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바 미유를 처음 보고 놀란 건, 그녀 또한 한국어에 능숙하다는 것이었다.
‘이 클랜은 한국어가 기본인가?’
클랜의 방향이 무역과 상업에 집중돼서 그런 걸까?
시미즈도 그렇고, 아키바도 그렇고…
다들 한국인 수준의 국어 솜씨를 선보였다.
게다가 일본 선사에나 있을 법한 무녀가, <남자의 조건>이라는 클랜의 소속 홀더라니.
아무리 초창기에 만든 클랜 이름이라곤 해도 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반갑습니다. 서울 홀더 아카데미 소속 도재현이라고 합니다.”
“불의 심판의 권오준입니다.”
우리가 마주 인사를 하자, 아키바는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짧은 인사만으로 예의를 중시하는 그녀의 규칙이 느껴졌다.
“시미즈 님께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미허가 워프 게이트를 찾고 계신다는.”
“예. 정확히는 한국으로 불법 아이템을 밀수하는 홀더들, 그리고 그 연결고리와 유입 경로를 조사 중입니다.”
아키바는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돌려 시미즈를 봤다.
‘이 대화를 제가 주도해도 괜찮나요?’
그렇게 물어보는 듯한, 암묵적 질문.
시미즈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밀수와 관련된 단서들이 나오고 그를 담당하고 있는 또 다른 클랜원이 나온 순간부터, 클랜 소개를 맡던 시미즈의 역할은 사실상 마무리를 지은 것이었다.
“그럼 잠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재현님과 한국 홀더분들께 앞으로의 탐색 계획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우리는 금세 자리를 옮겨 9층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은 깔끔하면서도 준비가 마쳐져 있었다.
빔프로젝터와 커다란 송출 화면, 책상에 놓인 수많은 관련 자료들…
그리고 그 옆 칠판엔 웬 낙서들이 적혀있다.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한 듯한 글들.
온갖 치열한 흔적들이, 회의실 곳곳에서 시야를 자극했다.
이건 마치…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만든 자리 같네.’
단순히 우리 조사팀을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니다.
이미 이전에, 누군가 설득하려고 준비한 듯한 자료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대상은.
<남자의 조건> 클랜의 수뇌부.
아키바와 밀수 담당팀은, 우리가 오기 훨씬 전부터 ‘미허가 워프 게이트’ 탐색에 대한 계획을 세워둔 모양이었다.
그를 토대로 본격적인 탐색을 나서려 했을 거고, 그때마다 번번이 계획이 무산됐겠지.
‘전투 클랜원이 부족하니까.’
<남자의 조건> 클랜은 상업과 무역에 집중하는 클랜이다.
상대적으로 전투를 담당하는 클랜원, 홀더들의 숫자가 부족하다.
무역의 특성상 물건을 지키고 보존하는 게 1순위이기에 보유한 홀더들의 무력이 절대 약하진 않겠지만…
그 인원이 호위팀에만 쏠려 있는 게 문제였다.
강하고 경험 있는 전투계열 홀더들은 모조리 거래 품목 호위팀으로 빠져 버리니, 정식으로 사냥을 나서거나 작전에 파견될 홀더들이 부족했다.
‘전문 사냥팀도 없는 것 같고.’
특히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던전의 공략엔, 고위 홀더로 구성된 전문 사냥팀이 필수적이다.
수준이 올라갈수록 역할 분담도 세분화하고, 체계적이어야 던전 공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시미즈의 클랜 소개와 클랜 타워 구경만으로도, <남자의 조건> 클랜 내엔 전문 사냥팀이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희 팀에서 미허가 워프 게이트 의심장소로 선정한 후, 관련 자료를 수집한 최종 지점은 총 11개입니다.”
아키바가 다시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빔프로젝터로 비친 PPT엔 아까 시미즈가 보여준 지도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동그라미가 쳐진 나고야시의 내부 지도.
역시 예상대로 밀수 담당팀의 조사지점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중 결계 밖 필드가 4개, 던전이 6개, 일반 지역이 1개입니다. 부끄럽게도 저희 팀은 전력 부족의 문제로 일반 지역 1개 조사에 전력을 쏟고 있었고,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추가로 그 외엔 … … ”
아키바의 꼼꼼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각 지점의 위치와 특징, 주의사항…
전투가 일어난다면 마주하게 될 괴수들의 간략한 정보 등.
집중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팀원들과도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최종 의견은 하나로 이어졌다.
“결국 전부 확인을 하긴 해야겠네요.”
