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 변화와 대비 (4)
아카데미 3학년의 2학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마지막 학년의 마지막 학기.
고등학교로 치면 졸업반, 대학교로 치면 취업반이다.
강의 대부분은 이미 수강이 끝나 있고, 이제는 입단을 위해 클랜들의 문을 두드려야 할 시기였다.
마법사 계열 3학년이자, 불속성을 다루는 B급 홀더.
그리고 아카데미 내 대형 써클, <염무>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윤지아에게도 이는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써클 일은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윤지아는 요즘 들어 쉴 새 없이 바빴지만, 써클의 일만큼은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염무>는 윤지아의 아카데미 생활 3년을 함께 해 온 소중한 써클이었다.
불 계열을 다루는 학생들이 모여 순수히 불에 관해 탐구하고, 관련 마법을 연구하는 써클.
그간 쌓여온 역사 역시 짧지 않은 정통 연구 써클.
윤지아는 여느 학생들처럼 1학년 2학기 때 <염무>에 들어왔고, 그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2학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써클 회장을 맡게 됐다.
일찌감치 회장이 되어 이끌어온 써클이, 그녀에게 각별하지 않을 리 없다.
때문에 윤지아는 너무도 바쁜 이번 학기에도, 써클에 일이 있을 땐 아카데미로 등교하는 편이었다.
“선배, 오셨어요?”
“응. 미리 와 있었네?”
“네, 오늘 포스터 붙여야 하니까요.”
윤지아는 자신을 기다리던 2학년 후배에게 인사했다.
오늘부터는 아카데미 내에서 본격적으로 써클 홍보가 시작되는 기간.
매년 지원자가 넘쳐나는 <염무> 써클 역시, 홍보 기간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대형 단체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이건 어느 사회를 가도 통용되는 규칙 중 하나였다.
“홍보 포스터는 제대로 준비됐어?”
“네, 여기.”
촤르륵-
윤지아는 후배가 건넨 커다란 홍보 포스터를 펼쳐 봤다.
영롱한 빛으로 타오르는 불길의 그림과 깔끔한 로고.
대형 써클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설명과 한눈에 봐도 매력적인 장점들.
홍보 포스터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리고 <염무>의 특성을 무엇보다 잘 드러낸 포스터 같았다.
윤지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했네.”
“그쵸? 그림은 주희가 직접 그린 거예요.”
“주희가? 그림에 소질 있는 애였구나?”
“홀더 각성하기 전에 미대 준비했었대요.”
포스터에 관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홍보물을 걸어 놓을 아카데미 학생회관에 도착해 있었다.
학생회관 중앙에 자리한 대형 홍보용 게시판.
<염무>는 이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홍보물을 게시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공식적으로 산정하는 ‘써클 점수’에서 매년 고득점을 획득하는 <염무>이기에 규정에 따라 메인 게시판에 홍보가 가능했다.
“선배, 지금 위치 어때요?”
“그것보다 더 잘 달기 힘들 것 같아.”
“그쵸? 헤헤.”
“홍보물 걸어야 할 곳 많으니까, 적당히 걸고 움직이자.”
“네, 선배.”
어차피 마케팅이라는 게 힘을 더 준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짧고 임팩트있게.
윤지아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그게 홍보의 기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학생회관 내 다른 게시판으로 이동하던 중.
“…어?”
“왜 그러세요, 선배?”
문득 윤지아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메인 홍보 게시판을 지나…
학생회관 가장자리 쪽에 자리한 작은 홍보 게시판.
주로 소형 써클이나 신규 써클들이 홍보물을 내거는 게시판이었다.
평소엔 그저 가볍게 지나쳤을 곳이지만, 어쩐지 윤지아의 시선을 확 잡아챈 홍보물 하나가 있었다.
<부원 모집 홍보>
-써클명: 안티 빌런 (신규)
-써클장: 도재현 (1학년/암살자 계열)
-사회 범죄 조직인 빌런 클랜에 관해 연구하는 써클. 계획범죄를 어그러뜨리거나 아카데미에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는 등 빌런에 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지향합니다.
“1학년이 만드는 신규 써클? 거기에 빌런 연구? 아하하. 재밌네요. 아무도 신청 안 할 것 같은데. 거기에 홍보 포스터도 완전 대충 만들었네요.”
같이 이를 읽던 후배가, 홍보물을 비웃었다.
후배의 말이 맞았다.
짧고 임팩트 있는 홍보물이긴 해도, 별다른 그림이나 로고도 없이 대충 만든 기색이 역력했고… 내용 역시 매년 하나씩은 꼭 나오는 ‘1학년 학생의 신규 써클’ 홍보였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뻔한 홍보물이었다.
‘어떻게….’
하지만 윤지아에게 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 포스터를 보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홀더로 각성하기도 전의 일.
