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104화 (104/353)

EP.104 나도 그 강의 듣는데 (3)

문가은은 오늘 하루.

유독 머릿속이 상쾌한 걸 느꼈다.

아카데미의 새 학기.

그 개강의 첫날부터 듣는 1교시 수업.

아침 일찍부터 강의실로 향해야 하는 것에 귀찮았던 그녀지만, 막상 수업을 다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같이 들어서 그런가?’

공통과목인 <부산물 채취>.

클랜의 중추를 맡게 될 홀더로서 기초적인 괴수 처리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신청했던 강의인데, 의외로 그곳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도재현.

폭풍 같은 성장세로 어느새 상급반까지 승급한 학생 홀더이자, 요즘 1학년에서 가장 핫한 다재능 멀티 홀더.

지하 던전 공략으로 친분이 생겼고, 문가은에게 있어선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가장 친해진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부산물 채취> 강의를 들었다.

꼼짝없이 자신 혼자 들을 줄만 알았던 강의였는데…

그와 함께 듣는 것은 물론, 학기 중 실습을 진행할 상시 조 구성에도 그와 자신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다행이다.’

반가우면서 다행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워낙 허물없이 쉽게 친해지는 문가은이지만, 그녀 역시 친한 사람과 지내는게 아무래도 더 좋았다.

성격이 무던하다고 해서 새로운 만남이 항상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게다가 오늘 강의에서 봤던 제비 같은 남자.

새로 만나는 사람이 그런 남자일 땐…

피곤을 넘어 짜증도 난다.

잘 대화 중이던 사람들의 말을 끊고, 느끼한 멘트를 날리며 자신의 할 말만 하는 사람.

문가은은 그런 부류의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사를 받지 않고 무시로 일관했다.

이유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와 같은 조가 된 게 조금 스트레스이긴 했지만, 어쨌든 친한 도재현과 같은 조가 됐다는 게 더 중요했다.

-어? 말해도 돼? 대외적으로 우리 사귀…

‘미쳤어, 도재현 진짜. 어떻게 그걸 말할 생각을….’

문득 아까 도재현의 말이 생각나자.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 그의 입을 틀어 막았었다.

문가은은 한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방학 도중 그에게 했던…

가짜 남자친구가 되어 아빠를 속여달라는 부탁.

절대 무리라고만 생각했던 부탁을 도재현은 흔쾌히 들어줬고, 덕분에 문가은은 아빠에게 대책없이 내뱉은 그 거짓말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도재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아마 아직도 지긋지긋한 소개팅을 주선 받았을 거다.

게다가 도재현은 단둘이 술을 먹겠다는 아빠의 말도 안 되는 제안마저 받아들이며, 맡은 부탁을 확실하게 처리해줬다.

그 다음날 아빠는 “참 생각이 깊고 따뜻한 청년이더구나. 역시 우리 딸이 안목이 좋아.”라며 극찬했었다.

대체 그날 무슨 대화가 오간 걸까.

몇 번을 물어봐도 도재현은 알려주지 않았다.

‘꼭 보답해야지.’

그 일이 있고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특별한 사례조차 못 해줬다.

망설임 없이 부탁을 들어준 호의.

최선을 다해 계획을 지키려던 노력.

난데없이 손을 잡을 땐 너무 떨리긴 했지만…

어쨌든 완벽에 가까웠던 도움.

그에 보답하고 싶었다.

받은 만큼 자신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번 달이 가기 전엔, 꼭 만족할 만한 사례를 해야겠다.

문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도중.

옆자리에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다음 수업인 2교시.

<마력제어의 응용>을 같이 듣는 단짝 친구, 강주연이었다.

문가은은 순간 당황해 더듬대며 말했다.

“어? 뭐, 뭐가.”

“아까부터 계속 웃던데.”

“그, 그랬나? 아, 하하. 주연이 너랑 수업 같이 들으니까 신나서 그렇지. 이번 학기 딱 하나만 겹치는 과목이잖아. 아하하.”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강주연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문가은은 웃음으로 무마하며 위기를 넘겼다.

‘주연이가 알면 안 돼.’

문가은은 속으로 결심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강주연은 도재현을 좋아한다.

강주연 자신은 이를 격렬히 부인하며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해도, 10년 넘게 그녀를 봐 온 문가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새부턴가 강주연과 만나 이야기할 때면, 도재현에 관한 주제가 많아졌다.

밥을 먹을 때도, 커피를 마실 때도.

강주연은 꼭 한 번씩 도재현 이야기를 했고, 이는 그가 <불의 심판> 인턴이 된 후로 더 심해졌다.

강주연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남자.

강주연이 넘치게 호의를 베푸는 남자.

