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골목 안.
웬 홀더 한 명이 불꽃을 일으키며 주변 남자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죽어, 죽어!”
“끄흡- 살려주, 끄으악…!!”
커다란 대검과 뜨거운 불꽃.
두 재능을 동시에 사용하는 멀티 홀더.
그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인정받는 유능한 2학년.
구명훈이었다.
구명훈은 살려달라는 주변 남자들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그들을 베어나갔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아웃홀더.
사회를 저버리고 나온 갱생 불가의 홀더들.
심지어 <빌런>의 끄나풀이라는 소식까지 접수된 쓰레기들이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함에 있어, 손속에 인정을 둘 필요는 없었다.
슥- 스스스-
“끄아아악…!!”
대략 여섯, 일곱?
근처에 있는 아웃홀더를 모두 베어내고, 녀석들의 비명도 잦아질 때쯤.
골목 안을 뒤덮던 칼부림이 드디어 행진을 멈췄다.
“헉, 허억….”
구명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사방이 피투성이가 된 주변.
온갖 자상을 입은 채 너부러진 아웃홀더들.
누구 하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구명훈은 상대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불꽃과 검을 동시에 활용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들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했을 게 분명했다.
살인.
구명훈은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는, 그러한 충격적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짝짝짝-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구명훈의 시뻘건 눈동자가 움직여 그곳을 바라봤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심연처럼 어두운 눈동자.
다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롱코트로 분위기를 더하지만… 무언가 결핍된 것 같은 공허한 기색.
마검의 소유자, 황성연.
그리고 옆에선 극도의 저자세로 그를 보좌 중인 지윤재가 함께 있었다.
“재밌군. 재밌는 숙련도야. 어때, 불편하진 않았나?”
황성연은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구명훈을 봤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검은색 대검.
황성연이 보유한 역대 최악의 마검, [티르빙] 급은 아니지만… 그 열화판 정도는 될 법한 특수 마검.
그를 사용하는 데에 불편함은 없었는지 물었다.
구명훈은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손에 든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전혀. 상대하는 새끼들이 적당히 약해야지, 너무 약해 빠져서.”
“그건 미안하게 됐군. 우리도 일단 네가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지부터 확인했어야 해서 말이지.”
황성연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후.
이내 코트 주머니 안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구명훈에게 건넸다.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정체불명의 약물.
이미 구명훈이 한 번 마셔본 적이 있는 포션이었다.
“마셔라. 전에 줬던 포션의 잔여분이다. 아마 검을 다루기 더 편해질 거다.”
“필요 없다.”
“역시 재밌군. 그래도 너무 빼진 말고 마셔라. 스파이를 처치하려면, 더 강한 힘을 빌려야지.”
“스파이… 도재현….”
그 이름을 되새긴 구명훈의 눈빛이…
다시 한번 분노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도재현.
스파이를 잡겠답시고 <안티 빌런>이라는 같잖은 써클을 만들었지만, 실은 녀석은 스스로가 <빌런> 측 스파이였다.
아카데미 내부에 본격적인 단체를 만들며 대외적으로 신뢰를 쌓았는데, 그 안에서는 오히려 <빌런>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지고 있던 것이다.
처음 지윤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구명훈은 반신반의했었다.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무맹랑하고 논리적인 결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래, 도재현을 잡아야지.”
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력이 약해지고, 분노로 판단력이 흐려진 지금은…
오히려 확신하고 있었다.
도재현은 <빌런>의 스파이.
그 친구인 박진우도 스파이.
자신의 우상이자 워너비였던 윤지아 선배는, 그 쓰레기의 꼬임에 넘어가 함께 써클을 창립해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구명훈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박진우와의 대결에서 진 것도, <빌런> 측에서 비겁한 수를 썼기 때문이었다.
윤지아를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걸림돌을 치워 버리기 위해, 녀석들이 미리 손을 쓴 것이다.
때문에 그는 더욱 강해져야 했다.
더러운 놈들의 손아귀에서, 윤지아를 구하기 위해.
실은 <빌런>의 스파이면서, 외려 <빌런>을 잡겠다고 기만하는 녀석들을 처치하기 위해.
꿀꺽- 꿀꺽-
구명훈은 황성연이 건넨 포션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 치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걸 보던 황성연은 입을 열었다.
“지윤재.”
“예, 부… 팀장님.”
순간 자기도 모르게 ‘부마스터’라는 호칭이 튀어나올 뻔한 지윤재는, 다급히 팀장님으로 호칭을 바꾸며 답했다.
이미 일정 부분의 세뇌가 끝나고, 열화판 마검에 잡아먹혀 가는 구명훈이지만… 항상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일본으로 가라.”
