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3 나도 그 강의 듣는데 (2)
302호 강의실.
김광부 교수의 <부산물 채취>가 진행되는 장소.
여기엔 의외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문가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푸른 머릿결.
단번에 시선을 집중시킬 뚜렷한 이목구비.
문가은이 강의실 한편에 앉아 수업을 준비 중이었다.
“어, 도재현… 안녕.”
문가은은 책을 펼치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저번 부탁 때 이후로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오기 전부터 김도윤을 마주친 탓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아는 얼굴을 마주하니 또 금세 기분이 풀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잰걸음으로 그녀의 옆에 가 앉았다.
“너 부산물 채취 들었었어? 전혀 몰랐네.”
문가은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치, 안 물어봤으니까 모르지. 전공은 그렇다치고, 어떻게 공통 뭐 듣는지 하나를 안 알려줘?”
“아… 내가 원래 강의 들을 때 약간 그래.”
나 역시 친구들과 같이 강의 듣는 걸 선호하긴 하지만, 수강신청을 할 때는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학기 도중에 내가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일주일간 강의 6개를 듣는 데다가, 김명현 교수와 탁원호 교수의 전속 강의까지 추가로 들은 후…
그렇게 배운 내용을 체화할 개인 훈련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일주일 대부분이 날아가는데, 내겐 관리해야 할 던전들도 있다.
지하 던전, 홉고블린 부락, 얼룩진 암석 더미.
모두 소유한 건 아니지만, 거의 혼자서 관리 중인 던전들.
수익 창출을 위해선 꾸준히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
그래서 수강신청할 땐 어지간하면 내 스케쥴에만 신경을 쓴다.
필요 강의와 들을 시간대 및 담당 교수 등이 모두 내 초점에만 맞춰져 있고, 때문에 친구들과도 시간표를 거의 맞추지 못하곤 했다.
문가은뿐만 아니라, 김채은이나 강주연, 박진우와도 맞춰 본 강의가 없었다.
“뭐 듣는지도 안 알려줄 정도로 바쁘다 이거지?”
내가 숨 가쁘게 달려가는 중이라는 건, 하급반에서 상급반으로 한 학기 만에 승급한 결과가 말해줬다.
문가은 역시 그걸 알면서 괜히 틱틱댔다.
“에이. 알 거 다 알 만한 사람이 또 왜 이러실까.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당연히 알 줄 알았지.”
“뭐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어? 말해도 돼?”
나는 순간 고개를 돌리며 강의실 안을 살폈다.
“대외적으로 우리 사귀…”
“이잇…!! 조, 조용히 해…!”
내 대답이 완성되기도 전에…
문가은이 순간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곤 귓속말로 속삭이듯 날 다그쳤다.
“너 진짜 미쳤어? 그거 아카데미에선 죽어도 비밀이야, 죽어도…!!”
“푸흐흐. 그만큼 우리가 가깝다 이 말이지. 너도 나 바쁜 거 잘 알잖아.”
“으으…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꾹 참았다.
예전엔 몰랐는데, 친해지고 난 후의 문가은은 왠지 모르게 놀리는 맛이 있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깜짝 놀라는 반응이 나온다.
가짜 남자친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부터는 더욱 그랬다.
“…둘이 꽤 친한가 봐?”
그렇게 문가은과 장난을 칠 때쯤.
옆쪽에서 웬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순간, 기분이 팍 다운됐다.
아, 맞다.
이 새끼도 있었지.
“누구?”
김도윤의 뜬금없는 난입.
그에 문가은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김도윤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넸다.
“안녕. 전사 계열 1학년 김도윤이라고 해. 로열 클랜의 문가은 맞지? 우리 같은 상급반인데 이제야 보네. 만나서 반가워.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예쁘구나. 깜짝 놀랐어.”
제비 새끼, 멘트 봐라.
현실에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철판이 두꺼운 거야, 아님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야?
하지만 문가은은 김도윤의 악수를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멀뚱멀뚱 그가 건넨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시 날 보며 물었다.
“누구?”
“…아.”
나도 모르게 순간 감탄하고 말았다.
무시.
그건 완벽한 무시였다.
그녀는 김도윤의 말엔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내게만 시선을 꽂았다.
애초에 날 향한 질문이었다는 뜻이다.
보통의 여자들은 김도윤이 말을 걸면 호감을 보이거나 관심부터 가지는데, 문가은에겐 전혀 해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철벽을 치며, 그녀답지 않게 차가운 모습을 보였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러는 애가 아닌데…
김도윤이 끼어든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
그리고 허공에 손을 건넨 김도윤은…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건물 복도에서 나한테 당한 이후.
또 한 번의 대굴욕이었다.
“푸, 흡….”
그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 속.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 * *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시간은 금세 지나 어느새 9시.
담당 교수가 들어오며 개강 첫날의 첫 교시를 알렸다.
특수 계열의 김광부 교수는 윗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의 교수였다.
오랫동안 지금의 수업을 가르쳐온 듯, 군데군데가 낡아서 헤져 있는 이론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어쩐지 이름과 외관이 적절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반갑습니다. 김광부입니다.”
김광부 교수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차분하게 강의실 안을 둘러봤다.
