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보은군.
결계 밖, 속리산 필드로 들어가는 입구.
울창한 나무들이 주변을 장식하듯 양옆에 자리한 이곳을, 문가은과 나는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 뒤쪽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성나연과 함께.
고개를 흘깃 돌려 성나연을 확인한 나는, 문가은 옆으로 조금 더 붙으며 말했다.
“…책임져.”
그 한 마디에 문가은은 화들짝 놀라 답했다.
“미, 미, 미쳤어? 뭐, 뭘 책임져?”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로열 쪽에서 붙은 호위잖아. 네가 책임지고 성나연 홀더님 납득시켜.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 그 책임… 휴… 난 또….”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문가은은, 순간 뾰루퉁한 표정으로 다시 날 봤다.
“언제는 걱정 하나도 안 한다며. 클랜 호위니까.”
“뭐? 야,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이건 약속…!!”
나는 순간 말을 하다 말았다.
목소리가 너무 커진 것 같아서.
그리곤 슬쩍 뒤를 돌아봤다.
“…….”
아니나 다를까.
성나연은 멀리서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시발.
이것도 사랑싸움으로 보이나 보다.
이건 뭐 단단히 커플로 찍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문가은에게 속삭였다.
“이건 약속 위반이잖아. 분명 그때 아버지께 인사만 드리면 된다며.”
문가은의 가짜 남자친구 역할.
이는 분명 문정혁과의 식사자리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었고, 당시 역할극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원래 문가은이 부탁한 것보다 더 완벽하게 남자친구 역할을 해냈고, 2차로 이어진 문정혁과의 술자리도 기분 좋게 마무리하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 있었다.
문가은의 거짓말을 기어코 진실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런데 끝난 줄 알았던 역할극이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것도 <로열>의 핵심 중 한 명인 성나연을 상대로.
문가은도 여기까진 예상치 못했는지,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건 진짜 미안… 분명 아빠한테 비밀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 빌런 때문에 걱정돼서 그런지, 있는 말 없는 말 다 했나 봐.”
“…….”
무적 방패를 써버리네.
딸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당장 <빌런> 측 습격이 있었던 게 2주 전이고, <안티 빌런> 써클이 창설된 게 저번 주다.
그 후 써클 회장과 둘이서 필드 사냥을 가겠다는데, 걱정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특히 문정혁은 딸에 대한 애정이 유독 깊은 아버지니까.
‘…….’
물론, 그게 우리가 연인 사이라고까지 말할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문가은의 말대로, 성나연에게 우리에 대한 주의사항을 말해주다가 그런 얘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사냥하다 보면 별로 신경 안 쓰게 될 거야. 애초에 사냥하러 온 거라고 말도 해놨으니까 잘 이해하시겠지.”
“…응. 진짜 미안.”
“야야. 진심으로 사과하면 내가 뭐가 돼. 나도 그냥 한 말이야. 화낸 거 아니야.”
한껏 풀이 죽은 문가은의 모습에 당황해 버렸다.
사실 내가 가자고 했던 사냥이고 문가은은 따라와 줬을 뿐인데, 괜히 탓을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혹시 삐진 건 아니겠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때처럼 손이라도 잡을까?”
그 말에 문가은이 고개를 번쩍 들며 답했다.
“아니! 괜찮을 것 같아! 성나연 홀더님은 내가 잘 설득할게!”
이토록 완강한 거부라니.
역시 단단히 삐졌구나.
* * *
괴수들이 몰려 있는 곳, 결계 밖 필드.
이는 각각의 필드마다 지형적인 특성과 괴수 성향이 모두 다른데, 그중 속리산 필드는 유독 초반부에 괴수가 나타나지 않는 필드였다.
등산로를 넘어 탁 트인 언덕 부근.
필드 중반부쯤으로 가야 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덕분에 우리도 필드 등반을 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괴수를 마주하지 않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살짝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손엔 이미 [참회자의 검]이 들려있다.
언제 괴수가 나오더라도 싸울 수 있게, 완벽히 준비 중이었다.
문가은은 잠시 바닥에 손을 짚다가 말했다.
“아직 탐색에는 안 잡혀. 더 가야 나올 것 같아.”
궁수 계열이 파티에 꼭 필요한 이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수들을, 탐색류 룬으로 어느 정도 감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일전에 얻었던, 그리고 이제는 [야만왕의 후예] 하위룬이 된 [먹잇감 탐색]이 있기에 탐색이 가능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문가은이 다시 활을 들었다.
그리곤 주변을 보며 말했다.
“근데 사냥하는 홀더들이 별로 없네. 다들 연휴라서 안 온 건가?”
그녀의 말처럼 근방이 너무 한적하다.
괴수는커녕, 사람도 안 보인다.
초입부터 지금 위치까지 걸어오면서, 그간 마주친 홀더는 한 명도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나와 문가은, 그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는 성나연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꼭 오늘이 연휴여서만은 아니었다.
“원래 속리산 필드가 좀 인기 없는 사냥터야.”
“왜?”
“괴수들 공격 방식이 까다롭잖아. 대부분 하늘을 나는 공중형 타입이라, 사냥이 어렵기도 하고 싸워 본 경험 자체도 다들 적을 테니까.”
공중형 괴수는, 상대하는 홀더 입장에서 까다롭기 그지없다.
전사 계열은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괴수들의 공격을 잘 마크해야 하고, 딜러진 역시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기에 주의 깊게 사냥에 임해야 한다.
