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뭐 이런 무식한…”
구명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박진우를 봤다.
뜬금없이 대련을 치르자는 그의 제안이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어떤 점이 무식한 거죠?”
그러자 이번엔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문가은이었다.
문가은이 나섰다고…?
나도 살짝 놀랐고, 이를 확인한 구명훈의 인상도 같이 구겨졌다.
“…문가은 홀더님?”
“도재현이나 박진우는 너고, 저는 홀더님인가요. 재밌네요.”
그 말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문가은, 시원하다.
아마 문가은은 <로열>의 중요인물이기에, 구명훈 입장에서도 섣불리 반말할 수 없었을 거다.
그야말로 강약약강의 표본.
사실 나와 박진우가 약한 것도 아니긴 한데, 문가은에게만 존대를 하는 구명훈의 화법에서 의도가 뻔히 느껴졌다.
문가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님의 주장엔 허점이 너무 많아요. 경력과 경험을 문제 삼고 계시지만, 여기 모인 사람 중 도재현보다 빌런에 관해 경험이 많은 사람은 없어요. 아카데미 내에서 두 번이나 스파이와 맞서 싸운 적이 있고, 외부에선 불의 심판 인턴 때 빌런 강남 지부 소탕 작전에 함께 자리했었죠.”
“…부, 불의 심판?”
순간 구명훈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불의 심판> 인턴 경험이 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요즘 좀 유명해지긴 했어도 최근의 일이고, 홀더 계엔 그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많으니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어도 자기가 들어가는 써클의 회장인데…
어떤 경력을 지녔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부터 윤지아를 회장으로 생각한 빠돌이라 그런가, 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도재현은 처음으로 안티 빌런 써클을 기획하고, 김명현 교수님까지 담당으로 직접 설득한 홀더예요. 사실상 써클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런 학생이 써클 회장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나요.”
문가은이 쉴 새 없이 구명훈을 몰아붙였다.
‘살짝 민망하네.’
다른 사람도 아닌 문가은이 진지한 태도로 이렇게 말해주니 뭔가 고마우면서도 민망했다.
물론, 그녀의 말은 다 정론이다.
내 입으로 직접 하기 힘든 얘기들이라 그렇지, 모두 구명훈의 논리를 정면으로 타파하는 내용이었다.
구명훈은 말에서 수세에 몰리자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러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1학년을…”
“마지막으로 남은 그 1학년은 미숙하다는 논리. 그걸 깨기 위해 박진우가 대련을 신청하는 거구요. 이렇게 보면, 전혀 무식한 행동은 아니죠?”
그렇게 마무리하며 문가은이 생긋 웃었다.
그 모습에 구명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목조목 따지는 문가은의 말에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쯤에 끼어들며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그럼 박진우 부원의 제안에 따라, 구명훈 부원과의 대련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는 걸로 하죠. 아무래도 우리 써클이 전투 활동의 가능성이 있는 써클인 만큼, 양측의 의견이 모두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박진우와 구명훈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박진우 부원이 이긴다면 구명훈 부원은 깔끔히 인정해주시고, 구명훈 부원이 이기신다면 안티 빌런 회장 선출에 대해 재논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선배님, 인정하십니까?”
“…….”
구명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거절하기에는 회의실 내의 분위기가 과열됐고, 또 자신이 딱히 유명하지도 않은 1학년에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다른 부원들도 인정하십니까?”
고개를 돌리며 묻자, 남은 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래도…”
“서로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아마 2학년 부원들도 말만 안 꺼낼 뿐, 1학년이 회장을 맡는다는 것에 약간의 꺼림칙함이 있었을지 모른다.
써클의 활동 방향과는 별개로, 어쨌든 자신들보다 저학년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니까.
그래서 다들 이런 의견 충돌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도 나쁘지 않다.
솔직히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구명훈의 지적 및 박진우의 제안이었지만, 이걸 잘 활용하면 어수선한 써클 분위기를 재정립할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연무장으로 이동하죠.”
* * *
구명훈은 분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무심한 얼굴로 검을 매만지고 있는 남자, 박진우.
저 녀석의 뜬금없는 제안으로 연무장까지 불려와 대련을 하게 된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내기 주제에….’
대련에 자신이 없는 건 전혀 아니다.
구명훈은 2학년 전사 계열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심지어 [화염] 룬을 보유하며 멀티 홀더의 가능성까지 보여준 학생이다.
아쉽게도 이해도가 부족해 여타 마법사 계열처럼 [화염]을 깊게 파진 못했지만, 그 대신 다재능을 발판으로 <염무> 써클까지 가입했던 게 그였다.
그런 그가 고작해야 1학년 뜨내기의 도발에 겁을 먹을 리는 없었다.
‘지아님 앞에서 쪽팔리게….’
구명훈이 화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우상, 윤지아 앞에서 쪽을 당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구명훈에게 있어, 윤지아는 동경의 대상이다.
<염무>에 들어가 처음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한눈에 반했었고, 부드러운 성격과 따뜻한 마음씨, 써클을 이끌어가는 단단한 리더십에 또 한 번 반했었다.
구명훈이 바라마지 않는 홀더로서의 이상형.
그게 바로 윤지아였다.
그런 그녀가 있는 앞에서, 후배들에게 대놓고 면박을 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해도 한참 상하는 일이었다.
