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강력한 룬을 활용한 것도 아니다.
보유한 몇몇 속성룬들은 마력의 배열 자체에 시간이 걸리고, [폭발하는 검의 기세] 같은 경우 이런 다대일 전투에서 적합하지 않아 오히려 후방지원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검법 룬인 [파상검법]과 [유수검법], 그리고 여타 신체강화류의 보조룬들만 활용했을 뿐이었다.
쿠어어어….
그런데도 녀석들은 검격 몇 번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붉은 외눈도깨비는 근력과 내구가 비약적으로 높은 대신, 움직임이 둔하고 마력 공격에 약한 괴수.
갑자기 구도가 유리해진 지금 상황에서, 더욱 몰아칠 필요가 있었다.
‘무구 교체술.’
무기를 바꿔 [클로우 숏소드]를 꺼내 들었다.
며칠 전 최유민이 건네줬던 제작 장비.
그중 소검을 활용해 전투 방향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전장으로 파고 들어올 땐 장검이 유리하지만, 안에서의 난전은 소검이 유리하다.
꾸준한 성장으로 5레벨에 다다른 [매화검법]과 이제는 8레벨까지 올라온 [날렵한 몸놀림].
두 룬을 동시에 활용하면, 다수의 괴수 사이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을 것이었다.
쿠, 어어어-!!
쿠우우-!!
“크읍…?!”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잠시 괴로워하던 붉은 외눈도깨비들은, 금세 활력을 되찾으며 내 공격을 받아쳤다.
[클로우 숏소드]로 펼쳐낸 [매화검법]의 활용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원래 녀석들의 강점인 내구와 방어력.
그 철벽처럼 단단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씨발. 뭐지?’
아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통했던 공격이 이번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격노한 도깨비들이 커다란 방망이를 휘둘러왔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 공격들을 피해냈다.
쿠어어어-!!
콰아앙!!
엄청난 괴력에 순식간에 움푹 파이는 땅.
도깨비들의 방망이질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안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가 흘러나오고, 주변이 산화되어 갔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았다.
‘무식하게 힘만 센 게 아니구나.’
전에 경험한 적 있던 [부식성 가루]처럼 혹은 내 [간단한 저주] 룬으로 활용 가능한 ‘부식’ 저주처럼, 도깨비의 방망이에도 사물을 부식시키는 특별한 힘이 담겨있었다.
그게 단순히 방망이 자체의 효과인지, 도깨비가 지닌 룬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공격을 무작정 받아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박진우! 방망이 조심!”
“알아!”
다행히 박진우도 이상 현상을 눈치채고, 무기 간의 직접 접촉은 피하고 있었다.
녀석도 이제 경험이 꽤 쌓인 탓에, 이런 변수 정도는 유연하게 대처할 힘이 있었다.
화륵- 화르르-!
쿠, 어…?
그리고 방망이를 회수한 도깨비들이 다시 다가오려는 찰나.
타이밍에 맞춰,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덮쳤다.
주변이 불길로 덮쳐지고, 마력이 가득 담긴 불구덩이 몇 개가 날아와 도깨비들을 급습했다.
숫자는 둘.
두 마리의 도깨비가 불구덩이를 정통으로 맞고, 순식간에 빈사 상태가 됐다.
고개를 돌리니, 스태프를 들고 있는 강주연이 보였다.
‘나이스, 강주연.’
기다렸던 후방 지원의 결과물이다.
아무래도 윤지아는 박진우 쪽의 화력 지원을 맡고, 강주연은 내 쪽을 도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전투 구도가 훨씬 편해졌다.
나는 무구교체술로 다시 [참회자의 검]을 꺼냈다.
5:1의 전투 구도에선 소검을 들었던 건, 가벼운 무게와 빠른 속력을 활용해 난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강주연의 지원으로 3:1이 된 지금 상황에선, 장검을 쓰는 게 공격력 측면에서 더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클로우 숏소드 땐 안 먹히고, 참회자의 검 땐 먹혔어.’
처음에 [참회자의 검]을 들고 괴수들 틈으로 들어왔을 땐 공격이 먹혔지만, [클로우 숏소드]로 난전을 펼칠 땐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재개된 지금.
나는 전자의 공격이 먹힌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아이템 정보>
◎이름: 참회자의 검
…
…
◎특수효과
: 저주받은 형태의 상대와 전투할 때 50%의 추가 성능을 낼 수 있다. 보유자의 신성 수치가 높을수록, 검의 위력이 올라간다.
[참회자의 검] 특수효과.
저주받은 형태의 상대와 전투할 때 성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것.
이 검을 얻은 후로 한 번도 그런 형태의 괴수를 상대해 본 적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번 던전에서 ‘요괴’라는 저주받은 괴수들과 싸우며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붉은 외눈도깨비는 이 특수효과를 적용받는 ‘저주받은 형태의 괴수’였던 것이다.
특히 녀석의 무기인 방망이에서, 일종의 저주 효과 ‘부식’ 상태 이상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이를 더 확신하게 됐다.
신성력에 약점을 보이는 괴수들에게 있어, [참회자의 검]은 최악의 상성을 지닌 무기였다.
‘거기에 룬 효과.’
<룬 정보>
◎이름: 야만왕의 후예
…
…
◎특수효과
: 무리를 정복하고자 하는 맹수의 법칙이 상시 적용된다. 최소 셋 이상 다수의 적과 홀로 전투할 때, 특정 능력치(근력, 속력, 내구)들이 20%(Lv.4)만큼 상승한다. 전투가 마무리되거나, 조건이 미충족될 경우 능력치는 곧장 돌아온다.
