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 그….”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혼탕에서 갑작스레 마주친 강주연.
그녀를 보고 난 후, 내 동공이 갈 길을 잃었다.
커다란 타월로 각자 몸을 가리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온천 복장이다.
난 상체가 전부 다 보였고, 강주연은 굴곡지고 슬림한 몸매가 눈에 확 띄었다.
첨벙첨벙-
민망함에 시선을 돌리던 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뭔가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그… 나, 나는 다 씻었거든?”
…그러니까 너 혼자 쓸래?
그런 의미를 내포한 질문.
어째서인지 평소처럼 깔끔하고 명확하게 의사 표현이 되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선은 여전히 강주연을 보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있었고, 정말 혹시나 타월이 내려갈까 필사적으로 허리춤을 붙잡고 있었다.
‘…병신인가?’
그야말로 나답지 않은 모습.
이 멍청이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진다.
스스로가 극한으로 당황한 게 말과 행동에서 느껴졌다.
아마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강주…”
“…괜찮아.”
“어?”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그녀를 부르려던 찰나.
강주연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터벅터벅-
천천히 탕 쪽으로 다가오는 그녀.
허공에 시선이 향해 있어 보이진 않지만, 소리만으로도 이쪽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첨벙-
“헙-.”
기어코 탕 안에 발을 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도 모르게 숨을 잠깐 들이켰다.
강주연의 기척이 지척까지 느껴지고, 탕의 온기가 자꾸만 몸 곳곳을 찔러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강주연이 말을 꺼냈다.
“…괜찮아.”
아니, 미친.
뭐가 계속 괜찮다는 거예요, 선생님.
목적어가 없는 말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강주연은 말을 덧붙이며 오해를 풀었다.
“…어차피 금방 갈 거니까. 그리고 내일, 조사 갈 곳 얘기해야 하기도하고….”
“아.”
납득이 가는 말에 금세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긴 하지.
내일 강주연과 함께 팀을 이뤄서 조사를 나서야 하니까 그에 관해 얘기할 시간도 필요하고, 또 같이 사용하라고 만든 혼탕에서 굳이 자리를 비켜야 할 필요도 없기도 하고, 또…
첨벙- 첨벙-
머릿속이 잔뜩 복잡해지던 순간.
강주연이 물소리를 내며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나도 긴장이 풀렸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대체.’
사실 좀 부끄럽긴 해도, 뭔가 큰일이 일어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냥 같이 혼탕을 이용하고,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나가면 될 일이었다.
나는 혼자 속으로 생쇼를 했던 것에 머쓱함을 느끼며, 강주연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첨벙-
“내일 어디부터 갈지는 생각해봤어?”
“…어, 어?”
그런데 이번엔 강주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
어색하게 내 눈을 피하는 강주연을 보고 더 캐물으려고 했지만, 순간 물속에 담근 그녀의 몸에 시선이 닿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아까부터 자꾸 머리가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가 시야를 가득 채우니, 뇌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게다가 강주연은 예쁘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예쁘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기 많은 홀더 중 한 명이고, 1학년에서도 김채은, 문가은과 더불어 세 손가락에 드는 미녀다.
아무리 꽤 친해졌다곤 해도, 그런 여자와 같이 혼탕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민망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흠, 흠. 아무튼 내일 어디부터 조사 시작할지 미리 정해두자. 우린 나고야 서부에서도 남쪽 위주로 맡기로 했으니까, 나고야항 수족관 쪽부터 가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괜찮아.”
…또, 또.
뭐든 괜찮기만 하다네.
그래도 어쨌든 일 얘기를 시작하니 훨씬 나았다.
꾸준히 민망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강주연과 나는 같은 바위에 몸을 기대앉은 채,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어느 지점부터 시작해 어느 경로로 갈지, 수색할 땐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할지, 전투 구도에선 베이스를 어떻게 잡을지 등…
처음엔 물꼬를 트려고 꺼냈던 말들인데,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그렇게 20분쯤 이야기를 나눴을까.
우리는 내일 있을 조사의 방향을 완전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럼… 내일 조식 먹고, 8시에 바로 나고야항 수족관으로 출발하는 걸로?”
“…응.”
“오케이.”
일 얘기가 끝났다.
또다시 찾아온 정적.
그래도 이번엔 꽤 자연스러운 정적이다.
아까처럼 민망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탕 안은 아늑하고 온도 또한 적절해서, 금방 나갈 거라고 말했던 얘기들도 금세 까먹어버렸다.
첨벙- 첨벙-
강주연이 손을 움직여 또 한 번 물소리를 냈다.