문가은이 친구로 지내온 긴 세월 동안, 단언컨대 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능력 있는 홀더라서 잘 대해준다…’와 같은 이유로 떠넘겨질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분명 강주연은 도재현을 좋아한다.

문가은은 이를 확신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재현이 자신의 가짜 남자친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강주연이 알게 된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 너희도 이 수업 듣는구나.”

강의가 시작되기 5분 전.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머리를 한쪽으로 땋은 스타일과 아름다운 외모.

아카데미 지하 던전 공략 때 인연이 닿았던 동기.

마법사 계열 1학년의 김채은이었다.

문가은이 그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채은이 너도 이 수업 들어?”

워낙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밝은 성격의 문가은.

그리고 한 번 친해지면 마음을 잘 여는 김채은.

지하 던전 공략으로 알게 된 후, 의외로 합이 잘 맞은 두 사람은 꽤 가까워진 사이였다.

덕분에 서로 인사하는 것도, 대화도 자연스러웠다.

“응. 정선영 교수님이 내 스승님이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공통과목 <마력제어의 응용> 수업의 담당교수는 정선영.

이번 학기에 새로 교수로 부임한 마법사 계열 A급 홀더이자, 김채은의 전속 스승이었다.

그녀는 얼음 속성을 다루는 희귀한 마법사 계열이지만, 마력에 대한 이해도와 응용력이 워낙 뛰어나고 정석적이기에 학술적인 인지도가 상당히 높았다.

당연히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을 수밖에.

덕분에 강주연과 문가은, 그리고 김채은까지 세 명의 ‘지하 던전 파티원’들이 모두 모이는 진풍경이 연출될 수 있었다.

도재현도 이 과목을 신청했지만, 시간대가 달랐다.

“주연이도… 안녕.”

김채은이 문가은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 옆의 강주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

강주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모두와 두루두루 친한 문가은과는 달리.

김채은과 강주연은 서로 그렇게 친하진 않았다.

김채은의 성격 덕에 이름을 부를 땐 친근하게 부르지만…

반대로 말하면, 호칭을 뺀 나머지는 다 어색하다는 뜻이었다.

냉랭한 분위기가 주변에 흐른다.

왠지 모르게 조용해진 듯한 공간.

그 틈에서, 김채은이 책을 펼치며 말문을 열었다.

“나 완전 부자 된 것 같아.”

“부자? 웬 부자.”

뜬금없는 그 말에 문가은이 되물었다.

대형 클랜 관계자 두 명 앞에서 웬 부자?

그러자 김채은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방학 때 재현이랑 단둘이 필드 사냥 갔는데, 우연히 미발견 던전 하나 찾았었거든. 그때 공략한 보상이랑 던전 소유권 같은 거 다 따지면… 돈이 엄청 되겠더라구. 대충 계산해도 100억은 넘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완전 부자 된 기분이야. 헤헤.”

탁-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서 무서울 정도의 큰 소리로, 거칠게 책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강주연이 낸 소리였다.

보상이니, 부자가 됐니 하는 이야기들은 중요치 않았다.

그 전, 처음의 문장이 중요했다.

재현이랑, 단둘이, 필드 사냥.

도무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그 단어들이, 허공에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무거운 분노가 강주연의 자리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문가은은 순간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지만, 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송별회.”

“어, 어? 뭐라고, 주연아?”

“도재현이 송별회에서 레어급 목걸이 선물해줬어.”

“모, 목걸이?”

“…응. 인턴 하면서 도와준 것들 고맙다면서.”

어라.

그건 나도 좀 부러운데…?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 문가은은, 순간 고개를 휘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강주연의 예상치못한 반격에 주변이 또 싸해졌다.

자신의 오른쪽 자리.

김채은이 앉은 곳에선 또다시, 아까 강주연이 보였던 만큼의 분노를 삭히고 있었다.

얘는 심지어 얼음 계열이라 분위기가 더 차갑다.

책상과 의자가 모조리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문가은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얘들아, 곧 있으면 수업 시작이야….”

그러니까 좀 가라앉혀….

최대한 둘을 진정시키기 위해 꺼낸 말.

하지만 이미 서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하던 두 사람은, 분위기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단둘이 필드 사냥.

선물로 목걸이 아이템.

서로가 던진 화두가 자꾸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미 감정이 완숙의 단계에 이르러 그런 걸까.

불과 얼음.

속성 계열부터 상극인 두 사람은, 신경전마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낀 문가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절대 들키면 안 돼.’

두 사람의 핵심 주제인 도재현이.

자신의 가짜 남자친구 역할을 해줬다는 것.

어쩌면 거짓말이 또 필요해지면서…

그게 현재 진행형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이 사실만큼은 절대.

절대 두 사람에게 들켜선 안 된다고.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