내 능력치는 다수의 적과 싸우면 극도로 상승한다.
[야만왕의 후예] 특수효과로 능력치가 올라가고, 거기서 벌어진 능력치 차이로 발동되는 [위압]의 특수효과.
일전에 ‘얼룩진 암석 더미’에서 한 번 경험한 바 있는, 일시적 능력치 펌핑 콤보였다.
이런 효과들과 무기의 사기성이 더해지니, 고작해야 B급 괴수인 도깨비들이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붉은 외눈도깨비의 압도적인 내구 수치와 방어력.
이걸 내 물리 공격만으로 뚫어냈던 것이다.
“흐읍…!!”
이에 나는 확신을 갖고 검을 휘둘렀다.
전투 대상이 3마리 아래로 내려가면 ‘맹수의 법칙’ 효과가 적용되지 않기에, 이번 한 번의 공격에 녀석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게 베스트다.
펌핑된 능력치로 인해…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렬해진 공격.
여기에 아껴뒀던 [폭발하는 검의 기세] 룬까지 활용한다.
스킬을 쓰지 않는 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이었다.
콰, 콰아앙-!!
콰가가가-!!
쿠어어…?!
쉴 틈 없이 괴수들을 베어내고, 그에 맞춰 귀를 때릴 듯한 폭발음이 들려온다.
검 끝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도깨비들의 비명으로부터, 이번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진입할 때보다 훨씬 정교해진 공격이었다.
쿠, 쿠어어….
육중한 도깨비들의 몸이 맥없이 무너진다.
강주연의 마력 공격으로 두 마리, 방금 내 공격으로 세 마리.
내 쪽에서 맡은 총 5마리의 도깨비들이 기어코 모두 쓰러졌다.
전투가 시작된 후.
불과 5분도 안 돼 일어난 결과였다.
“벌써 끝냈어? 젠장. 세상 불공평하네.”
옆쪽에서 고군분투하던 박진우가, 우리 쪽 결과를 보고 소리쳤다.
녀석 쪽도 전투 경과는 괜찮았다.
윤지아의 마력 공격으로 두 마리의 도깨비를 쓰러뜨리고, 남은 두 마리를 박진우가 상대하는 상황.
아마 박진우도 전력을 쏟으면 혼자서 도깨비들을 사냥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의 수색과 전투를 위해 힘을 아끼는 느낌이 들었다.
“잘만 싸우면서 엄살은.”
“한 방 맞으면 골로 가는데, 이게 엄살이냐?”
“안 맞으면 되잖아.”
“미친, 말이 쉽지.”
투덜거리는 박진우에게 핀잔을 주며, 나는 전투에 끼어들어 도깨비들을 처치했다.
이미 9마리 중 7마리를 사냥한 여유로운 상황.
남은 두 마리를 합심해 잡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쿠, 쿠어어….
붉은 외눈도깨비가 모두 쓰러지고, 그대로 전투가 종료됐다.
순간 눈앞에 밀려드는 정보창을 잠시 뒤로 한 채.
나는 아키바에게 먼저 다가갔다.
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황을 보니 그녀 역시 [마력 추적]을 끝마친 것 같았다.
“아키바 씨.”
“아, 재현님.”
“뭔가 좀 나온 게 있나요?”
아키바는 내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초입부엔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마력 현상이 뒤섞여 잠시 혼동이 오긴 했지만, 적어도 전이 현상을 일으킬 만한 마력 응집 장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미허가 워프 게이트’로 느껴질 만한 지점은 없는 것 같다.
아키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쉽긴 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었다.
수색은 이제 막 시작 단계니까.
“그럼 마력석만 챙기고 바로 이동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잠깐 장비를 점검한 후.
짐을 챙겨 다시 앞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진우가 내 옆으로 다가와 팔꿈치를 툭 쳤다.
“야야.”
“왜, 또.”
“너 그냥 강주연이랑 같이 다니면 되지 않냐?”
“뭐?”
이 새낀 또 갑자기 뭔 소리야?
고개를 돌리자 박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 어차피 둘이서 다 잡는데 뭐하러 다 같이 다니냐. 솔직히 말해서 지금 파티 가성비 별로잖아.”
“그게 뭔….”
곧바로 반박하려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리가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을 포함해 주말까지 총 3일.
그 시간 안에 11개의 의심지점을 모두 조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다음 주에 다시 탐색을 오는 방법도 있지만, <불의 심판>과의 일정을 조율해야 하고 또 그사이 범죄자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도 없었다.
반드시 이번 주말에 모든 탐색을 마쳐야 가능성이 있다는 뜻.
“…….”
이런 상황 속에서 파티를 분산해 조사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애초에 10명의 팀을 A팀과 B팀으로 분산한 것부터 효율적으로 던전 내부를 조사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리고 전력상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안에서 더 세분화시켜 파티를 나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실제로 방금 전투를 통해, 어지간한 괴수들은 강주연과 나 둘만으로도 사냥 가능하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참회자의 검]만 있다면, 요괴를 상대함에 있어 난 거칠 게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박진우를 바라봤다.
“너 뭐야.”
“뭐가.”
“진짜 박진우 맞아?”
“오우… 또 뭔 개소릴까.”
정말 오랜만에 듣는, 박진우답지 않게 날카로운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