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탄 암살자, 지윤재.
1학년 암살자 계열 중 차석을 차지한 실력자이자, <빌런> 내 아카데미 지부에선 차수연 다음으로 영향력이 높은 실세 클랜원이기도 했다.
그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극 후반부 <빌런> 클랜의 ‘아카데미 말살 작전’.
차수연과 지윤재를 위시한 아카데미 지부원들은 그동안 쌓아둔 함정과 스파이들을 모두 긁어모아,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다.
<빌런> 입장에서도 몇 년 전에 발발한 ‘홀더 협회 침공 작전’ 이후, 아주 오랜만에 펼치는 대규모 침공.
홀더 계의 화수분을 삭제하면 자신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질 거라는 판단하에, 침공을 감행한다.
‘거기서 무수히 많은 학생을 죽이지.’
지윤재는 이 작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용을 탄 암살자.
그 위명에 걸맞게 웬 용 같은 생김새의 괴수를 데리고서 무차별적으로 학생들을 살해한다.
최소 A급 홀더의 위력을 보이며, 중력의 지배자 차수연과 함께 아카데미의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선정됐었다.
그 지윤재가 눈앞에 있었다.
내가 만든 써클, <안티 빌런>에 가입하기 위해.
‘바늘을 제대로 물었구나.’
지윤재 급 대어가 오게 될지는 몰랐지만, 나도 나름 <빌런> 쪽 사람이 오리라곤 예상했었다.
빌런에 관해 연구하고 그들에 대항한다는 파격적인 써클.
이러한 써클에, 당사자들의 관심이 동하지 않을 리 없겠지.
특히 이런 상황을 즐기는 사이코, 차수연은 더욱 강하게 명령을 내렸을 거다.
반드시 <안티 빌런>에 가입하라고.
그런 점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나는 환한 얼굴로 지윤재의 손을 맞잡았다.
“나도 반가워. 지윤재면… 암살자 계열 차석 맞지?”
“에이, 그게 언제적 성적이야. 입학성적인데. 2학기부턴 3등으로 내려왔어.”
지윤재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학년 성적은 학기마다 변동된다.
학기별 이론 및 실습 성적, 계열 내 교수들의 평가, 학기 말 평가 성적 등 아카데미 내 다양한 평가 요소들을 결합해 바뀌는 성적.
참고로 내 성적은 상급반으로 올랐을 뿐.
등수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성장 폭과 변화 수준을 고려하면 고위 등수를 차지해야 맞지만, 그간 보여준 내 실력이 ‘암살자 계열’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 때문이다.
오히려 전사 계열이었으면 차석까지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써클에 들어오고 싶다고?”
나는 곧장 본론을 꺼내며 선수를 쳤다.
계속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지윤재의 속셈이야 뻔하다.
평범한 얘기들로 내 속내를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갑작스럽게 <안티 빌런>을 만들겠다는 진짜 의도.
그게 궁금할 테니까.
그럴 때일수록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됐다.
“아… 어. 재밌어 보이는 써클을 만들었던데?”
“재밌는 써클?”
“응. 고작해야 아카데미 학생들로 빌런 같은 거대 클랜에 맞서는 써클을 만들겠다니… 재밌잖아.”
은근히 깔보는 듯한 어조가 그의 말투에 묻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깔려고 하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글쎄, 재밌으려고 만든 써클은 아니야. 우리 써클은 진지하고, 상대가 거대 조직이라고 해서 쫄 이유도 없어. 안전장치가 많으니까. 그리고 저번처럼 손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단, 먼저 움직이는 게 훨씬 낫잖아?”
“…저번처럼?”
“응. 너도 그때 봤지? 안도권 사건.”
움찔-
핵심을 찌르는 말에 지윤재가 순간 몸을 들썩였다.
안도권 사건은 <빌런> 아카데미 지부의 실패작 중 하나다.
처음부터 계획한 ‘우발적 학생 살인’은 성공하지도 못했고, ‘광폭화 포션’까지 쓰며 안도권이 <빌런> 소속이라는 걸 사방에 알린 꼴이 됐으니.
자신들의 치부를 찌르는 말에 지윤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거 빌런 소행이라고 결론 났었나?”
“결론 나고 말고 할 게 있나. 광폭화 포션 쓰면 다 빌런이지. 금지 아이템 써가면서 그런 쓰레기 짓 할 애들은 빌런 새끼들밖에 없잖아?”
“…….”
순간 과격해진 내 말에 지윤재의 표정이 굳었다.
새끼…
표정관리 못 하네.
그래도 해야 할 거다.
지금 건수가 잡혀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자신이 스파이라는 걸 들키면…
녀석은 두말할 것도 없이 1순위 척결대상이 될 테니까.
게다가 지금의 지윤재는 원작처럼 강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용 없잖아?’
용을 탄 암살자, 지윤재.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 칭호는 영영 얻지 못할 게 분명하다.
녀석이 관련 룬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들어준 아이템, [잊혀진 아룡의 석판].