일반 지역 한 군데를 제외하면, 남은 전투 지역은 모두 조사가 필요하다.
1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의 결론이었다.
그 말에 아키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죠.”
“네.”
우리가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진 않다.
주말을 활용해 특별 파견을 온 거고, 평일엔 또 각자의 일정이 있기에 이틀간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게 베스트였다.
그러나 그 시간 안에 10개의 조사지점을 모두 확인하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그래도 움직입시다. 마냥 앉아만 있을 순 없으니까요. 첫 조사지점은 아쓰타 신구에 있는 던전, 음습한 요괴 소굴로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시간이 없는 만큼, 오히려 판단엔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이견 조율이나 추가 제안 없이 곧바로 결단을 내린 내 모습에, 아키바가 잠시 놀란 얼굴로 날 봤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기만 하던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고결한 무녀의 모습을 보이며, 정중하게 내 말을 받았다.
“네. 협조하겠습니다.”
* * *
여독을 푸는 건 회의실에서 잠시 앉아있던 것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남자의 조건> 측의 협력 동의를 얻은 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총 10명으로 구성된 임시 파티.
<불의 심판> 측에선 권오준, 김성철, 최동욱, 이수미, 신유나의 5명.
우리 <안티 빌런>에선 나와 박진우, 윤지아, 강주연의 4명.
<남자의 조건>에선 아키바 미유 혼자만이 협력 파티원으로 편입됐다.
“오우. 초호화 멤버구만.”
옆자리에서 걷던 박진우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파티 멤버는 꽤 호화로웠다.
파티원 중 어느 한 명도 무력으로 부족한 이가 없었다.
심지어 아키바마저 궁수 계열의 B급 홀더.
이로써 각 전투계열에 필수 인원이 모두 존재하고, 한 명은 A급, 나머지 9명은 B급 홀더인 고위 임시 파티가 결성됐다.
…아니, 박진우는 아직 등록상 C급이긴 하지만.
“파견 인원 전원이 B급 이상… 한국의 홀더 분들은 대단하군요.”
아키바가 새삼 신기한지 멍하니 말했다.
마땅한 파티원이 없어 현장 조사를 갈 수 없었던 그녀로서는 이런 멤버들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좀 중요해서요. 저희도 항상 고급 인력만 나오진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던 중.
우리는 금세 아쓰타 신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본의 3대 신궁 중 하나라고 불리는 거대 신사.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방대한 규모와 넓이를 자랑했다.
방문객 역시 홀더보단 일반인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우리는 잠시 그 인파를 구경하다가, 이내 바로 조사지점의 던전인 ‘음습한 요괴 소굴’로 향했다.
소유 클랜으로부터 미리 허가를 받아놓은 입장이었다.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의 음습한 기운과 무거운 공기로 인해 홀더의 속력이 약간 저하합니다.]
던전 내부는 의외로 한산했다.
오늘 유독 던전 공략을 온 홀더들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던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미허가 워프 게이트’.
이를 찾는 우리로서는 적당히 홀더가 없는 게 좋았다.
“권 팀장님.”
나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권오준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파티의 유일한 A급 홀더.
경험도 많고 실력도 월등한 그가, 당연히 파티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하지만 권오준은 고개를 저었다.
“파티장은 네가 맡아라.”
“예? 제가 말입니까?”
“그래. 이 파견은 어디까지나 불의 심판과 안티 빌런의 협업 프로젝트고, 그 총괄 책임자는 너다. 작전을 주도한 만큼, 파티도 한 번 이끌어 봐.”
…나보고 파티장을 하라고?
그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지만, 나름 진지한 권오준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전투 지휘는 권 팀장님이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정말 위기 상황일 때만. 나머지는 네가 하는 게 나을 거다. 어차피 우리 목적은 수색이지, 사냥이 아니니까.”
맞는 말이었다.
사실 괴수 사냥을 하러 오는 거였으면, <불의 심판>의 귀한 인력들이 여기 일본까지 건너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뱀이 뒤덮은 숲 보스 공략 땐 잘만 하던데, 뭐.”
“그건 특수 상황이었잖습니까….”
푸념하듯 말하자, 권오준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 양반, 작전 총괄이니 뭐니 하는 건 핑계고, 그냥 귀찮아서 떠넘기고 싶은 거 아니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사실 이런 걸 고민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우리에겐 아직 9개의 조사지점이 더 남아있었다.
“그럼 작전 지시하겠습니다. 우선 파티를 두 개의 팀으로 나누겠습니다. A팀은 왼쪽 갈래 길로, B팀은 오른쪽 갈래 길로 갑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