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는 아마 여기 모인 학생 중, <빌런>에 대한 증오가 가장 깊은 학생일 것이다.
다른 이들은 <빌런>에 피해를 받거나, 주변 사람이 당한 것에 그치지만…
이현호는 <빌런>에 의해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마검의 소유자, 황성연.’
<빌런> 측 수뇌부로 유명한 홀더, 황성연.
그는 마검으로 유명한 전설급 아이템 [다인 슬라이프]를 보유한 전사 계열 홀더로, 지금껏 수없이 많은 일반인과 홀더를 살해한 최악의 살인 범죄자였다.
이현호의 어머니는 그런 황성연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10년 전 발생했던 ‘광화문 광장 집단 살인 사건’.
마검의 진정한 힘을 발현한 황성연이 일으킨, 역대 최악의 범죄.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무차별 살인 사건에서 죽어갔고, 이현호의 어머니 역시 그에 휘말려 생을 마감했었다.
그 날의 증오는 이현호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이현호와 그의 아버지 이도권은 그날 이후 끊임없이 황성연을 추적해 왔지만…
범국가적인 수배령에도 잡히지 않는 황성연이, 겨우 홀더 두 명의 추적에 잡힐 리 없었다.
‘윤지아 다음으로 신청했었지.’
그래서일까.
이현호는 이렇듯 <빌런>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면, 자신의 계열과 힘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참여한다.
그는 윤지아 다음으로 <안티 빌런> 가입을 문의했었다.
‘원작에서도 그랬고.’
원작에서의 극 중후반부.
차수연과 지윤재를 위시한 <빌런> 아카데미 지부가 일으킨 ‘아카데미 습격 사건’.
동생인 박윤서가 연관되며 <빌런>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박진우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던 이가 바로 이현호였다.
<빌런>에 대한 증오가 누구보다 깊은 홀더.
이현호의 <안티 빌런> 가입은 사실상 정해진 순서였었다.
“이현호 홀더는 1학년 특수 계열, 그중 세부 계열인 대장장이 쪽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평가받는 홀더입니다.”
최유민이 후반에 두각을 드러낸 케이스라면, 이현호는 처음부터 유망주로 이름을 알린 대장장이다.
이미 1학기에 레어급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에 성공했었고, 벌써 에픽급 제작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
국내 최고 대장장이의 아들.
그 명성과 재능은 쉽게 어디 가질 않았다.
“우리 써클이 빌런에 대항하는 방식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이현호 홀더는 단순히 빌런 측 홀더와의 전투에 대비한 장비제작뿐 아니라, 획기적인 발명이나 특수 아이템 제작… 혹은 빌런 측 아이템을 직접 확인하고 스파이를 찾아내는 등 우리 써클의 활동 영역 전반을 넓혀줄 겁니다.”
써클에 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나는 다소 뜬금없을 수 있는 대장장이의 써클 가입에 관해 부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한 후, 총 22명의 부원 소개를 모두 마쳤다.
굵직한 이름만 해도 윤지아, 강주연, 문가은, 박진우 등…
손으로 다 세기 힘들 정도로 수준 높은 부원.
신규 써클이라기엔 너무도 화려한 부원 라인업이었다.
나는 윤지아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안티 빌런 써클의 부회장은 윤지아 선배님께서 맡아주실 예정입니다. 선배님께선 한 차례 거절하셨지만, 써클 경험과 학년 등을 모두 고려해봤을 때 선배님보다 적절한 인원이 없다고 생각해 그리 결정하게 됐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다른 의견 있으신 부원 있으십니까?”
좌우로 고개를 돌려 확인해봤지만, 이견은 없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윤지아는 <염무>의 회장으로 있던 학생.
대형 써클을 마다하고 온 그녀를, 우리 써클의 부회장으로 추대하는 데에 반대할 부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다들 이견 없는 것으로 알고…”
“잠깐.”
…근데 그런 부원이 있네?
갑작스럽게 손을 들며 내 진행을 막은 부원.
2학년 쪽 라인에 있던 남자부원으로, 처음 듣는 이름의 선배였다.
이름이 아마…
구명훈, 이었던가?
정확한 계열과 특기는 기억나질 않았다.
구명훈은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낀 자세로 내게 태클을 걸었다.
“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아, 잘못 걸렸다.
초면부터 반말하는 새끼치고 정상인 사람은 권오준밖에 못 봤는데….
저 거들먹거리는 자세, 처음부터 반말하는 화법.
아마 싸가지 하나는 밥말아 먹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살짝 화가 몰려오는 걸 꾹 참고 답했다.
“어떤 게 말씀이시죠?”
“네가 안티 빌런 써클의 창설을 건의하고, 김명현 교수님 담당 교수로 데려온 공로는 인정해. 하지만 그것과 써클의 장을 맡는 건 별개지. 1학년이 써클 회장을 맡는다? 난 들어본 역사가 없어서 말이야.”
