣는데 (1)
방학 마지막 주 주말이 지난 후.
드디어 2학기가 시작됐다.
나는 오늘 들을 수업 이론서들을 챙겨, 산뜻한 기분으로 아카데미에 나왔다.
개강 첫날 월요일.
아카데미는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로 붐볐다.
“미감정 아이템 감정해드려요! 가격은 문의 주세요.”
“안녕하세요, 다도 써클 ‘말차잎’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설문조사 한번 하시고, 상품권 받아가세요…!!”
“유은설 홀더님 강의 여석 파실 분!! 장난치면 신고합니다.”
아카데미의 중앙로는 언제나 북적이는 것 같다.
학생들이 마치 무슨 상인이라도 된 것처럼 광장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지나갈 때마다 이렇듯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이번엔 유은설의 강의 여석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
티켓 암표도 아니고, 강의 여석을 사고팔다니.
정말 들어본 적도 없는 거래 종류다.
S급 홀더가 아카데미의 강사로 오니, 별의별 일들을 다 겪어보는 것 같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은설은 뜨거운 감자였다.
나는 북적이는 중앙로를 지나, 특수 계열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침에 있을 내 첫 과목.
<부산물 채취>의 강의 장소가 이곳 특수 계열 건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또 장비 받을 때가 됐네.”
특수 계열 건물을 보니 문득 최유민이 생각났다.
월마다 장비를 제공받는 그녀와의 계약.
7월 장비는 받았었는데, 8월 장비는 아직 안 받은 상황이다.
7월 보급은 개인적으로 대만족이었다.
[그을린 도마뱀 가죽 갑옷].
최유민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초의 레어급 장비가, 내 유일한 방어구 아이템으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레어급을 받은 건 최유민이 감사함을 표하려고 했던 것이기에, 8월에도 그 정도 아이템을 받을 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벌써 레어급 아이템을 제작하며 [철혈의 야장]을 수준급으로 키워낸 그녀가, 지금은 어느 수준까지 제작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었다.
“설마 에픽 만들 줄 아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픽급을 만들 줄 아는 대장장이는, 흔히들 ‘장인’ 혹은 ‘명인’이라고 불린다.
학생 수준을 넘어선, 프로 레벨의 홀더들인 것이다.
아무리 최유민이 재능러라고 해도, 벌써 에픽급을 만드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작중 대장장이 계열 주요 인물이었던 이현호 또한, 지금은 레어급 제작에만 머물러 있는 유망주 홀더였으니…
에픽급 제작이 얼마나 어려운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기.”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특수 계열 건물 계단을 오르던 중.
뒤쪽에서 누군가 날 부르는 게 들렸다.
처음엔 날 부르는지 모르고 무시했지만, 어깨까지 두드리니 안 돌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뒤쪽엔…
웬 잘 생긴 얼굴의 남자가 날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제비같이 생긴 놈은.
나도 편견 없이 보고 싶긴 한데, 일단 겉모습부터 같은 남자들의 거부감을 살 법한 외모다.
“혹시 특수 계열 B관 건물이 여기 맞을까?”
“…누구세요?”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그러자 제비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미안. 도재현 맞지? 암살자 계열의.”
“날 알아?”
“당연하지. 요즘 1학년에서 유명인사 중 하나잖아. 하급반에서 상급반까지 올라간 초고속 승급 학생! 학기 말 평가 때 안도권을 막은 영웅!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아….”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내 평가가 그렇구나.
하긴 홀더 계에서야 큰 주목을 못 받고 있지만, 아카데미에선 시끄러울 법한 일을 여럿 했다.
입학시험 때부터 박진우와 함께 ‘두 명뿐인 반 승급’을 이뤄냈고, 얼마 안 있어 아카데미 내부에 출현한 괴수에 맞서 싸웠었다.
이후 중급반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보이며 또다시 상급반으로 점프할 자질을 보였고, 학기 말 평가에서 이를 증명했다.
마찬가지로 학기 말 평가 때 안도권의 폭주를 막아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전속 제자.’
공식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내가 탁원호 교수와 김명현 교수의 전속 제자라는 사실은 학생들 사이에 소문으로 알음알음 퍼져갔을 것이다.
아카데미에 몇 안 되는 실력자로 유명한 두 교수.
그들의 전속 제자라는 사실.
그것만으로 이미 나는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누구?”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제비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미안미안.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 난 1학년 전사 계열의 김도윤이라고 해.”
“김…도윤?”
“응. 아,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은 수업 들을 수도 있겠다. 나도 너랑 같은 상급반이거든.”
그 이상의 말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동기였구나-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대답하려다가…
‘김도윤’이라는 이름.
그를 듣자 순간 멈칫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1학년 전사 계열, 김도윤.
그리고 여자들 꽤 울려봤을 법한 제비 같은 외모.
그 익숙한 이름과 특징이 뇌리에 박히며.
머릿속에 숨어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빌런이다.’
<빌런> 내 아카데미 지부 소속, 클랜원 김도윤.
그는 전사 계열 신입생으로 잠입한 스파이였다.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이 새끼를 벌써 마주치다니.’