그게 지금 내 손에 있으니까.
용도 없고 후반부에도 진입하지 않은 지윤재는, 생각보다 쉽게 제압될지도 몰랐다.
‘차수연도 마찬가지야.’
난데없이 강사로 취임하며 아카데미에 잠입해 있는 차수연도 논외는 아니다.
아무리 강한 그녀라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 원작처럼 날뛸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에 다섯밖에 없는 S급 홀더.
유은설이 아카데미에 와 있고, 내 든든한 뒷배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은설 때문에 본격적으로 잠입해 왔겠지만… 반대로 그녀 때문에 쉽게 못 움직이겠지.’
<빌런> 녀석들의 행동반경이 대범해지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결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안티 빌런>을 만든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모두 고려하면서 창설한 써클이었다.
“아무튼 가입하려고 온 거지? 신청서는 가져왔어?”
나는 씩 웃으며 지윤재에게 말했다.
지윤재는 순간 얼을 타다가,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품에서 종이를 건넸다.
“…어, 여기.”
“오케이.”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는 평범한 신청서.
나는 이를 가볍게 확인한 후 품에 넣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신규 써클이야.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점도 많고, 신규 부원도 15명을 모집해야 해서 더 많이 필요해. 필수 부원 모두 충족되는 대로 연락할 테니까, 첫 모임 때 다시보는 걸로 하자.”
써클의 규칙이나 계획, 비전.
보통은 이런 내용을 말해주겠지만, 지윤재는 이에 대해 전혀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그는 진짜 가입을 문의하러 온 게 아니니까.
<안티 빌런>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파악하고 탐색하며, 결국은 직접 들어와 보며 어떤 식으로 활동할지 경계하기 위한 의도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미 작성이 끝난 그의 가입신청서가 이를 방증했다.
“15명이 다 모이긴 할까?”
내가 신청서를 챙기며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자, 문득 지윤재가 물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벌써 10명 정도는 모였어.”
“여, 열 명이나 모였다고?”
“어. 너도 알다시피 빌런에 원한 가진 사람이 워낙 많잖아.”
혼란을 주기 위해 던진 거짓말인데 잘도 속는다.
병신.
네가 처음이야, 지윤재.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다시 손을 건넸다.
“잘해보자. 1학년 중에서도 실력자가 들어오니까 나도 든든하네.”
“…그래.”
<빌런> 소속 핵심 클랜원을 <안티 빌런> 써클에 끌어들이는 것.
리스크가 있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잘만 활용하면 스파이를 내부에 묶어두며 경계할 수 있다.
지윤재의 써클 영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앞으로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 *
아카데미의 2학기가 시작된 후.
친구들을 볼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너무 바쁘다.
학기 수업으로 듣는 총 6개의 강의와 더불어, 세 명의 교수와 전담 수업을 진행한다.
화요일엔 유은설, 수요일엔 탁원호 교수, 목요일엔 김명현 교수.
세 명의 스승님에게 각각 수업을 받는 것만으로 일주일의 절반이 날아간다.
그런데 여기에 던전 관리 등 개인 용무, 심지어는 <안티 빌런>이라는 신규 써클까지 창설했다.
게다가 강의마저 문가은을 제외하면 겹치게 듣는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야 볼 수 있는 게 요즘이었다.
“…인턴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마주한 강주연도 이런 말을 건넸다.
강주연이 ‘너 얼굴 보기 힘들어.’라고 돌려 말할 정도라니.
요즘의 내가 얼마나 바쁜지 실감이 되는 순간이다.
“미안미안. 새 학기 시작하고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
가벼운 내 사과에 강주연이 눈을 살짝 떴다.
“써클 새로 만드는 거…?”
“아, 응. 그것도 그렇고, 전담 수업 같은 것도 그렇고. 동시에 여러 개 하려고 하니까 손발이 좀 부족하네.”
<안티 빌런> 공고를 낸 지 이틀이 지났다.
당연히 친구들도 이 소식을 알고 있었다.
김채은은 당장 들어오겠다고 선언했지만, 김명현 교수가 써클 담당 교수인 터라 영입이 망설여졌다.
문가은 역시 은근히 들어오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쳤고, 박진우에겐 아직 별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들어갈래.”
강주연에게서도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이건 뭐랄까, 참 고민이 된다.
내가 대비책을 위해 직접 변화를 주긴 했지만, 그 영역이 핵심 인물들의 성장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
강주연은 <염무>에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 ‘윤지아’를 만나야 성장하는데…
눈앞의 이득을 위해 강주연을 <안티 빌런>에 영입했다간, 그녀가 성장하는 길을 막게 되는 걸 수도 있었다.
“주연. 전에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너한테 조금 더 도움 되는 클랜으로…”
그렇게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던 중.
부우웅-
핸드폰이 울리며 문자가 왔다.
[010-xxx…] 안녕하세요. 저는 마법사 계열 3학년 윤지아라고 합니다. 공고문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지금의 상황을 완벽히 해결해 줄 문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