“……?”
순간 나도 모르게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고 말았다.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지?
그러니까.
윤지아의 부회장 선임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회장이 되는 거에 불만이 있다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써클 회장을 맡는 건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김명현 교수님도 그렇게 알고 있구요.”
“글쎄. 정식 써클 등록일은 다음 주 월요일 아닌가?”
“…….”
이건 사실 구명훈의 말이 맞았다.
신규 써클 창설에 대한 인가는 필수 부원 조건을 만족해 확정됐지만, 아직 정식 써클 등록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
다른 써클들의 신규 부원이 새로 등록되는 날에 신규 써클도 등록을 확정짓는다.
그는 그 점을 지적하며, 써클의 회장을 바꾸자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내가 만든 써클인데 내가 회장인 게 싫다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을까.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럼 선배님이 원하는 회장은 누굽니까? 설마 선배님이 직접 맡겠다는 건 아닐 거고.”
“당연히 아니지. 난 그저 경험이 풍부하고, 더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이 직함을 맡아야 된다는 주의일 뿐이야. 예를 들면… 윤지아 선배님 같은.”
그 말을 하는 구명훈의 시선이 윤지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열망이 담겨있는 듯한 묘한 눈빛.
그 끈적한 눈빛을 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이 새끼, 윤지아 빠돌이였구나.’
이번에 모집된 부원들이 모두 <빌런>에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아까 말했듯 다른 이유로 써클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고, 그 중엔 윤지아의 합류만을 보고 써클에 가입한 학생도 있었다.
그런 홀더의 대표주자가 바로 구명훈이다.
그는 윤지아를 보고 써클에 들어온 케이스였다.
가입문의를 할 땐 그런 얘기가 전혀 없어 몰랐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딱 그런 모양새다.
<안티 빌런>의 기치나 활동에도 관심이 없을 거다.
일전의 써클 역시 <염무> 소속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열의 어린 시선에…
윤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회장을 맡을 생각이 없어요. 써클을 이끌어가는 데엔, 창설을 건의하고 계획을 세운 도재현 홀더가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한 번 반발감을 드러낸 구명훈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배님. 평범한 동아리 같은 써클이야 모르겠지만, 우리 써클은 아카데미와 외부 클랜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써클입니다. 이런 써클일수록 이끌어가는 회장이 더욱 단단하고 굳센 경력을 지닌 학생이어야 하죠. 그런데 경력 있는 학생은커녕, 1학년 회장이라니요. 타 써클의 부원들이 모두 비웃을 일입니다.”
경력 있는 홀더가 써클 회장을 맡아야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 써클은 활동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써클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러한 써클의 창설과 부원 모집 자체를 처음부터 내가 했다는 게 중요하다.
이미 써클 창설의 인가를 확정 지은 순간부터, 내 리더십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어버린 거다.
그의 논리는 억지성이 깃든 궤변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논리조차 단지 구실에 불과하다.
구명훈은 윤지아의 빠돌이로서, 그저 그녀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싶은 것 뿐이었다.
“저학년이어도 충분히 회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저도 2학년 때 염무 회장을 맡았었어요.”
“하하. 그건 다 윤지아 선배님께서 뛰어나서 가능했던 일이죠. 그리고 2학년과 1학년엔 엄연한 경력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친 빠돌이 새끼.
1년 차이가 나 봐야 얼마나 차이 난다고.
구명훈의 확고한 태도에 윤지아는 난감하다는 얼굴을 했고, 나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빌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써클인데, 시작부터 관련 없는 인물이 부원으로 들어온 탓에 물을 흐리고 있었다.
‘그래도 풀어내야 해.’
써클 활동에 크게 관심도 없는 구명훈을 그냥 내보내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단순히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다른 부원들에게도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렇게 생긴 갈등을 어떻게든 납득 가능한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
그게 써클을 잘 운영하는 거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지닌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명훈 선…”
“어이, 선배님.”
그런데 옆에서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박진우였다.
박진우의 낮은 부름에, 구명훈은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 뭐? 어이?”
“그래요, 어이. 그렇게 경력이 중요하면, 한 판 뜰래요? 1학년이랑 2학년. 경력 차이만큼 실력도 차이 나는지?”
“뭐라고?”
구명훈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좋게 좋게 선배 대우를 해주던 날 보다가, 겉만 선배 대우를 하며 대놓고 무시하는 박진우.
그의 모습에 상당히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박진우는 씨익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불만 있는 학생은 그쪽 선배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랑 한 판 떠서 증명합시다. 고작해야 1년 차이가 그렇게 큰 경력 차이인지.”
나는 순간 머리를 짚었다.
‘하아….’
궤변론자를 설득하려고 했더니…
이번엔 뭐든 몸으로 해결하려는 부원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