공격 방향이 대부분 일직선인 일반 괴수들과 달리, 공중형 괴수는 어떤 방향으로든 공격해올 수 있었다.
“근데 또 등급이 낮은 것도 아니잖아.”
“음, 맞아.”
속리산 필드는 꽤 수준 높은 사냥터다.
어설프게 D급이나 C급 괴수가 나오지 않는다.
초반부엔 괴수가 거의 없지만 중간부부터는 B급 괴수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고, 더 위쪽으로 가다 보면 A급 괴수들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일전에 얼룩진 암석 더미 공략을 위해 찾았던…
‘설악산 필드’와 유사한 수준의 사냥터.
그런 고등급 필드인데, 심지어 나타나는 괴수들도 하늘에 떠 있다?
누구나 선호하지 않게 되는 게 정상이었다.
“근데 단점만 있는 건 아니야. 짐승형 괴수들처럼 무리 지어 다니질 않아서 각개격파하기도 편하고, 또 하늘을 나는 이점이 있는 만큼 다른 능력들은 까다롭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은근히 사냥이 쉬울 수도 있어.”
적응만 한다면, 속리산 필드는 의외로 괜찮은 사냥터다.
…물론, 적응만 한다면.
그 적응이 귀찮아서 다들 안 오는 거긴 하지만 말이다.
문가은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날 봤다.
“도재현, 은근 필드 사냥 빠삭하네. 나도 잘 몰랐던 건데.”
그 말에 순간 뜨끔했다.
사실 나도 이론만 안다, 이론만.
글로 하도 많이 읽었던 터라.
내가 공통 수업 중 던전이나 필드에 관한 강의를 듣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너무 잘 알아서 이젠 질릴 수준이거든.
“흠, 흠흠. 내가 워낙 사냥에 관심이 많잖아. 넌 클랜에서 안 와봤어?”
“응. 파견 갈 때도 거의 인왕산 필드나 설악산 필드 쪽으로만 가봤으니까.”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적인 국내 인기 사냥터 중 두 곳.
사냥을 가거나 경험을 쌓아야 한다면 그 두 곳을 가지, 굳이 속리산 필드로 올 필요는 없긴 했다.
사실 나도 ‘와이번에 대한 단서’만 아니었다면…
이런 까다로운 사냥터까지 오진 않았을 거다.
끄으으윽-
끄으윽-!
그리고 그때.
저 멀리 위쪽에서 웬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걸어온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다다른 지금.
드디어 속리산 필드의 괴수가 나타난 것이다.
문가은이 재빨리 활의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고, 나 역시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이윽고 나타난 징그러운 얼굴의 괴수.
보이자마자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피다.”
B급 괴수, 하피.
마치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한 머리와 조류의 몸을 지닌 특이 형태의 괴수.
일반적으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알려졌지만, 괴수의 외관답게 워낙 뭉개지고 투박해 징그럽기만 했다.
“가은, 센 걸로 한 방 준비해줘.”
“어떻게 하려고?”
“하피는 속력이 빨라. 아마 집중력 룬 활용해도 바로 맞히긴 힘들 거야. 내가 먼저 단검으로 멈칫하게 만들면, 제일 강한 지원사격으로 녀석을 맞혀줘. 그럼 사냥하기 훨씬 수월해질 거야.”
하피는 기본적으로 신체강화 타입의 괴수다.
물을 다룰 수 있는 마력룬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미비한 수준.
녀석의 주된 공격루트는 누가 뭐래도 빠른 속력과 공중 장악을 활용한 급습이었다.
이런 공격의 대처법은, 역으로 선공을 가하는 것이다.
녀석이 공중을 거닐며 활개치기 전에, 먼저 녀석의 움직임을 제약시켜 지상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비도술은 그런 공격에 최적화돼 있지.’
최근 내가 유은설에게서 소검술을 주로 배우고있긴 하지만, 그 전까지의 내 주된 단검 활용은 역시 비도술이었다.
허리춤에 맨 네 자루의 단검.
나는 [참회자의 검]을 잠시 마법가방에 넣고, 단검들을 꺼냈다.
끄으으-!!
끄아으윽-!
하피가 여전히 괴이한 소리를 내며 근처까지 다가왔다.
드디어 가시권에 들어온 녀석의 몸.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단검 네 자루를 던졌다.
‘쿼터 나이프!’
한 자루의 단검에 마력을 담아 공격하는 [쿼터 나이프].
이걸로 하피를 해치우진 못해도, 문가은이 확실히 공격할 수 있게 틈을 만들어줄 순 있을 거다.
보조룬인 [냉철한 집중력]이 흔들리는 초점을 잡아줬다.
“럭키.”
두 자루는 빗나갔지만, 나머지 두 자루는 하피의 몸통과 다리에 꽂혔다.
그리고 다리 쪽 단검 안에, 마력이 담긴 모양이었다.
끄윽-?끄으으으-!!
잠깐 움직임이 제약된 하피를 보자마자 외쳤다.
“문가은, 지금…?”
그리고 소리치던 나는, 순간 말 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콰, 콰아아앙!!
끄으으윽-?!
갑작스레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피의 다리가 폭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커다란 충격을 그대로 받은 하피는 다리가 박살난 채, 휘청거리며 엉성하게 날갯짓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비장하게 활 시위를 당기던 문가은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게….”
그걸 보고서야 나도 깨달았다.
[폭발하는 검의 기세]로 연동된 비도 폭탄.
위력이 부족할까봐 그 폭발 성질을 추가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엄청 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