그리곤 곧바로 책을 펼치며 강의를 시작했다.
‘바로 수업이야?’
불길한 예상은 어쩜 이리 빗나가질 않을까.
김광부 교수는 잡담 없이 곧장 수업을 진행했다.
그 흔한 오리엔테이션도 하지 않았고, 출석체크도 없었다.
그는 마이크를 들며 학생들에게 이론서 첫 페이지를 펼 것을 알렸다.
김광부 교수는 개강 첫날부터 마지막까지, 강의 시간을 수업으로 꽉꽉 채우는 유형의 교수였다.
“우리 수업 잘못 고른 거 아니야?”
옆에 있던 문가은이 조용히 물어왔다.
“…기다려 봐. 강의 평가 괜찮았단 말이야.”
<부산물 채취>를 가르치는 특수 계열 교수는 총 두 명.
그중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김광부 교수였다.
월요일 강의에 1교시 수업이라는 단점.
그를 감수하고서 신청한 이유였다.
그리고…
김광부 교수는 금세 그를 증명해냈다.
“ … …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모든 홀더에겐 도축에 대한 재능이 있을지 모른다. 이게 현 주류 학계의 주장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력제어 룬처럼, 도축 룬 역시 후천적 획득이 가능한 일종의 파생룬이라는 거죠.”
…
…
“ … … 앞서 말했듯 도축은 끈기와 인내심, 반복과 학습의 싸움입니다. 전투계열 홀더 대부분이 이를 귀찮게 여기고 경시했기에 그동안 도축 룬을 얻어낸 홀더들이 적었다… 이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겁니다. 물론, 각성 때부터 도축 룬을 보유한 전문 도축 홀더들은 논외의 이야기지만요. … … ”
강의가 시작되고 한숨을 푹푹 쉬던 학생들의 눈빛은, 10분 만에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재밌다.
김광부 교수의 수업은 재밌었다.
오랜 시간 동안 단단하게 잡혀 온 그의 이론은 충분히 필기할 가치가 있었고, 중저음의 목소리는 의외로 높낮이가 다채로워 다소 딱딱할 법한 강의 내용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중년 교수가 무선 프리젠터를….’
강의 방식도 완전 신세대다.
김광부 교수는 커다란 빔프로젝터를 활용해 학생들에게 PPT 자료를 제공했고, 무선 프리젠터까지 사용하며 웬만한 회사원 뺨치는 발표를 보여줬다.
그렇다, 발표.
강의가 아니라 발표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뛰어난 흡입력을 자랑했다.
“ … … 그런 점에서 본 강의는 아카데미와 협력하에 실습 위주로 수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이론 수업을 제외한 앞으로의 실습 강의는 학생 세 명이 하나의 조를 이뤄 진행됩니다.”
정신없이 수업을 듣다 보니, 어느새 강의 시간이 50분을 향해 가며 막을 내려갔다.
그리고 수업을 마무리 지으며…
김광부 교수는 조별과제의 시작을 알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강의계획서에도 서술되었던 부분이기도 하고, 어쨌든 <부산물 채취>를 배운다는 건 강의의 실습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조 구성 방식은 예상 외였다.
“조 구성은 계열을 고려해 본 교수가 임의로 지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수강 변경 등의 이유로 조에 결원이 생길 경우, 이후 추가 공지를 하겠습니다.”
당연히 랜덤 구성이거나 신청 구성일 줄 알았는데, 임의 지정이라니.
평범한 조 구성이 되면 좋겠지만…
어쩐지 느낌이 싸하다.
“그럼 조 구성 호명하면서 오늘 수업은 끝마치겠습니다. 자신의 조를 확인한 수강생은 강의실을 나가도 좋습니다. 먼저 1조. 전사 계열 2학년 한동희, 궁수 계열 1학년 정석원, … …”
드륵-
드르륵-
김광부 교수가 계속해서 새로운 조를 호명하고, 확인한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의실을 나섰다.
강의실 안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나가며…
우리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때쯤.
김광부 교수는 마지막 조를 호명했다.
내가 포함된 조다.
“마지막 32조. 전사 계열 1학년 김도윤, 암살자 계열 1학년 도재현, 궁수 계열 1학년 문가은. 이상, 조 호명 마무리와 더불어 오늘 수업을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광부 교수는 강의실을 나섰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역시 싸했던 느낌대로라고 해야 할까.
수강생 중 가장 친한 문가은과 같은 조가 된 건 좋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한 조가 됐다.
<빌런> 측 스파이, 김도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였다.
“우리 다 같은 조네. 다들 잘해보자.”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
김도윤이 다시 가면을 쓴 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문가은은 잠시 핸드폰을 보며 대답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 말을 가볍게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빌런과의 전면전… 생각보다 빨라질 수도 있겠네.’
김도윤의 <부산물 채취> 수강은 많은 걸 시사한다.
단순히 강의가 겹친 걸 수도 있지만, 조 지정에서까지 같은 조가 됐다는 건 그저 우연으로 보긴 힘들었다.
<빌런>의 입김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그동안 막연하게 맞붙을지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듯 코앞까지 녀석들이 경계를 시작한 이상.
나도 슬슬 나름의 대비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