‘지아 님이 누구 밑에 있는 건 말도 안 돼.’
윤지아는 항상 최고의 자리에서 빛나야 한다.
그런 신조를 지닌 구명훈은, 다른 이의 밑에 윤지아가 있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도재현이 써클 창설을 기획한 시발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억지성으로 윤지아의 회장 부임을 밀어붙였다.
애초에 구명훈이 <안티 빌런>에 들어온 것도 윤지아를 따라온 것이었기에, 이러한 맹목적 추종은 당연한 일이었다.
‘1학년 뜨내기… 널 이기고 지아 님을 회장으로 만들어야겠다.’
계획했던 것과 일이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어쨌든 이 대련에서 이기기만 하면 회장 선출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 있다.
부원들 모두가 인정한 내용이었기에 쉽게 무를 수 없었다.
그 결과를 생각하며, 구명훈은 미소를 짓고 박진우를 바라봤다.
“뭘 그리 음침하게 웃으십니까?”
“…뭐?”
하지만 마주본 박진우에게서 들려온 대답에 구명훈이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저 싸가지없는 새끼가….’
역시 거슬리기 짝이 없는 놈이다.
아까부터 한 마디 한 마디 건넬 때마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박진우는 씨익 웃고 검을 들며 말했다.
“준비되셨으면 갑니다.”
“얼마든지.”
전사 계열끼리의 대련에 별다른 신호는 필요치 않았다.
선공자가 움직이면, 그때부터 바로 대련의 시작이다.
팟, 파바밧-!
박진우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구명훈은 그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보법류 룬이라… 나랑 비슷한 부류군.’
홀더의 빠른 속도.
이는 때로 속력 수치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 박진우의 움직임이 그렇다.
최소 [민첩성], 혹은 레어급 룬인 [날렵한 몸놀림] 정도의 보법류 룬.
이들을 보유해야 선보일 수 있는 움직임.
단순히 그것만 봐도 박진우는 방패를 들지 않는, 전사 계열 중에서도 공격에 치중한 딜러형 홀더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구명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읍…!!”
카, 카아-!!
카가강-!!
구명훈과 박진우의 검이 서로 거칠게 부딪혔다.
[날렵한 몸놀림]을 활용해 빠르게 달려든 박진우.
고레벨의 [민첩성]을 보유한 구명훈도 그 속도엔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검을 부딪쳐 본 구명훈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녀석… 평범한 C급이 아닌데?’
C급과 B급은 능력치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난다.
평범한 C급 홀더는 검을 맞부딪힌 순간 가벼움이 느껴진다.
원래라면 상대는 자신의 근력에 버티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맞부딪힌 검에서 묵직한 근력이 느껴진다.
능력치는 확실히 구명훈이 우위에 있지만, 결코 평범한 상대만은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캉- 캉- 카강-
카가가강-!!
이후 몇 번이나 검이 부딪히며 강렬한 금속음을 냈다.
그 안에서 박진우의 속도는 엄청났다.
분명 속력 수치 자체는 구명훈이 높은 게 분명한데, 속력과 관련한 특수 룬이라도 보유한 것인지 상대는 움직임 자체에 꽤 높은 보조를 받고 있었다.
‘과연. 괜히 나선 게 아니라는 건가.’
회장인 도재현도 아니고, 웬 이름도 못 들어본 1학년이 처음에 나섰을 땐 같잖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박진우는 확실히 1학년에서 손에 꼽을 만한 실력자였다.
‘그래도 나한텐 안 돼.’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괜찮은 실력자인 건 맞지만, 아직 부족하다.
B급에 근접했다곤 해도, 결국 C급 홀더다.
1학년과 2학년의 경력 차이.
이 대련의 결과는, 구명훈이 말했던 그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구명훈은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약점은 뻔하지.’
딜러형 전사 계열의 약점을 하나 꼽으라면, 마력 공격에 유독 약하다는 것이다.
방패를 드는 탱커형과 달리 이들은 오로지 공격에만 치중하기에 눈앞의 물리 공격을 같은 물리 공격으로 막을 순 있어도, 예상 외의 곳에서 날아드는 마력 공격에는 상당히 취약했다.
이건 구명훈 자신이 딜러형 전사 계열이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나는 그 마력 공격을 쓸 수 있는 홀더지.’
구명훈은 딜러형 전사 계열이면서, 동시에 [화염] 룬을 활용하는 다재능 멀티 홀더다.
서로의 공격이 맞부딪히며 극도로 집중된 상황 속에…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불속성 마력 공격은, 박진우를 패배로 몰아넣을 게 분명했다.
“끝이다!”
틈을 노리던 구명훈이 [화염]을 활용했다.
구명훈의 검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불길은 빠르게 뻗어 나가며 박진우의 어깨를 덮쳤다.
그대로 불길은 박진우의 온몸을 덮으며…
“어?”
온몸을 덮어야 할 불길이…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구명훈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박진우는…
여전히 얕게 타오르는 불을 검으로 툭툭 끈 후.
구명훈을 향해 싱겁게 웃었다.
“오우. 선배님 불길은 좀 약하네요? 맛없는데?”
그건 분명.
특수 능력치라 불리는 ‘불 내성’이 있지 않고서야, 절대 보일 수 없는 마력 방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