지윤재나 안도권이 각 계열에서 차석으로 주목받는 신입생인 것과 달리, 김도윤은 순위권에 벗어나 평범하게 활동하는 스파이다.
그래서 초반부엔 잠잠하게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중반부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아까도 말했듯 잘 생긴 얼굴.
나름 반반하게 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편이고, 김도윤 역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장점을.
자신의 범행 유인 요소로 사용한다.
김도윤은 자신에게 호감을 지닌 여자들에게 적당히 맞춰주다가, 흥미가 떨어질 때 살해해버리는 사이코패스였다.
녀석의 피해자는 오직 여자.
그 종류엔 일반인과 홀더를 가리지 않는다.
그의 꼬임에 넘어간 모든 여성이 납치, 감금, 폭행 등의 범죄 피해를 받았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땐 결국 잔인하게 죽어갔다.
그런 최악의 범죄자가 이면을 감춘 채.
사람 좋은 미소로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갑자기 말을 하다 멈춘 내 모습에 김도윤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여기가 특수 계열 B관 건물이야.”
“역시 그렇지? 특수 계열 쪽은 처음 와보는데, 봐도 봐도 헷갈려서. 하하.”
“병신. 건물 표지판에 뻔히 적혀있는데 그걸 못 보네.”
“…뭐?”
김도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갑작스러운 내 욕설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에 나는 주머니의 핸드폰을 살짝 들며 말했다.
“아, 미안. 친구한테 문자가 와서. 머리에 훈련 밖에 안 들은 바보가 한 명 있거든. 얘가 맨날 건물 헷갈려서 나한테 물어봐. 한글 못 읽는 괴수도 아니고, 왜 헷갈리는 걸까. 하하.”
“…….”
갑자기 똥 씹은 표정이 된 김도윤.
그를 무시하며, 나는 차분히 생각했다.
<빌런> 내 아카데미 지부원들은 아무렇게나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우습게 죽이곤 하는 사이코들의 집단이지만, 놈들에겐 명확한 상하관계가 있고 특히 아카데미 지부 쪽은 철저히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당연히 김도윤이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도 단순히 ‘그냥’이 아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게 확실했다.
애초에 여자만 골라 죽이고 다니는 미친놈이, 남자한테 친근하게 굴 이유가 없었으니.
‘안도권을 막은 이후로 경계 받는 건가?’
<빌런>의 스파이들이 날 경계한다.
그 이유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안도권 사건.
당시의 나는 [선전포고] 스킬로 안도권의 살인을 막았었고, 이후 대련에 난입하며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마 ‘광폭화 포션’이 아니었다면, 안도권은 그대로 내게 제압됐을 것이다.
<빌런>에서 전혀 눈여겨보고 있지 않던, 갑작스러운 방해물의 등장.
뜬금없이 나타나 자신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내가, 스파이들에게 경계 받는 건 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난 302호 강의실로 가는데, 넌 어디로 가?”
정신을 차린 듯한 김도윤이 다시 말을 건넸다.
302호 강의실.
<부산물 채취>를 수강하는 강의실이다.
즉, 나와 김도윤의 이번 교시 강의가 겹친다는 뜻.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골치 아프네.’
원래 김도윤이 2학기에 <부산물 채취>를 들었었나?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김도윤은 중반부쯤에야 드러나는 인물이니.
“나도 302호로 가. 부산물 채취 듣거든.”
“오! 잘 됐다. 나도 그 강의 듣는데. 같이 듣겠네.”
“좆같네, 진짜.”
“…….”
김도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되물을 여유도 없이, 이번엔 자신에게 욕을 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뻔뻔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아, 진짜 미안. 친구 새끼가 자꾸 귀찮게 해서. 이 새끼는 개강 첫날부터 왜 이렇게 말을 걸어대는 거야.”
김도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날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이 새끼 진짜 빡쳤나 본데?
눈빛이 꽤 살벌하다.
감춘다고 감췄지만, [냉철한 집중력] 덕분인지 미세한 살의가 느껴졌다.
나는 그 불길에 가볍게 기름을 얹어줬다.
“하여간 제비같이 생긴 놈들은 말이 많다니까.”
“…….”
“가자, 도윤. 같이 들을 사람 생겨서 다행이네. 특수 계열 건물은 내가 잘 아니까 따라오면 돼.”
김도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발걸음을 옮겼다.
멕이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정확하다.
문자 온 걸 핑계로 멕이는 것 맞다.
솔직히 너무 생각나는 대로 내뱉긴 했는데…
뭐, 어차피 녀석이 나와 관련된 지령을 받은 이상, 내게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거다.
놈도 어차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클랜원이니까.
그리고 내가 스파이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가면 쓰고 호의적으로 대할 필요도 없었다.
혹여나 이런 사소한 행동에 빡 돌아서 달려들어 주면.
나야 땡큐였다.
“뭐야, 안 와?”
몇 걸음 걷다가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김도윤이 서둘러 기세를 감춘 후.
억지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가야지.”
아무래도 날 지독하게 노려보고 있었나 보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말했다.
“빨리 와. 강의 늦겠다.”
그렇게 등을 돌리자, 다시 뒤쪽에선 시선이 느껴졌다.
또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나 보네.
하루종일 노려봐라.
뭐가 나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