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사기 룬을 얻었다-134화 (134/353)

평범하지만 상쾌한 화요일.

강주연은 오늘 하루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늘 지루하기만 하던 아카데미 강의는 요즘 들어 꽤 흥미로웠고, 강사 및 교수진의 질이 높아져서인지 1학기에 비해 배울 점도 많았다.

2학기에 들어오고 나서의 수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는데, 오늘은 유독 집중이 더 잘 되는 기분이었다.

특히 최근 <불의 심판> 신규 클랜 면접을 보는 윤지아.

그녀를 보고 난 후로, 강주연은 조금씩 변했다.

전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자 하는 향상심이 생겼고, 이런 욕심은 그녀를 조금 더 열정적으로 만들었다.

강의 내용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흡수했으며, 수업 후 개인 수련 일정을 잡아놓는 실행력도 보였다.

B급 홀더에서 벗어나 A급 홀더로.

홀더로서 한 차례 성장하기 위한 밑거름.

이를 천천히 뿌려가는 과정이,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주연아, 주연아. 나 B급으로 승급했어!”

…자신의 유일한 절친.

문가은이 뜬금없는 소식을 전하기 전까지는.

그에 강주연은 조용히 되물었다.

“…B급?”

“응응. 그동안 근력이 조-금 모자랐었는데, 이번에 속리산 필드 사냥 갔다 오면서 성장을 좀 했거든. 덕분에 오늘 바로 승급을 마쳤다는 말씀! 이제 너랑 같은 등급이다, 이 말이야. 아하하.”

문가은이 웃으며 장난을 쳤다.

사실 그녀의 B급 승급은 시간문제였었다.

이미 C급 홀더 중엔 최상위였고, 기준성과는 진작에 만족했다.

<로열> 클랜의 자제로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온 그녀가, B급으로 승급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간 강주연이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문가은 역시 궁수 계열 수석으로 입학한 아카데미의 핵심 유망주였던 것이다.

자신의 친한 친구이면서도, 스스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홀더 중 하나.

그게 바로 문가은이었다.

“잘됐네. 축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 인사를 건네려던 중.

웬 단어 하나가 강주연의 마음에 걸렸다.

“…속리산?”

속리산 필드.

한국에 있는 수많은 결계 밖 필드 중 하나.

그런데 강주연에게 유독 익숙한 이름의 필드였다.

불과 며칠 전.

한 남자로부터…

이곳의 사냥을 같이 가자는 제안을 들었었기에.

클랜 프로젝트 때문에 아쉽게 이를 거절했었기에.

때문에 이를 되묻는 강주연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응응. 연휴 때 사냥 갔다 왔거든.”

그 대답에, 강주연은 다시 조용히 물었다.

“…혼자?”

“응? 아니, 도재현이랑 둘이 갔…”

아.

순간 아차 싶은 문가은이 말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도로 주울 수 없었다.

속리산 필드 사냥.

주말에 도재현이 자신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었지만, 신규 클랜원 모집 프로젝트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냥.

문가은이 갔던 사냥은 예상대로, 도재현과의 파티사냥이었던 모양이다.

강주연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갔다.

“주, 주연아. 내 말 좀 들어봐. 사실 둘이 간 게 아니라, 성나연 홀더가 같이…”

문가은이 다급히 설명하려 했지만, 강주연은 더 듣지 않았다.

도재현과 단둘이 사냥.

이미 김채은이 한번 태웠던 내용에, 문가은이 또다시 불을 지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점화였다.

…사실 딱히 문제 될 건 아니긴 했다.

강주연 자신에게도 왔던 제안이었고, 그녀는 프로젝트로 시간이 안 돼 오히려 거절했었으니까.

도재현은 친한 이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고, 그중 시간이 됐던 게 문가은이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임시 파티와 파티사냥.

그게 전부일 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꽤 상쾌했던 하루가 금세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이어진 상황이 지금.

써클룸 안에서 도재현과 마주한 침묵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도재현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화났어?”

“…아니.”

“화난 거 맞는 것 같은데.”

“아닌데.”

자꾸 유치한 대답이 앞서갔다.

사실 화낼 일도 아니고, 서운할 일도 아닌데…

정의 내리기 힘든, 서툰 감정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틱틱 대는 말들이 나왔다.

강주연을 아는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눈과 귀를 의심하며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 원래 다 같이 사냥 가려고 했었는데, 다들 약속이 있었거든. 너도 클랜 프로젝트 있어서 못 온다고 했었고….”

“…….”

그 프로젝트, 갖다 치워 버릴걸.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규 클랜원을 심사하는 중요 프로젝트였고, 거기서 윤지아를 마주하며 자극받아 성장에 대한 원동력을 얻긴 했지만…

도재현과 단둘이 가는 사냥일 줄 알았다면.

그냥 불참할 걸 그랬다.

“그러니까… 다음에 날 잡아서 같이 사냥 가자. 어때? 서로 시간 맞춰서, 안 가본 사냥터로. 생각해 보니까 우리 호흡 안 맞춰본 지도 오래된 것 같아.”

하지만 도재현은 웃으며 새 제안을 꺼냈다.

