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7 변화와 대비 (3)
“흐음….”
김명현 교수가 신중한 얼굴로 서류를 훑었다.
이는 일전에 내가 미리 그에게 제출했던 서류.
<신규 써클 창설 계획서>였다.
“꽤… 구체적이긴 하군요.”
아카데미에서 써클은 대학이나 고등학교의 동아리와 같은 가벼운 분위기를 지향하지만, 분위기가 가볍다고 해서 창설도 자유로운 건 아니다.
써클은 엄연히 아카데미 내에서 인정한 ‘공식 단체’다.
내부적으로 써클과 관련된 행사도 꽤 많고, 연말에 진행되는 아카데미 내 축제나 ‘배틀 토너먼트’ 등의 대형 행사에도 이름 있는 써클들은 꼭 참석한다.
‘지원금까지 받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써클엔 반드시 담당 교수가 필요하다.
담당 교수는 대외적으로 해당 써클을 관리하는 상급자의 직위를 지니고 있고, 써클 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나 특정 계획들은 담당 교수의 인가가 나야만 진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김명현 교수를 찾아온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써클의 창설.
이는 담당 교수가 없다면 애초에 논의 자체가 불가하다.
나는 김명현 교수에게 새로 만들 써클의 담당 교수로 부탁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었따.
그리고 많고 많은 교수 중, 굳이 김명현 교수를 이 신규 써클의 담당 교수로 고른 이유는…
“본격적으로 학생들이 직접 빌런을 추적하고 잡아내기까지 하는 써클을 만들겠다…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번에 만들려는 써클, <안티 빌런>.
이 위험한 써클에 대해 납득할 만한 교수가, 김명현 교수 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도권 사건으로 <빌런>에 적개심이 커진 김명현 교수.
그라면 이 써클의 창설에 긍정적일 게 분명했다.
“반대로 너무 위험한 일이기도 하죠.”
하지만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
김명현 교수는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원론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사실 그의 말이 정론이었다.
애초에 홀더 계 전체에서 둘러 봐도, 쉽게 때려잡지 못하는 게 <빌런>이다.
그 지독하고 강력한 클랜에…
학생들이 나서서 맞선다?
솔직히 수긍할 사람이 거의 없을 제안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차분히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이미 아카데미 내부엔 빌런 쪽 스파이들이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내 직원이나 경비… 어쩌면 교수님들이나 운영진 쪽에도 영향력이 미치고 있을지 모르죠.”
아카데미에 <빌런>의 스파이들이 있다!
운영진과 교수들에겐 상당히 민감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하지만 공론화만 안될 뿐,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당장 1학기에만 <빌런>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혹은 확정적인 사건이 두 개나 있었으니까.
아마 아카데미 수뇌부도 은연중엔 이를 인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안티 빌런>의 창설을 위해선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였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들의 행보가 점점 대범해지고 있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참관하는 학기 말 평가에서 스파이 한 명이 버젓이, 그것도 광폭화 포션까지 써가며 동기 한 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점. 이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또한 넘어가서도 안 될 문제입니다.”
움찔-
내가 꺼낸 화두에 김명현 교수가 몸을 들썩였다.
저번 학기 말 평가, 김채은이 죽을 뻔했던 사건.
다행히 김채은이 큰 부상을 입지 않고 사건이 마무리된 후로, 가급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하지만…
자칫 그녀가 잘못됐을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여전히 김명현 교수의 트리거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시엔 피해자가 없었지만, 이후에 또 어떤 사건이 발생해 어떤 피해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
“게다가 저번 학기 초엔 괴수 출현으로 이미 많은 학생이 죽기도 했구요.”
“도재현 홀더는 괴수 출현이 빌런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결계가 깨진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확고한 대답에 김명현 교수가 침음성을 흘렸다.
‘안도권 사건’이 일어났던 이후.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딸을 잃을 뻔했던 충격적인 사건이고, 그 증오감만큼이나 김명현 교수도 확실한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겠지.
‘…혼자선 쉽지 않아.’
하지만 그에겐 나름의 한계가 있다.
아카데미 교수직을 맡고 있어 직접 몸을 움직여 활동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고, 또한 혼자서 상대하기에 <빌런>이라는 클랜은 너무도 거대한 범죄조직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집단엔 집단으로 맞서야 한다.
그 집단이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는 작은 단체?
신뢰성이 떨어질 법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괜찮은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아카데미의 보호를 받으니까.’