윤지아는 가장 친한 친구를 <빌런> 소속 클랜원에게 잃은 적이 있다.
친구는 아무런 연고나 이유도 없이, ‘묻지마 살인’으로 <빌런> 클랜원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었다.
당시 뉴스에도 여러 번 나오고, 사회적으로 떠들썩했었지만… 결국 해당 범죄자는 잡히지 않았었다.
‘…….’
그러나 윤지아는 마음속으로만 그 증오를 삼킬 뿐.
달리 행동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룬 홀더가 된 후, 몇 번이나 복수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빌런>은 그렇게 만만한 클랜이 아니었다.
혼자서 상대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조직이었고, 집단을 꾸린다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당장 홀더 협회만 해도 <빌런>을 소탕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
어차피 의미 없을 것이다.
<빌런>을 향해 뭔가 하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
한 학생이 써클을 만들었다.
<빌런>에 관해 연구하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써클.
<안티 빌런>.
이름 그대로, <빌런>에 대한 모든 것을 보이콧하는 써클.
그 위험하고 험난해 보이는 길을…
고작 1학년 학생 홀더가, 신규 써클로 만들어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걸 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한때 포기해버렸던 윤지아의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움직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윤지아 자신도 믿기 힘든.
거친 감정의 파도였다.
“ … … 선배, 선배? 왜 그렇게 있으세요.”
5분, 아니 10분일까.
하염없이 그 공고문만을 바라보던 윤지아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후배를 바라봤다.
“소윤아.”
“네?”
공고문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눈이 동그래지는 후배.
윤지아는 그런 그녀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너, 염무 회장 할래?”
“…네, 네에?!”
3학년 2학기.
졸업반으로 한 학기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윤지아의 가슴에 작은 불길이 지펴지고 있었다.
* * *
[떨어지는 매화, 길을 찾은 칼날. 양손에 단검을 쥔 당신의 자세가 점점 매화의 움직임에 가까워집니다. 매화검법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매화검법’ 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룬의 성향으로 속력을 1 획득합니다.]
유은설과의 전담 수업은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투척 무기로서의 단검’이 아닌, ‘주력 무기로서의 단검(소검)’은 암살자 계열의 정수였다.
유은설의 족집게 강의를 통해 두루뭉술하게만 잡혀 있던 단검술에 대한 이해도는 점점 깊이를 더해갔고, 덕분에 전담 수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레어룬인 [매화검법]을 획득하며 1차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룬 레벨이 올랐나요? 움직임이 더 날카로워졌네요.”
내 훈련을 지켜보던 유은설이 입을 열었다.
역시 검법을 전수해 준 스승님답게.
단번에 내 변화를 눈치챘다.
“네, 스승님. 방금 막 2레벨이 됐습니다.”
“도재현 홀더는 정말 놀랍네요. 룬을 획득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어떻게 하루도 안 돼서 룬 레벨을….”
그 이유는 당연히 [구도자의 땀방울] 덕분이다.
룬 레벨의 성장이 3배 빠른 특수효과와 유은설의 일대일 강의가 더해지니,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나도 이렇게 빨리 룬 레벨을 올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예 재능이 없던 건 아닌가 보네….’
처음에 [매화검법]을 배울 땐, 아예 이를 익히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다.
각성 때 공통룬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다른 파생룬들도 재능이 없어 얻지 못할 가능성 때문에.
하지만 다행히 룬은 별문제 없이 획득할 수 있었다.
룬만 획득하면, 그 이후의 성장은 일사천리였다.
“다음 수업 때는 보법류 룬과 같이 매화검법을 응용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되겠네요. 도재현 홀더, 보법류 룬은 보유하고 있죠?”
“네, 보유하고 있습니다.”
“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수업 때 보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렇게 밤늦게까지 진행됐던…
유은설과의 전담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고문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가입신청서 들고 뵈려고 하는데…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제 <안티 빌런>에 대한 공고문을 올렸었고, 바로 오늘 가입을 문의하고 싶다는 사람의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원 모집이 필수적인 신규 써클이라곤 해도, 얼굴도 안 보고 가입 신청서도 없이 문자만으로 부원에 넣을 수는 없으니까.
장소는 전사 계열 건물 안, 빈 강의실.
다행히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맞출 것 같았다.
서둘러 강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문의 학생은 강의실 한편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제가 일이 좀 있었어서, 시간에 딱 맞춰서 왔습…”
가볍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전하려던 찰나.
문득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 반가워, 도재현. 난 암살자 계열 1학년, 지윤재라고 해. 우리 서로 얘기하는 건 처음이지? 같은 계열 동기인데 말이야.”
책상에 앉아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미는 지윤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거 완전…
시작부터 대어가 들어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