강주연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법한…

최대한 돌려서 말하는 제안이었다.

그 밝은 얼굴에 강주연은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떼를 쓴 것 같아서.

아닌 척해도 괜히 티를 낸 것 같아서.

그리고 한편으론 심장이 뛰었다.

써클룸 회의실에 단둘이 있는 상황.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도재현.

조금은 부럽다 느꼈던 그 상황에,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놓여 있었다.

“…응.”

서운했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게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자꾸만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파도 속.

강주연이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것 뿐이었다.

* * *

‘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주연의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나름 잘 해결한 것 같다.

아마 자기를 빼놓고 사냥을 간 것.

그거에 화난 게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억울하다.

클랜 프로젝트 때문에 못 간다고 했잖아.

난 분명 같이 가자고 했다고….

“오우, 도재현. 좋은 저녁.”

어쨌든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 있을 회의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써클룸이 부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껏 기분 좋아보이는 박진우의 인사가 날 반겼다.

써클 첫 모임이 있던 저번 주 금요일.

많은 일이 있었던 그 날 이후.

다시 부원들이 모이는, 첫 써클 회의였다.

북적이는 부원들 사이.

나는 회의실 중앙으로 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주엔 월요일이 연휴였던 탓에, 부득이하게 화요일에 모임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회의는 계획했던 대로, 매주 월요일 저녁이 될 예정입니다.”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우리 써클이 갖게 될 정기적인 모임의 시각이다.

<안티 빌런> 써클은 다른 동아리 개념의 써클들과 달리, 자유도가 많이 보장되는 써클은 아니다.

써클 활동도 꽤 바쁠 거고, 부원으로서 할 일도 많다.

애초에 창설할 때부터 그렇게 계획했다.

‘<빌런> 클랜에 대항하고, 내부 스파이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라는 하나의 대목표가 있는 만큼, 더 진중하게 접근해야 했고 부원으로서 나름의 책임감도 필요했다.

‘많이들 왔네.’

다행히 다들 그러한 슬로건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부원들 대부분이 회의에 참석하며 자리를 빛냈다.

아까부터 같이 있던 강주연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김채은,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강주연을 힐끗거리는 문가은….

가만히 앉은 채 내게 시선을 집중한 윤지아, 웬 초코바 하나를 먹고 있는 박진우, 비장한 얼굴의 이현호,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게 무표정한 지윤재까지.

써클 내 주요 인물들이 속속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안 보이는 얼굴도 있었다.

“구명훈 선배님은… 안 오셨네요?”

첫 모임 때, 내가 써클 회장을 맡는 것에 반발했던 부원.

2학년 전사 계열의 구명훈.

그 얄미운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그날 박진우에게 정신없이 털리고 도망치듯이 연무장을 빠져나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회의도 미참석이었다.

“연락이 잘 안 되던데. 일이 있나 봐.”

회의실 한편의 2학년 부원 중.

그나마 구명훈과 친분이 있는 한 홀더가 말했다.

일이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사실 쪽팔려서 못 온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유야 어쨌든 다행이었다.

물을 흐리는 부원이 회의에 참석하는 건, 써클 입장에서도 썩 좋지만은 않으니까.

문제가 된 부원이 자발적으로 안 나와주면 우리도 땡큐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첫 회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로 포인터를 들어 PT를 시작했다.

빔 프로젝터로 연결된 커다란 화면.

그 중앙에 내가 미리 준비한 내용이 나왔다.

“우선, 우리 써클의 대목표에 관한 주제입니다.”

띠딕-

슬라이드를 넘기자,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다.

1학년 전사 계열 차석이었던 안도권.

마찬가지로 1학년 전사 계열의 김도윤.

한때 아카데미 내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빌런> 측의 내부 스파이 두 명이었다.

“불의 심판 클랜과 로열 클랜이 전폭적인 지원을 선언하면서, 우리 써클이 활동할 수 있는 폭이 상당히 넓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여전히 아카데미 내에서 활동하는 ‘써클’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시작부터 빌런의 중심을 파고든다는 건 약간은 허황된 생각이죠.”

나는 포인터로 두 스파이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번 학기의 목표로 삼은 건, 우선 아카데미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부터 찾아내자는 겁니다. 이미 두 명의 내부 스파이가 밝혀졌고,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빌런 측 클랜원들이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때문에 안티 빌런의 첫 번째 대목표는, 아카데미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들을 찾아내고, 그 물증을 확보하는 겁니다.”

부원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여기까진 다들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들도 처음부터 이런 내용을 생각하며 가입했을 거고, 그중 스파이를 찾아내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목표니까.

문제는 어떻게.

어떻게 그들을 찾아낼까가 관건이었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으로 꾸준히 논의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만, 이제부터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자는 건… 너무 막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부원 여러분께, 제가 이 써클을 기획할 때 생각했던 방법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말에 부원들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획기적인 방법이 있을까?

대부분이 그런 생각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

딱 한 명.

지윤재만 빼고.

다른 부원들과 달리.

그의 눈빛은 살짝 불안한 기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워낙 무표정으로 가리고 있어서…

그리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새끼, 쫄기는.’

그걸 보며 웃음을 머금은 나는,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