“일본… 말입니까.”
“그래. 거기서 저 친구의 숙련도도 마무리로 체크하고…”
골목 안을 바라보던 황성연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타깃들도 처치할 수 있도록 해라. 이수연이 미리 가 있을 거다.”
“이수연…?”
“아, 넌 차수연이란 이름이 익숙한가. 어쨌든 그녀와 함께 빌런… 훗, 그래. 빌런을 처치해라.”
“예, 알겠습니다.”
명령이 하달되고, 황성연은 이내 모습을 감췄다.
지윤재와 구명훈만이 남은 골목.
피 냄새가 여전히 진동하는 밤이었다.
* * *
주말이 찾아왔다.
이번 주말엔 <안티 빌런> 써클의 첫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직접 일본으로 찾아가, <불의 심판>과 무역을 진행하는 쪽에서 불법 아이템 밀수를 조사하는 것.
<불의 심판> 측에서도 파견 인원이 나오는, 일종의 대형 협업 프로젝트.
그 인원을 추리는 데엔 꽤 애를 먹었다.
써클 활동의 첫 발걸음인 만큼 많은 부원이 이번 조사에 참여하기를 원했는데, 생각보다 조사에 그렇게 많은 부원이 필요치는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간신히 추리고 추린 게 4명이다.
일단 회장인 나와 부회장인 윤지아.
우리 둘은 써클 운영의 핵심이기에 조사의 앞선에서 진두지휘할 필요가 있었다.
윤지아가 최근 <불의 심판> 입단 면접으로 꽤 바빠 못갈 줄 알았지만, 다행히 이번 주는 일정이 비어있어서 조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세 번째가 강주연.
그녀는 우리 써클과 <불의 심판>을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고, 이번 조사에 있어서도 그녀만큼 관련 내용을 잘 아는 부원은 없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됐다.
애초에 이 방법 자체를 처음에 논의했던 게 그녀와의 대화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선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오우. 일본 여행이라니, 두근두근 하는구만.”
“제발, 좀… 여행이 아니고 조사라고.”
“2박 3일이면 조사 겸 여행이지, 하하.”
들뜬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박진우.
녀석이 네 번째 선별 인원이다.
사실 원래는 강주연까지 세 명만으로 빠르게 갔다 오려고 했었는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녀석을 추가했다.
만에 하나라도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앞선에서 싸워줄 전사 계열이 필요하니까.
특히 박진우는 원작에서의 주인공이다.
놀라운 성장 속도로 새로운 능력을 깨우치며, 밑바닥부터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성장형 홀더.
그런 그에게 새로 견문을 넓히는 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일어날 기연을 기대한 합류이기도 했다.
이미 메인스트림에 끼어들며 주요 인물들과 동료가 된 나로서는, 내 성장 못지않게 박진우의 성장 또한 중요했다.
“회장. 다 왔으면 출발할까요?”
준비를 마친 윤지아가 옆에서 물어왔다.
우리는 지금 인천에 자리한 ‘국제 이동 워프 게이트’에 와 있었다.
[워프 게이트]가 세계적으로 활성화된 후 각국끼리의 교통 또한 훨씬 편리해졌는데, 재밌게도 [워프 게이트]가 설립되는 위치는 여전히 국제공항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이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를 수용할 만한 장소로 국제공항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홀더들이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다시 [워프 게이트]를 통해 각국 중심지로 이동할 수 있기에, 홀더 협회에서는 이렇듯 인천 국제공항에 ‘국제 이동 워프 게이트’를 설립했었다.
덕분에 공항 안은 비행기를 타려는 일반인들과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려는 홀더들로 붐볐다.
나는 그 인파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불의 심판 클랜원들도 올 거예요.”
“불의 심판이요?”
“네. 그쪽에서 오는 파견 인원이랑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나는 고개를 돌려 강주연에게 물었다.
“어디쯤이라고 연락 왔어?”
“…3분 정도. 장비점검 때문에 늦는대.”
“오케이.”
어차피 <불의 심판> 인원들이 있어야 정확한 조사가 가능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잡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확히 3분.
강주연이 말한 시간이 지나자, 범상치 않은 홀더 무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수준이 높아 보이는 마력 갈무리와 특색 있는 외양.
그리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굉장히 익숙한…
한동안 오래 봤었던 얼굴들.
“오랜만이다, 도재현.”
“도재현, 안녕!”
“흐응~ 인턴 씨가 회장 씨가 됐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 조사의 파견팀 팀장을 맡은, 불의 심판 선임클랜원 권오준입니다.”
내 인턴 생활 때의 동료들.
<불의 심판> 내 사냥 5팀 멤버들이, 이번 파견을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