그에 나도 손을 써 물소리를 따라 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자연스럽게 겹치고…
장난기가 밴 우리의 눈도 서로 마주쳤다.
“푸흐-.”
“…훗.”
평소엔 거의 들을 수 없는 강주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생들이나 하고 있을 법한 장난을, 스무 살인 우리가 하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자연과 편안한 분위기가 겹쳐질 때, 사람들은 유치해지는 모양이다.
“부회장님은? 안 오신대?”
문득 윤지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강주연 혼자 온 게 생각나 화두를 꺼냈다.
하지만 이 질문엔, 강주연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뭐지.
나 뭐 잘못 말했나.
“…피곤하시대.”
“아, 그래? 하, 하하. 박진우도 그러더라. 귀찮고 피곤해서 오기 싫다고. 내가 오자고 그렇게 꼬셨는데, 죽어도 안 오려 하더라고. 이렇게 피로가 확 풀리는데.”
“응.”
조졌다.
이거 거의 저번 써클룸 회의실에서 보였던 수준의 싸늘한 기운인데.
마치 랩을 하듯 쓸데없는 말을 쏟아냈지만, 효과가 없어 보였다.
“…피로가 풀리긴 하네.”
다행히 그 기운이 오래가진 않았다.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란 걸 그녀도 알기 때문인지, 강주연은 조용히 말을 받았다.
그리고 몽글몽글한 온천의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다들 온천에 오는 건가?
“ … … 그럼 이번 신입 클랜원은 5명만 뽑는 거야?”
“응. 인력이 부족해도, 확실하게 뽑아야 하니까.”
“와… 역시 대형 클랜은 다르구나.”
어쨌든 일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아카데미 얘기와 <불의 심판> 클랜 얘기가 주를 이뤘지만, 태생이 홀더들인 만큼 이런 주제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주연에게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신선하고 재밌었다.
첨벙- 첨벙-
대화가 끝나고 조용해질 때면, 꼭 물소리가 또 들린다.
나는 그 기분 좋은 정적 속에서, 조용히 말을 꺼냈다.
“강주연.”
“응.”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강주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때 왜 날 도와준 거야?”
“…그때?”
“응. 우리 처음에 지하 던전 공략 갈 때. 나랑 전혀 모르는 사이였잖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1학기.
처음 아카데미 지하 던전을 공략했던 때.
그때 사실 강주연과 문가은의 도움이 없었다면, 던전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다.
당시 지하 던전의 난이도는 내 능력치와 룬 레벨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고급 화력을 선보인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괴수들을 잡을 딜이 현저히 부족했을 테니까.
던전 공략 보상, 연계된 성장 방향, 새로운 룬 등…
나는 그때의 공략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내내 궁금하기도 했다.
나와 일면식도 없던 강주연이, 내 뜬금없는 제안을 받아줬던 이유에 대해.
그녀와 꽤 오래 친해지고, 많이 편해진 지금에서야…
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냥… 돋보였어.”
“돋보여?”
“…응.”
그리고 그런 내 질문에.
강주연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입학시험이 있던 날… 도재현은 가장 돋보였어. 실력은 부족하지만 침착함이 있었고, 오래 싸워서 지쳤지만 끈기가 있었어.”
첨벙-
강주연은 어색한 듯 물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먼저 다가와서… 그래서 같이 한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그녀답지 않은 기나긴 문장.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동안의 나는…
강주연에 대해 일종의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원작의 주요 인물, 여주인공, 오래 봐 온 사람.
종이로 접해왔던 정보들을 맹신하며, 늘 그녀를 나만의 잣대로 판가름했었다.
“…….”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한 강주연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줄만 알았지만, 정이 있고 내면에 따뜻함이 있었다.
늘 강하고 당당한 줄만 알았지만, 마음 한 켠엔 여린 부분이 있었다.
함께 파티사냥을 하고, 함께 클랜 생활을 하고, 그 연이 이어져 지금은 함께 같은 써클에 있기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봐오고 친해지는 동안, 강주연에 대한 편견들은 내 안에서 많이 벗겨진 것 같다.
그래서…
“…재현아.”
“어?”
“나… 이름 부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불렀으면 해서….”
그래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강주연의 이런 모습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떤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지…
이제는 그 진심이 모두 느껴졌다.
첨벙-
고개를 숙인 강주연의 어색한 물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나는 그에 웃으며 답했다.
“그래, 주연아.”
오늘 하루의 끝.
예상치 못하게 온천 혼탕에서 마주쳤지만…
어쩐지 그녀와 훨씬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