수없이 많은 욕을 먹어도, 어쨌든 아카데미는 아카데미다.
검술 명가의 양대산맥인 탁씨 가문이 운영을 맡고 있고, 사회 전반에 자리한 각종 클랜과 내외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한다.
<빌런>에서도 아카데미 내에서 개개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특정 사건을 만들어낼 순 있어도, 정식으로 아카데미에 인가를 받고 설립된 써클을 함부로 공격하진 못했다.
그게 됐다면 <빌런>이 안도권 사건 이후.
이렇듯 쥐새끼처럼 숨어 지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음….”
김명현 교수가 다시 한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설득이 나름 먹히는 모양새.
애초에 <빌런>에 대한 적대감이 엄청난 김명현 교수를 상대로 하는 설득이었기에, 안 먹히는 게 더 어려웠다.
나는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써클의 업무에 다소 위험한 부분이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위험하기에 오히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카데미에서 발생하는 빌런의 소행만큼은, 아카데미 내부에서 방지할 수 있게 대비가 되어있어야 하니까요.”
김명현 교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듯 위험한 성향의 써클을 인가해 줄 교수님은… 김명현 교수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 한마디에…
김명현 교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 신규 써클 창설을 인가하겠습니다. 제가 담당 교수가 되도록 하죠.”
됐다…!
고민은 길었지만, 대답은 확실했다.
아마 그 역시 이미 허락해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모양이다.
나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행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명현 교수 말곤 없었다.
탁원호 교수는 이미 담당하고 있는 써클이 있기에 어려웠고, 최근에 알게 된 유은설이나 정선영 등은 정식 교수가 아닌 강사이기에 써클 담당이 불가했다.
다른 교수들은 뭐, 애초에 이런 써클을 받아줄 리도 없고.
“도재현 홀더, 혹시 탁원호 교수도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네. 미리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운영진 측에서 클레임이 들어와도 이야기가 쉽겠습니다.”
김명현 교수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자신의 책상 쪽으로 가 몇몇 서류들을 꺼낸 후…
내게 다가와 이들을 건넸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규 써클을 창설하기 위해선 최소 부원이 필요합니다.”
“예. 15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총 15명의 부원. 즉, 우리가 만들 써클에 15명의 부원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써클 가입 기간은 다다음 주부터 시작되니,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신규 부원을 모두 모집하고 아카데미 내에 인가를 마쳐야 하겠죠.”
무려 15명에 이르는 신규 부원.
새로 써클을 창설해야 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되는 숫자지만,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빌런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아.’
아카데미 내엔 <빌런>에 악감정을 지닌 학생 홀더가 상당히 많았다.
단순히 범죄조직이라 싫다, 수준이 아닌…
그들을 완전히 혐오하고 증오하는 학생들.
당장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만 네다섯 명은 있었다.
아마 부원 모집공고를 하면, 이들은 옳다거니 하고 달려올 게 분명했다.
지금껏 아카데미엔, 이런 부류의 써클을 만들고자 시도한 이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당장 나도 피하려고만 했었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나는 <빌런>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었다.
한 개인이 상대하기엔 그들의 세력이 매우 크기도 하고, 중범죄를 우습게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들의 집단인 터라 놈들과 엮인다는 게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카데미 괴수 출현’ 사건에 우연히 빠져들게 되면서 그 계획은 어그러졌다.
이 사건으로 <빌런>의 관심을 조금씩 받기 시작하는 박진우가 아예 현장에 없었고, 그 몫은 내가 대체하게 됐다.
‘…그리고 학기 말 평가.’
아카데미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빌런>의 계획.
그 증폭제 역할이었던 ‘안도권의 살인 피해자’가 김채은이었다는 점에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마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듯 전면에 나서며 안도권을 막아냈고, 이 사건으로 <빌런>의 경계를 한껏 받게 됐다.
단순히 주변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빌런>에 대한 내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김채은을 죽이려 들어?’
소중한 사람을 죽이려 들던 이들.
그런 새끼들이 무섭다고 숨는다면.
그건 그냥 병신이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싸울 힘을 키우고, 그들에 맞설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안티 빌런> 써클 창설.
이는 그에 대한 첫걸음이자, 내가 이곳에 빙의된 이후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변화’였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못다 한 이야기는 목요일 전담 수업이 끝나면 더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김명현 교수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새로 모집할 부원들을 떠올려봤다.
상대가 <빌런>이든 뭐든.
일단 ‘싸우는 거’니까…
박진우는 무조건 오케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